345화 저마다의 꿈 (4)
『이 개 같은 자식이!』
내 도발에 발끈하는 녀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습관처럼 접속해서 시간만 때우며 하루를 보내던 나날들.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간 3년의 시간.
언제나 뚜렷한 목적으로 가득차 있던 박태후와 달리…… 나에겐 어떠한 목표도, 아무런 꿈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전부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이룩해 놓은 것이지. 그래서 난 남들과 똑같이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서, 정상의 자리를 쟁취해보고 싶었다. 타연을 통해 내가 가진 역량을 모두에게 당당히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사실 난 대관식 때 신검을 뽑고 나면, 타연을 그만 접고 그룹의 다음 후계자로 본격적인 계승 절차에 들어가려 했었다. 방송사까지 초청해 대대적으로 대관식을 진행했던 것 또한 그 때문이었지.
이 안에서 공공연히 황제가 돼보겠다던 녀석의 꿈은 실은 타연 최초로 국왕이 되는 것까지였다.
현실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놈이기에 어쩔 수 없이 타협했던 지점.
타연만큼 제대로, 그리고 열심히 몰두해봤던 건 태어나 처음이었을 테니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을까?
한데 모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접으려던 녀석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녀석과 정반대였던 ‘내’가 있었다.
“계속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계실 겁니까?”
『……뭐 바쁜 일이라도 있어? 어차피 당신과 한 계약과 지금 이건 별개의 건일 텐데?』
그렇게 서로 잠시 복잡한 시선을 주고받던 우리 둘 사이로, 테오시스가 끼어들었다.
잠자코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이곳을 정리하고 어서 로그아웃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누군가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정말 수습 불가입니다! 언제까지 배혁진 이사를 타연 바깥에 붙잡아둘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곳에 어느 유저가 접근할 수 있다고 그딴 소리를 하지? 왜? 혹시나 내가 계약을 지키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 하핫! 다리우스라면 모를까, 태성 그룹의 박태후가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완연한 마족의 외형을 한 황제.
그 모습으로 현실 속 사람들이 쓰는 말을 하는 걸 보고 있자니, 한편으론 기괴해 보였다.
“박태후 당신, 지금 너무 방심하는 것 같은데…… 지금 결코 안전한 게 아닙니다. 밑에 층엔 아직 10명이나 살아있다고요!”
『크하하! 설마 지금 내가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이 페이즈로 돌입하면서 황제에게 약점이 사라졌다는 걸 잘 알 텐데 말야? 저 자식이 아무리 속성 내성을 올렸다 한들, 속성 공격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거 개발자라 너무 잘 알고 있잖아!』
“그러면 그렇게나 증오한다는 이 사람부터 당장 처리하세요! 이 이상 그를 놔뒀다가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걸 두고 볼 순 없습니다! 만약 이러다 정말 황제라도 된다면 끝이라고요!”
『하하! 지금 내가 저 자식한테 지기라도 할까 봐 겁난단 소리야? 좋아, 그럼 더 시간 끌지 않고 어디 한 번 제대로 즐겨볼까? 일방적인 스펙 차이로 당할 때의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이번엔 반대로 느끼게 해주지!』
여전히 한결같은 저 떠버리 같은 입.
굳이 묻지 않아도 정보를 줄줄 뱉어대는 걸 잘 듣고 있었는데 끝이 났다.
녀석이 검게 물든 양손을 마치 낫처럼 펼친 채, 내게 다가오는 것으로.
“잠시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네가 아닌 저 테오시스에게!”
이번 전투가 시작되면 두 번 다시 멈출 수 없다.
그리고 솔직히 혼자서 저 황제와 겨룰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 서둘러 질문부터 던졌다.
“테오시스 님! 대체 이러는 이유만 좀 알려주시죠? 돈이라면 벌 만큼 벌었을 텐데…… 자신의 커리어를 먹칠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릴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거래를 한 이유를요! 혹시 놈에게 협박이라도 당하고 계시는 겁니까?”
“…….”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자식이 아무한테나 협박을 일삼는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푸흡! 협박? 내가 저 여자를? 헛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군.』
“넌 잠깐만 좀 닥쳐 봐!”
『늘 잘난 척만 하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내가 이따위 놈한테 당했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야.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니 하나만 알려줄까?』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테오시스가 아닌 다리우스로부터 나왔다.
“뭐? 지금 무슨 소리를…….”
『우리의 계약은 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다. 결과가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난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지. 왜냐면 나를 먼저 찾아왔던 건…… 바로 저 여자였으니까!』
충격적인 다리우스의 폭로.
그에 테오시스의 얼굴을 돌아보니,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전부 긍정하는 듯한 반응.
그에 나 또한 결국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테오시스! 당신이 어떻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
혹은 감당하기 힘든 협박.
살다 보면 그런 일들에 넘어갈 수도 있다.
아무리 게임 속에선 전지전능한 신 같은 존재라 해도, 그걸 조종하는 본질은 현실 속 한 명의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오시스의 배신이 밝혀진 순간엔 무척 놀라긴 했지만 분노가 일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실망이 컸을 뿐.
하지만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 모든 악연의 시작이, 다리우스가 아니라 테오시스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니?
이 여자가 한낱 조력자가 아니라 주동자였다니!
깡! 깡깡!
양손의 검을 있는 힘껏 휘둘러보았지만, 그녀의 몸엔 보호막이라도 쳐져 있는지 공격이 튕겨져 나왔다.
까가강! 까강!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
“도대체 왜, 왜 그런 겁니까!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었어요? 응? 그래서 그런 거냐고요!”
아무리 공격해도 조금의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는 공격.
하지만 내 분노만큼은 전해진 걸까?
얼음장같이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균열을 일으킬 순 있었다.
“……합니다.”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산드로 님. 당신과 지옥불 님에게는 정말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균열은 바로 죄책감.
그녀는 후회인지 슬픔인지 모를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사죄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까? 뭡니까? 정말 돈 때문이에요? 아니면 회사 내 문제 때문에?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세요!”
“그런 시시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답니다. 굳이 얘기한다면…… 제게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나를, 그저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테오시스.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걸 위해…… 아앗!”
갑자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멈춰버렸다.
아니, 마치 석상과 같이 굳어버렸다.
『뭐지? 설마……?』
그렇게 잠시 후, 돌연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로 직전 이오네스가 사라지던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오호…… 네 짓거리냐, 산드로? 테오시스를 로그아웃시키다니…… 제법인데?』
“일 처리가 참 빠르기도 하시네. 역시 형님이랄까?”
『뭐라고? 누굴 말하는 거냐?』
서둘러 내려보낸 축빙 형님.
형님은 크림슨 나이트들 처리를 서포트하는 동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타연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가진 한 명이자, 오프라인에서도 힘을 쓸 수 있는 사람.
바로 지옥불 형님에게!
그렇더라도 당장 그녀가 현실 속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란 힘든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나 빠른 조치는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한테 너처럼 수많은 부하는 없어도…… 목숨을 나눌 만큼 소중한 동료들은 좀 있어서 말야. 지금 같이 정작 필요할 땐 곁에 없는…… 네 쓸데없는 부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익! 이제 그만 죽어라!』
그리고 마침내 공격을 시작한 다리우스.
암흑 기운에 뒤덮이다 못해 완전히 검은 피부로 변한 녀석은 양손에 수십 센티미터도 넘게 돋아난 손톱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부웅!
하지만 그 공격은 회피 판정도 아닌 모션으로 피해버릴 수 있었고.
나는 커져 버린 덩치 덕분에 공격할 구석도 많아진 녀석을 향해 신검을 길게 뻗었다.
검의 최대 리치를 정확히 계산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이 쥐새끼 같은 놈!』
“여전히 그 소리냐? 도둑 유저한테 그 말은 극찬이나 다름없는 거 몰라?”
『다물라고 이 개자식아! 내 평타 공격엔 네 잘난 내성도 소용없을 테니까!』
[제피르 3세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제피르 3세로부터 9,88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
아닌 게 아니라 녀석에게 들어오는 데미지가 달라졌다.
지금 놈의 외형은 누가 봐도 육탄 공격형 보스 몹으로 변한 상태.
지난 페이즈가 마법 특화형이었다면, 이번 페이즈는 물리 특화형 모드인 듯싶었다.
‘미쳤구나 정말. 나나 되니까 이 정도지, 어떤 유저가 이딴 공격을 버텨낼 수 있겠어?’
그에 걸맞게 놈의 평타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근 1만 데미지를 넘나들었다.
아무리 탱커 직업이 아니더라도, 현재 착용 중인 온갖 디바인 장비들과 S급 업적들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오버밸런싱 몹이었다.
『으아악! 이 빌어먹을 자식!』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 스펙 몬스터의 몸을 빌렸음에도.
나를 뜻대로 요리할 수 없자 녀석이 갑자기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그럴 만도 한 게 지금 녀석은 최고 스펙을 갖추게 됐지만, 대신 유저와 같이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순 없었다.
또한 빙의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듯, 나와 같이 정밀한 거리 계산하지 못했고 공격 타이밍도 종종 미세하게 어긋났다.
‘내가 단순히 템빨로만 이 자리에 온 줄 알아? 잊고 있었나 본데…… 넌 원래부터 나보다 컨트롤이 아래였어!’
그렇게 폭주하는 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 지옥불 형님과 둘이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드로야. 게임 인생의 2막을 이 타연에서 시작하면서, 형에겐 한 가지 목표가 있었던 거 아니?
-타연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는 거요?
-아니. 그딴 건 조금도 관심 없다. 내가 갤럭시 워 현역이던 시절부터 들은 말이 게임 역사상 최고의 게이머였으니…… 그런 수식어는 질릴 만큼 들었거든. 그만큼 게임 재능에만큼은 자신 있는 편이기도 하고.
-하하! 물론 그러시겠죠! 어느 누가 헬파이어의 전성기 때 위엄에 비빌 수 있겠어요?
-하지만 드로야, 이건 알고 있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어폐 같긴 하지만……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되는 건 또 아니다.
-네?
-재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걸 만회할 수 있는 끈기와 노력, 그리고 창의력이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재능의 벽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비록 갤럭시 워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이곳 타연에서 처음으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지.
-형님 설마…… 지금 제 얘기하고 계신 건 아니죠?
-너 맞다 이 자식아. 형이 장담하는데, 아무리 운이 없었더라도 네 재능이 미친 듯이 뛰어났다면 3년 동안 그렇게 조용히 묻혀있지만은 않았을 거다. 물론 너에게도 분명 재능은 있어. 단지 그게 타오를 수 있는 발화점이 지나치게 높았던 것뿐이지.
-흠. 지금 병 주고 약 주시는 거예요?
-재능? 중요해 물론. 하지만 재능이 모든 걸 좌우하지는 않는다. 넌 그걸 신검을 줍고 난 이후 모두에게 보여줬어. 그간 네가 보여준 행보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증명해주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너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많은 영감과 감동을 받았을걸?
-…….
-그러니 믿어라 너 자신을. 비록 최고의 재능을 갖지도, 최고의 환경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결국 너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연 최고의 플레이어가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