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득템왕 (1)
5미터는 될법하게 커진 신체.
등 뒤로 돋아난 검은 피막 날개.
도깨비불처럼 몸 주변을 배회하는 십수 개의 검은 기운 등등.
인간이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완연한 고위 마족의 외형이 되었다.
퍼퍼펑!
그리고 변신을 끝마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침소의 벽과 천장이 터지듯 날아갔고.
바닥만 남은 2층의 천상궁은 푸른 하늘을 배경 삼은 공중 전투장이 되었다.
“무슨 신기술을 쓸지 모르니 다들 조심해요!”
“네!”
최후의 전투답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서둘러 주의를 시키며 변신을 마친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뭐가 됐건 한 방에 죽지만 않으면 돼!’
그나마 다행인 건 메인 탱커인 현중이의 공백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레이드 대상과 달리 눈앞의 황제는 어그로 관리, 혹은 공격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유저’가 조종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드디어 좀 쓸만한 스킬들이 생겨났군!』
잠시 제자리에서 무언가를 살펴보던 것 같던 녀석.
그러다 우리를 둘러보며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산드로: 마법형과 전사형 페이즈를 차례로 거쳤으니까, 예상컨대 이번에 둘 다 혼합됐을 거예요! 전략은 플랜C! 딜은 제가 할 테니 각자 생존이 최우선입니다!]
[라스트챤스: 네! 보나 마나 데미지가 엄청 날 테니 무조건 도망만 다닐게요!]
황제의 어그로가 관리될 때가 플랜A.
랜덤 타겟팅일 때는 플랜B였고.
플랜C는 랜덤 타겟팅이면서 탱커가 죽었을 때를 가정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연우나 대탐이 등이 남아는 있었지만, 현재 다리우스가 빙의한 황제에게 탱커의 유무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각자 자신의 안위를 챙기면서 임기응변으로 딜을 넣는 플랜C가 그나마 최선이었다.
타탓! 탓!
놈을 가운데 둔 채 제각기 흩어진 길드원들.
그런 우리를 향해 놈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읊조렸다.
『다크니스 노바!』
콰과광!
놈이 터뜨린 암흑 마법.
그건 놈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암흑구들이 전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광역 마법이었다.
[제피르 3세로부터 4,222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암 속성 내성이 95%인 내게도 적지 않은 데미지.
한데 이 마법에 우리 길드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적중되었다.
[치유의 섬광!]
[신성한 보호막!]
곳곳에서 번쩍대는 물약 복용 이펙트.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즉각 시전된 축빙 형님과 라푼젤의 광역 힐.
놈의 마법 공격 한 방에 우리 파티원들은 대부분 반피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뭔 데미지가 이렇게!”
“앗 또 날립니다!”
그 한방으로도 힘겨운 상황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놈이 한 번 더 동일한 모션을 취하며 외쳤다.
『다크니스 노바!』
“으악!”
그리고 연이은 광역에 전장은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뭐야! 이런 엄청난 광역 마법이 쿨타임까지 이리 짧다고?”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
급하게 녀석에게 달려들어 기존과 같이 검을 휘두르자.
[암흑 기운으로 인해 2,362의 반사 피해를 입었습니다.]
[암흑 기운으로 인해 2,226의 반사 피해를 입었습니다.]
……………………
지금까지보다 정확히 2배는 더 많은 반사 데미지가 들어왔다.
“진짜 막판 밸런싱이 미친 수준이구나?”
『크하핫! 이제 좀 표정이 볼만해졌구나! 하지만 늦었다!』
과연 현존하는 최고 보스 몹의 마지막다운 난이도이었다.
마법이면 마법, 물리 공격이면 물리 공격.
둘 모두가 혼합된 것은 물론 반사 데미지마저 2배로 올랐다.
이건 거의 잡지 말라고 만들어둔 수준.
이런 스펙이라면 안에 다리우스 대신 초등학생이 들어가 있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고르곤 소환!”
그래도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
내 펫 소환으로 전장에 고르곤이 나타나자 연이어 2마리의 고르곤도 뒤따라 나타났다.
괴수 군단장의 조련 장갑을 착용한 라챤이가 이번에 테이밍한 몹을 동시에 꺼낸 것들이었다.
“다들 빨리 고르곤 뒤로 숨으세요! 골고루!”
그리고 내 외침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길드원들이 고르곤들을 거점으로 뭉쳤다.
-드로 형님. 투 메르타스 레이드 때처럼 이번에도 테이밍 몹을 방패막이로 쓰면 어떨까요?
-응? 강화된 아이언 골렘 말하는 거야? 그건 이제 레벨이 너무 낮지 않아……?
-그거 말고요. 그것만큼 덩치도 크면서 몸빵 되는 놈이 테이밍하기 좋은 곳에 널려있잖아요. 고르곤 말이에요.
-고르곤?
-네. 일단 생각만 해본 건데요. 고르곤은 마계 몹이라서 암 속성 내성도 높지 않을까요? 그럼 황제의 방패막이로 써먹기에 딱 아니겠어요?
라챤이의 의견으로 이번에 테이밍한 고르곤들.
노스랜드의 보스 몹보단 다소 작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가 코끼리만 한 놈들답게 서너 명이 마법을 피하기엔 충분했다.
『다크니스 노바!』
내 무차별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 번째 광역 마법을 시전한 다리우스.
하지만 이번 공격은 고르곤들에 막혀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르곤들의 체력 또한 1/3 정도밖에는 닳지 않았다.
‘제대로다!’
마족의 공격을 마계 몬스터로 디펜스한다.
혼자라면 생각 못 해냈을 아이디어가 완벽하게 통했다.
잠시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난 대탐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템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대탐아, 형이 이걸로 사람들 구하는 거 봤었지? 믿는다?”
“아? 저번에 말씀하신 비행 구조요?”
“그래. 가장 위험한 사람 위주로 이걸로 좀 구해 줘. 그리고 파랑아, 형한테 블러드 웨폰 좀!”
“네? 아, 네! 블러드 웨폰!”
[기파랑으로부터 블러드 웨폰을 부여받았습니다.]
대탐이에게 군단장의 채찍을 넘겨줌과 동시에 최강의 버프가 들어왔고.
이제 반사 데미지와 다리우스의 근접 공격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난, 다시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녀석에게 붙었다.
그리곤 오른손에 든 신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푹! 푹! 푸푹!
극상성 덕분에 막대하게 들어가는 데미지.
그에 비례해 내 HP는 닳는 것보다 흡수하는 게 훨씬 더 많아져 풀피가 유지됐고.
동료들의 합류로 들어온 각종 버프와 대탐이의 오라, 그리고 소수정예와 같은 업적 효과가 더해져 공격력이 더욱 극대화됐다.
『네크로맨서가 이중직업으로 인챈터를 택하다니. 제법 연구 좀 한 것 같다만 그 버프를 두 번 받긴 힘들 거다!』
일반 AI였다면 내가 무슨 버프를 누구에게 받았든 상관 안 했겠지만…….
나를 무시한 채 연속으로 광역 마법을 날리던 다리우스가 갑자기 마법을 중단하고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기파랑.
마지막 페이즈에 접어들며 무적이 된 것마냥 자신만만해 하던 녀석이었지만.
내게 블러드 웨폰 버프가 더해지는 것만큼은 무척 위협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모양이었다.
『죽어랏!』
체격이 큰 만큼 빠른 이속으로 금세 기파랑이 숨은 고르곤 앞에 도달했고.
녀석이 긴 손톱으로 기파랑을 공격하는 순간.
[포획!]
펠아린의 부츠로 떠오른 대탐이가 기파랑을 공중으로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가르는 손톱.
다리우스가 그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지만.
공중에서 소환된 데스나이트가 놈의 머리통을 감싸며 도끼를 후려갈겼다.
『이런 조잡한 놈들이!』
그렇게 잠시 데스나이트가 매달려 놈의 시야가 방해받는 틈을 타.
모두들 원거리 공격을 날려댔다.
저격 모드를 시전해 연사를 날리는 라챤이와 쌍 단검을 날리는 당당이.
각종 보유 마법들을 전부 쏟아내는 축볼 누님과 카이저 형님.
그리고 길드원들의 체력을 풀피로 유지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주문을 외는 축빙 형님과 라푼젤까지.
오직 나만이 놈의 등 뒤에서 근접 공격을 하는 동안 나머지는 보조 딜에 집중했다.
이쯤 됐으면 아무리 랜덤 타겟팅 몹이라도 어그로가 바뀌거나 나를 돌아봤을 텐데, 상대가 다리우스였기에 그러지 않았다.
어떤 공격이 쏟아지던 이미 놓친 기파랑을 집요하게 뒤쫓아 움직였고.
대탐이가 어떻게든 대신 맞아보려 길막도 해보고 했지만, 결국 조금 전 내게 날렸던 연발 마법까지 날리는 집요함을 보여주었다.
“으악!”
[기파랑이 사망했습니다.]
『크하핫! 내가 말했지! 너희 전부 다 죽여버릴 거라고!』
결국 안타깝게도 현중이에 이어 두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고.
녀석은 그 과정에서 피가 제법 닳긴 했지만, 두고두고 위협이 될 인챈터를 빨리 잡아냈단 사실에 고무된 모습을 보였다.
『이제 힐러만 죽으면 너희는 모두 끝이다. 어차피 전투 지속력이 받쳐주지 않는 한, 내가 없더라도 너희는 절대 황제를 못 잡아!』
“누구 맘대로 힐이 없으면 끝이래?”
블러드 웨폰의 지속시간이 끝난 듯, 신검을 감쌌던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하지만 다리우스를 향해 반문하는 사이, 내 검에 다시 전과 똑같은 빛깔이 기운이 덧씌워졌다.
[축복받은파볼로부터 블러드 웨폰을 부여받았습니다.]
『뭐, 뭐냐? 인챈터가 또 있었어?』
“내가 말야, 너완 달리 인복이 참 많은 길드 마스터거든. 우리 길드원들이 나를 얼마나 끔찍이도 생각해주던지…… 정말 감동이었다.”
『무슨 소리냐!』
“설명할 시간 따윈 없고. 그냥 곱게 죽어. 건방지게 우리 현중이와 파랑이를 죽인 값은 무조건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 붉게 물든 신검을 움켜쥐며 난 다시금 녀석에게 붙었다.
『이런 건방진!』
쉬쉭! 쉭!
그에 이번엔 녀석도 당황했는지 맞서 반격해왔고.
속성 내성이 소용없는 직접 공격이라 한 방에 근 2만 가까운 무시무시한 데미지가 박혀 들었다.
[신성한 보호막!]
하지만 각종 버프와 힐링, 그리고 블러드 웨폰을 통해 무지막지하게 흡수되는 체력 덕분에 계속 풀피가 유지됐다.
『저 법사구나! 그 빌어먹을 놈의 버프를 준 것이!』
그러자 녀석은 다시 나를 공격하는 걸 포기한 채 축볼 누님께 달려갔고.
이속이 느린 누님이 블링크도 사용하며 피해 봤지만, 스치듯 맞은 근접 공격 서너 방에 순식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나나 되니까 버티고 있었던 거지, 누님 또한 랭커인데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끔찍한 공격력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눈앞에서 한 명 한 명이 죽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속상해하기보단 한 대라도 더 공격해야 할 때.
다행히 다들 각자의 이동기를 활용하는 한편, 공중을 날아다니는 대탐이의 구조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버틸 수 있었고.
[블러드 웨폰!]
18초의 지속시간이 끝나 사라진 블러드 웨폰이 또다시 누군가의 입을 통해 외쳐졌다.
『또냐! 도대체 너희 중에 인챈터를 몇 명이나 선택한 거냐!』
“이중 직업이 아냐, 이 멍청한 자식아! 전직한 누님을 죽였으면서도 그딴 소리가 나오냐!”
『대체 무슨 소리냐!』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놈에게 이 사실만큼은 알려주고 싶었다.
내 꿈이 왜 우리 길드원들과 이 게임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하고 싶은 건지.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레이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
“다들 이번에 분배받은 미완성 스킬북으로 블러드 웨폰을 익힌 거다! 자신의 이득과 상관없이 오직 길마인 나를 위해서!”
『뭐라고?』
5권의 스킬북.
그걸 가져간 5명의 길드원들.
각자의 테크트리와 스펙을 급상승시켜줄 좋은 기회였는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같은 스킬을 선택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얼마나 고마웠는지, 네가 평생 알 수나 있을까?’
그건 바로 인챈터의 ‘블러드 웨폰’.
오직 황제 레이드의 성공을 기원하며, 그리고 혹시나 실패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길드원들은 계정당 단 한 번밖에 익힐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기꺼이 희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이 순간 다리우스 빙의라는 최악의 상황을 타개할 신의 한 수가 돼주었다.
“그러니까 니가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난 절대 질 수 없어. 이런 최고의 길드원들을 두었는데, 길마란 놈이 못날 꼴을 보일 순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