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MMORPG 가상현실게임 리얼 포스가 등장했을 때, 전 세계가 열광했다.
아마, 그 동안 등장해 왔던 그 어떤 가상현실 게임보다 현실성 있는 시스템과 그래픽 혁명으로 유저들을 흡수했기 때문일 거다.
무수히 많은 히든 피스들, 드넓고 광활한 월드맵, 거기에 끝내주는 레이드와 PVP 시스템까지. 가히 리얼포스는 또 다른 현실을 구현해 낸 혁명적인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팔, 그 때는 몰랐지.
그게 정말 현실이 될 줄은.
정확히, 리얼 포스가 서비스 10주년을 맞을 때. 리얼 포스는 새로운 확장팩을 내놓았다.
확장팩 명, ‘멸망한 세계’.
컨셉은,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대항하는 대 괴물 판타로스가 오랜 봉인에서 깨어나 세계를 멸망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멸망한 세계 확장팩이 가동되는 그 날부터 리얼 포스의 하늘에는 숫자 하나가 떠 있었다.
D-365
그 숫자에 대해, 많은 이들의 추측이 있었다. 혹자는 저 숫자가 끝나면 게임이 문을 닫는 것이라는 말을 했고, 혹자는 판타로스가 마구잡이로 대륙을 휘저을 것이라고 했다. 혹자는 멸망이, 혹자는 게임사의 특별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365일이 지난 뒤.
새해를 맞아 제야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던 그 시점.
리얼 포스는 현실이 되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리얼 포스의 세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모든 이들은 레벨을 갖게 되었고, 리얼포스 속의 몬스터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기묘한 세상이었다. 가상 현실 속에 있어야 할 것들이, 현실로 뛰쳐 나온 셈이니까.
보스 몬스터들,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판타로스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이 멸망하는 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핵탄두도, 미사일도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판타로스에 대항해 유저들의 레이드 파티가 만들어졌다.
리얼 포스의 초 고레벨 최상위층 유저들로만 만들어진 마지막 공격대가, 판타로스와 격돌한 것이다.
1시간 13분.
그것이 마지막 공격대가 판타로스에게 대항한 시간이었다.
리얼 포스의 확장팩 이름대로, 세상이 멸망해 버린 것이다.
내 이름은 천태호.
그 레이드 파티의 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항전해 온 사람이었다.
리얼 포스의 레벨 랭킹 1위, PVP와 레이드 부분 토털 점수 랭킹 1위, 수집한 에픽 아이템 15종을 포함한 기타 등등은 이루 말 할 것도 없이 대단한 업적들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이자, 수십 개의 거물 스폰서를 거느린 걸어다니는 중견기업.
나의 자랑거리라고 할 만 한 것들은 얼마든지 더 있었으나, 그것으론 턱도 없었다. 판타로스의 앞에서, 그 사소한 자랑거리들은 한 줌 잿더미로 변해 버렸을 뿐이니까.
리얼포스가 현실로 튀어나온지 1년하고 1시간 13분이 지날 무렵.
소복히 쌓이는 하얀 눈 위로, 잿가루만이 남아 흩날려 버렸을 뿐이니까.
아직도 생생하다.
온 몸을 뒤덮던, 판타로스의 거대한 브레스가. 전신이 녹아 내리던 그 끔찍한 격통과,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소름끼칠 정도로 이질적인, 모든 것이 부서진 세상을.
사랑하며, 존경하던 동료들의 비명소리를.
그리고, 하얀 빛을.
어느 순간 눈을 뜨니, 12년 전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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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난 이야기였다.
“......”
태호는 눈을 뜬 채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한참 동안 보다가, 팔을 움직여 보았다.
팔은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다리도, 코도, 입도, 눈도. 모든 것이 제 위치에 붙어 있었다.
그제야 벌떡 일어섰다.
천국?
그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온 몸이 멀쩡하지?
판타로스는 어디 갔단 말인가?
조금 전 까지 최후의 항쟁을 하던 서울의 초토화된 대지는? 왜 갑자기 침대에 한가롭게 누워 있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태호는 베개 옆에 놓여 있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스, 스마트폰이잖아?”
크기도 손바닥만한 크기에, 제법 두꺼운 외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10년은 더 전에 쓰던 구시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태호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스마트폰을 만져 보았다. 분명히 옛날에 썼던 스마트폰 같아 보인 것이다.
세상에!
정말 시간을 되돌아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태호는 재빨리 날짜를 확인했다.
[2020. 10.12]
2020년이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조금 전 까지 태호는 2032년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판타로스에게 파괴된, 부서진 세계에 살고 있었단 말이다.
방금 전!
피를 튀기며 동료들이 죽어 나갔다. 바로 10분 전만 해도 말이다.
꿀꺽!
태호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귓가에는 아직도 동료들의 비명소리와, 마지막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너무 생생해, 이명으로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았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두 귀를 틀어 막았다. 삐이이- 하는 기묘한 이명이 계속해서 맴돌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
어쩌면 환각일 지도 몰랐다.
판타로스의 부하들 중, 5대 장군(將軍) 중 하나인 케노스라는 놈이 대규모 환각진을 이용해 광역 환각을 걸던 것을 떠올려 본다. 놈의 환각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을 보여주며, 달콤한 유혹을 한다.
태호는 눈을 감았다. 뒤로 두 걸음, 앞으로 한 걸음,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양 엄지 손가락을 깨물어 핏물을 낸 다음, 바닥에 십자를 그었다.
케노스의 환각진(幻覺陣)을 파훼시키는 해법이다.
“......”
허나 세상은 여전히 고요하고 미동조차 없다.
환각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태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2020. 10.12]
[오후 03 : 23]
“......정말인가.”
이 숫자가 정말이라면 12년 전으로 돌아왔단 이야기가 됐다.
가만히 앉아 눈을 꿈뻑이던 태호가 벌떡 일어서 창가로 나섰다.
“......!”
한가로운 도시에 건물이고 사람이고 그저 한가롭게 존재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확인해 봐도, 실존하는 현실이 분명했다.
그것도 퍽 눈에 익은 그런 광경이다.
부서지는 건물도, 죽어가는 사람들도, 마치 장난감처럼 짓이겨지던 자동차들도. 그 어떤 것도 없이 그저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태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 비현실적인 현실을 받아 들이고자 노력했다.
두 시간 정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얼추 지금의 상황이 정리가 돼 가긴 했다.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전신에 감돌고 있었다.
“하긴.”
생각 해 보면, 어떤 마법이나 기적이 일어나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일 같기도 했다.
태호가 조금 전 까지 살아가던 세계는, 그런 세계였다. 마법이 날아들고 몬스터들이 살아 숨쉬던. 스크롤 한 장 찢으면 어디로든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경우에 따라, 죽은 이가 살아나기도 하는 그런 세상.
리얼 포스라는 게임 속의 세상이 그대로 현실에 나타난 초현실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 기적이라 칭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를 ‘스킬’ 이라는 명목 하에 직접 목격한 바 있는 태호는, 어쩐지 심장은 뛰어도 천천히 이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 * *
거울을 본다.
근육질에 탄탄한 몸매, 그리고 휘황찬란한 아이템을 둘둘 말고 있던 자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서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 깡마른 몸매, 그리고 어쩐지 퀭한 두 눈.
천태호.
나이, 20살.
알바생.
빛나던 리얼 포스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 정말 볼품 없는 자신의 모습.
고아원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독립해 아르바이트에 치이며 살아가던 20살의 가을.
스마트폰 안에는 마땅히 이렇다 저렇다 할 연락처도 없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가상현실 체험방 사장님의 번호, 아르바이트생들의 번호, 그리고 이젠 보육원이라고 이름이 바뀐 고아원의 번호.
채 20개도 안 되는 목록에 어쩐지 허탈해진 태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야흐로 2020년.
가상현실 게임이 이미 대중에게 익숙해지던 시기.
프로게이머가 상상을 초월하는 부와 명예를 손에 넣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은 유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다양한 게임의 다양한 리그가 매주 출범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스폰서들이 게임 리그를 주최하며, 자사의 게임단을 꾸려 나갔다.
TV를 켜면 프로게이머가 출연하는 광고나 영화, 드라마 등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무렵.
모두가 그랬듯, 태호 역시 가상현실 게임의 세계를 동경해 왔다.
하지만 기기 값만 수백 만원에서 수천만원 대에 달하는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것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만 해당됐다. 돈 없고, 빽 없고, 가족도 없는 태호에겐 영 요원한 이야기였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기 급급한데 가상현실 게임은 개뿔이!
-라고 생각하며 체념한 채 살아가던 20살의 가을이 정말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한켠으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리얼 포스.
2020년 10월이라면, 아마 그 무렵에 리얼포스가 광고를 때릴 시점이었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본다. 리얼 포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가, 꽤나 독특했으니까.
인터넷 행사 응모에 운 좋게 리얼포스 가상현실 접속기가 당첨돼, 집으로 온 것을 본 그날이 떠오른다.
사실, 될 대로 되라고 그냥 신청해 본 것이다. 리얼 포스라는 게임이 오픈한다는 것은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클로즈 베타나 사전 광고도 없이 오픈 베타를 시작하는 배짱 운영에 금세 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행을 바라며 냅다 지르고 보는 게임들이 요즘 세상에도 많이 있었는데, 모조리 남김없이 망한 것을 보며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허나, 이게 웬 걸!
리얼 포스는 초반엔 미적지근한 인기를 보였다. 드넓은 맵에 사람 보기가 정말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식 서비스 후 딱 두 달 15일 만에 입소문을 통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가상현실 게임은 그 동안 제법 있어 왔지만, 리얼포스처럼 대단한 인기를 끈 RPG는 거의 없었다.
처음엔 적당히 플레이하던 태호가 점점 더 게임에 빠져 가고 리얼 포스의 아이템과 골드를 팔아 현금을 버는 것이 제법 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태호는 아르바이트를 때려 치우고, 전업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론, 미친 듯이 게임에 매달렸다. 하루에 눈을 뜨면 게임을 시작하고, 게임을 쉴 땐 정보 수집에 전념했다.
일단은 프리랜서의 생활이라 수입은 불규칙적이었지만 정말 많이 벌 땐 월 수십억 단위까지 벌었다. 말도 안 되는 수입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몰두했다.
정말 열심히 일 했다. 아니, 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일을 누구보다 즐겼던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리얼 포스는 정말로 돈 되는 게임이었다.
태호의 입장에선, 개천에서 용이 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 할 정도로.
유저들은 나날이 늘어 갔고, 태호는 무수히 많은 돈 되는 방법들에 통달해 갔다. 다양한 히든 피스들의 정보를 수집하며, 가끔은 이 기상천외한 게임에 감탄했다.
또한, 동료.
그 길을 함께 하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 역시 태호의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태호는 리얼 포스에 인생을 바쳤다.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태호가 화들짝 놀랐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 택배원이 큼직한 물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천태호씨죠?”
“아, 예.”
택배원이 바쁘다는 듯 물건을 건네곤 사라진다. 태호는 큼직한 박스를 받아 들고 들어와, 포장을 뜯어 보았다. 고글과, 접속기계가 동봉된 박스였다.
“......!”
와사삭 소름이 돋았다.
이 기억은 태호가 분명히 한 번 겪었던 기억이었다. 택배로 물건을 받고 기뻐하고 바로 일주일 뒤, 리얼포스의 오픈 베타가 이어질 터다.
리얼 포스.
그 애증의 이름......
태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실평수 5평. 좁은 원룸에서 게임을 시작하던 그 날이 새록 새록 떠오르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그래. 나, 12년 전으로 회귀한 거지.’
그 이질적인 말을 차마 혼잣말로 뱉을 수 없어, 속으로 삼켜 본다.
지난 12년을 돌이켜 보자면 태호에게 있어 리얼 포스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현실의 정치는 관심 없어도, 리얼포스 내의 세력구도엔 이미 통달해 있었다.
현실의 경제고 사회에도 딱히 관심 없지만, 리얼 포스의 경제 구조와 흐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게임을 생업으로 삼았던 시간이었으니까.
“이거 설마......”
그렇다면, 10년 뒤.
리얼포스의 마지막 확장팩, ‘멸망한 세계’ 역시 예정대로 진행 될 것이란 말인가?
최종 보스, 판타로스 역시 계획대로 등장 할 예정이며 놈으로 인해 현실이 초토화 되는 것도 기정 사실이란 말인가?
태호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며 고글과 접속기를 바라보았다.
살짝 어지러워, 비틀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찬 물을 벌컥 벌컥 마시고, 창틀에 기대어 바깥 세상을 보았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
따스하지만, 조금은 쌀쌀한 10월의 태양.
향긋한 가을의 냄새.
피부에 와 닿는 이 현실에서, 태호는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버린 것이다.
태호는 뒤를 돌아 보았다.
박스 안, 모든 것이 시작될 방아쇠가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리얼포스에서 시작되었고, 리얼포스로 끝났다.
분명히 모든 것이 끝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태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공존하는 감정은, 흥분과 두려움이었다.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 세계가.
그리고, 이 세상을 멸망으로 밀어 넣었던 그 세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