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346화 (346/350)

346화 저마다의 꿈 (5)

-……고맙습니다, 형님.

이번 레이드는 속성 내성이 중요했고, 그걸 극대화한 유저는 나 뿐이었기에 내 역할이 중요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래왔지만, 특히나 이번은 나의 활약 여부가 레이드 성패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것.

그런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발 벗고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내색하지 않았지만 부담감이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지옥불 형님은 그 사실을 귀신같이 눈치채시곤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경기를 겪어봤는데 지금 네 기분 하나 모를까 봐?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신지석, 니가 최고라고. 이거 생각보다 효과 있으니까, 형 말대로 따라해 봐라. 타연에서만큼은 네가 최고라고.

-굳이 셀프 최면할 필요가 있겠어요? 저를 최고라고 말해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헬파이어인데요!

그렇게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주신 형님은 그 후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이제는 최고의 리더가 돼보고 싶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최고의 플레이어들을 키워보고 싶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게임 인생 2막이 될 거라고!

살아있는 전설 헬파이어의 타연 속 목표.

그건 자신의 전성기 시절을 능가하는 탑 플레이어를 직접 만들고 이끄는 것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소위 천재라 불렸던 이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걷게 되는 길을 형님도 선택한 것이다.

‘내게 당당이와 같은 재능은 없어도…… 그리고 너와 같은 환경이 없었어도 난 이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말은 전부 배부른 투정일 수밖에 없어!’

슥! 스윽!

지그재그로 움직여 황제의 거친 공격을 피하며, 계속해서 검 끝만 살짝 닿는 아슬아슬한 공격을 먹였다.

나를 좀처럼 맞추지 못하자 점점 더 광분하는 황제.

아니, 다리우스를 보며 나는 차게 웃음 지었다.

“이제 와 느끼는 거지만 세상 참 공평하네. 모든 걸 다 가졌던 놈이, 지금은 달랑 몬스터 몸뚱어리 하나 가졌을 뿐이라니. 반면 뭐 하나 가진 거 없었던 난 수많은 템들과 동료들이 생겼는데 말야!”

『이 개자식아! 그만 좀 닥치고 싸우라고!』

놈이 열 받아 죽으려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우스워 보였기 때문.

막대한 자금력과 많은 부하들.

거기다 운영자로부터 비밀스러운 서포트까지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너를 꺾고 최고를 차지하게 된 건, 결국 쥐뿔도 없었던 나라니!’

나라면 쪽팔려서 이런 짓은 알아도 포기했을 텐데.

두 번의 죽음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녀석은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한데 그마저도 가진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반면 많은 전투와 레이드 등 온갖 시련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내가 동경하던 이에게 최고라고 인정받게 된 나는, 이보다 더 침착할 수 없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궤적이 큰 공격은 모션으로 피하면서 녀석의 공격 범위에 걸쳐 검을 스치듯 공격해 딜을 누적시켰고.

작은 공격은 회피 판정을 믿고 맞아주었지만, 대신 무조건 2대 이상의 공격과 맞교환했다.

‘멍청한 자식! 다 잡은 것마냥 자신만만해 하더니, 오히려 상대하기 더 쉽잖아?’

유저의 이성으로 몬스터를 조종한다는 것.

거기엔 당연히 이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나 안타깝게도 이 황제 안에 들어가 있는 다리우스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았다.

마법형에서 전사형으로 변해 신체 스펙과 물리 공격력이 급증했을지는 몰라도.

빙의라는 낯선 경험과 달라진 신체 크기 등, 여러 익숙지 않은 점들이 정교한 컨트롤을 방해한 것.

또한 들어가 있는 게 하필이면 지금의 다리우스라는 것도 한몫했다.

격투 게임만 해도 똑같은 캐릭터를 조종하더라도 유저의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인데.

아무리 최강의 몹이라지만 저리 흥분한 상태로 제대로 조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유저라서 그런지 미묘한 무빙 훼이크, 혹은 사각 노리기 등등.

유저들의 듀얼에서나 먹힐만한 잔기술들이 고스란히 먹혀들었다.

즉 녀석은, 차라리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자랑하는 AI에게 조종을 맡기는 게 나을 만큼 상대하기 수월한 상대였다.

그리고 녀석이라고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 쥐새끼야! 좀 맞으라고!』

쉬이잉!

근접 공격을 멈추고, 양손을 활짝 펴 암흑 구체를 날린 황제.

마치 매직 미사일처럼 쏘아진 4개의 마법구가 내게 날아왔지만.

[암 속성 마법 공격을 흡수하여 15,256의 체력을 회복했습니다.]

[암 속성 마법 공격을 흡수하여 14,666의 체력을 회복했습니다.]

……………………

슥, 슥, 스슥!

신검 위주의 공격 때문에 봉인해놓다시피 한 왼손을 휘두르자, 전부 마신검 안으로 쏘옥하고 흡수되고 말았다.

『그, 그게 뭐냐!』

아무래도 빙의 직전의 전투는 보지 못했던 모양.

“넌 인마, 니가 가졌던 검도 제대로 모르고 있냐? 마신검에 흡수 옵션 있잖아!”

『이런 제기랄! 속성 내성 말고도 이딴 거지 같은 것까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뭐가 하는 수 없어?”

『이젠 나도 진심으로 널 상대해 주마. 네 컨이 나은지 내 컨이 나은지, 한번 승부를 내보자고!』

웃기는 자식.

애초에 치트키를 쓴 거나 다름없는 최강의 몹에 들어가 있으면서 잘도 저런 소리를 내뱉다니.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한편으론 녀석답다고도 느껴졌다.

그래 박태후, 넌 원래부터 그런 자식이었지!

“말해 무엇 하냐! 어서 공격이나 날려라!”

[재빠른 몸놀림!]

[태세 전환!]

마법 흡수로 풀피가 돼버린 나.

그래서 이번엔 자신만만하게 정면으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어라?’

한데 녀석이 피했다.

지금껏 신체 스펙만 믿고 공격 일변도였던 것과 달라진 패턴.

녀석은 긴 다리를 활용해 옆 무빙을 치며,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타이밍을 노리며 공격을 아꼈다.

완전히 결투에 돌입한 유저처럼 행동하는 모양새였다.

[제피르 3세로부터 7,799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피르 3세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

그러자 녀석으로부터 피격되는 공격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계속 익숙해지고 있었구나!’

아무래도 빙의 경험이 적거나 이번이 처음인 게 맞았던 듯, 그 사이 황제의 신체에 적응해버린 것.

따라서 더는 우습게 볼 수 없게 됐다.

가뜩이나 공격 시마다 반사 데미지가 디폴트값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피격 횟수까지 늘어나니 이젠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흥! 이제 조금씩 위기가 느껴지나 보지?』

“너야말로 그놈의 주둥이 좀 닫고 싸울 수는 없냐?”

『건방진 새끼! 그것도 이제 곧 끝이다!』

역시 왕년의 통합 랭킹 1위인가?

갖은 서포트와 편법들로 달성한 자리라도 그게 허명은 아니었는지, 녀석이 최선을 다해 집중하자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 워낙 레벨이 높은 보스인지라 회피 판정도 생각보다 잘 뜨지 않았다.

[‘역작의 품격’ 효과가 발동되어 모든 피격 데미지를 20% 감소시킵니다.]

결국 체력이 50% 미만으로 떨어져 디바인 갑옷 세트 효과까지 발동되기에 이르렀고.

그럼에도 녀석은 서두르지 않고 나를 천천히 궁지로 몰아넣었다.

『꼴 좋구나! 내가 얼마나 이런 날을 꿈꿔왔는지!』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최대한 피한다고 피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녀석은 내 체력을 10%까지 깎아내 결국 비장의 무기까지 발동되도록 만들었다.

[체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감소하여 ‘천사장의 보살핌’ 효과가 발동됩니다.]

‘이런!’

이 정도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

서둘러 채팅창에 도움을 요청하는 도중, 녀석이 공격 대신 원형 보호막 안에 갇힌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참에…… 나도 네게 한 가지만 물어보자.』

페리엘의 보호막은 누적 데미지를 입히다 보면 깨지고 말지만.

일정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해제된다는 사실을 원래 주인이었던 녀석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갑자기 지금?”

『누구에게나 꿈은 있는 법이지. 한낱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이 황제란 놈조차도, 신의 저주에서 벗어나겠다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한데 유저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체 뭐가 궁금하단 건데?”

『산드로. 아니, 강지환. 타연에서의 네 꿈은 무엇이었냐? 고작 나를 쓰러뜨리고 태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알량한 복수심 말고. 네가 이 게임을 시작하면서 품었던 목표 말이다.』

“……내 꿈?”

갑자기 현타라도 온 걸까?

뜬금없는 녀석의 질문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거 아나? 사실 난, 평생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타연에 몰두하도록 만든 건 너나 다름없었으니까.』

“뭐?”

『어릴 적의 난 게임을 좋아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집착이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와의 승부가 있던 그 날, 내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게임 플레이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찾아오신 어머님 앞에서 비참히 패배했지. 그리고 그날 이후로 게임은 두 번 다시 쳐다도 보지 않았다.』

“…….”

『한데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게임을 접하게 됐고, 너도 알다시피 그건 이 타이탄 연대기였다. 이곳에서 난 그동안 억압받아온 삶을 전부 보상받을 수 있었고, 내 힘으로 황제가 되겠다는 꿈도 꿀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니 앞길을 막았다 이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막은 게 아니라 빼앗은 거지! 네 꿈이 뭔진 몰라도 그게 황제가 되는 건 아니었잖아? 그건 내 꿈이었다. 한데 왜 난 이런 비참한 꼴을 한 채로 황제가 되려는 널 막고 있어야 하는 거냐! 넌 바라지도 않던 황제가 되기 직전이고 말이다! 너라면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있겠냐!』

휘릭.

어느덧 천사장의 보살핌의 시간이 끝나 망토로 이루어진 보호막이 사라졌다.

그리고 난 거의 남지 않은 체력 그대로 녀석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놈은 공격해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라도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실컷 다 지껄였냐?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는 몰라도, 이제 가슴이 좀 후련해졌냐고?”

『뭐라고?』

하지만 나는 놈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간에 난 조금도 상관 안 해. 다 큰 성인이 이제 와 자기연민이라도 하는 거야? 그것도 세상 부족한 거라곤 단 한 개도 없었던 너란 놈이?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넌 정말, 끝까지 고쳐먹을 수 없는 하류인…….』

“끝까지 고쳐먹을 수 없는 건 너지, 박태후. 악당이면 끝까지 악당답게 굴어. 온갖 비열한 짓은 다 하던 놈이 이게 뭐야? 너가 그런 말 하면, 내가 뭐 동정이라도 해줄 줄 알았어?”

[그레이터 힐!]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도중 갑자기 체력이 쑥 차올랐다.

그와 동시에 방문 쪽에서 반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드로야, 오래 기다렸지?”

“밑에는 다 정리했고…… 드디어 쇼타임이다!”

“길마님! 저희 버닝스타, 전원 다 모였습니다!”

돌아보니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들의 얼굴들이었다.

크림슨 나이트들을 전부 정리하는 동안, 한 명도 리타이어되지 않은 모양.

그 천군만마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리우스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나한테 원래 꿈 따윈 없었어. 나도 너 때문에 꿈꾸는 법조차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거든. 하지만 말야, 지금은 생겼다? 바로 우리 길드원들과 오래도록 잘 먹고 잘사는 거! 이 타연이란 게임이 끝나는 그 날까지 말야!”

애초에 난 최고가 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전부 내 뒤에 있는 동료들 덕분.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다리우스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강하고 위험한 놈일지라도.

놈은 하나고, 우리는 함께였으니까!

『조무래기들이 뭉쳐봤자 조무래기지! 어차피 산드로부터 죽이고 한 놈도 남김없이 없애려 했다. 겁도 없이 이곳에 올라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금세 체력이 채워진 나 대신 타겟을 길드원들로 바꾼 다리우스.

하지만 난 그런 녀석의 동선을 최대한 방해하며 붙잡았고.

그렇게 근접 공격형이라 변변찮은 광역 마법 하나 없던 녀석의 체력바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25%에 다다르자.

쿠웅!

부유하던 천상궁이 갑자기 멈춰섰고.

『크흡!』

마침내 마지막 페이즈 구간에 돌입한 듯.

녀석이 최후의 변형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