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5화 (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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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자, 이제는 눈 앞의 ‘전승’ 이라는 것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영구 사망한 아바타의 스킬 하나를 전승받을 수 있습니다’

스킬 하나를 전승 받는다?

에픽 콜렉터라는 직업에서, 단 하나의 스킬을 가져올 수 있다면?

자신이 평생 플레이해 온 직업이었다. 그 직업의 스킬 중, 무엇이 가장 사기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에픽 콜렉트.”

태호가 망설임 없이 되뇌었다.

[패시브 스킬 ‘에픽 콜렉트’ 로 결정하시겠습니까?]

“......예.”

샤아악!

동시에 눈 앞의 아바타가 흐릿해져 갔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12년간 플레이해 온 아바타가 사라진다는 것은 기묘한 상실감을 선사해 왔다. 멍하니 아바타를 바라보다,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태호가 고개를 저었다.

[전승되었습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재차 말이 떠올랐다.

[아이디를 설정해 주세요.]

* * *

태호의 아이디는 카이저였다.

오랜 세월 사용해 온 아이디인지라,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디로 많은 인연과 악연을 쌓았고, 울고 웃었기 때문이다.

아이디와 커스터마이징이 대강 끝나면, 시작 지점을 선택하여야 한다.

커스터마이징은, 특출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태호의 지론이었다. 기본 생김새를 베이스로, 머리나 키 눈 코 등을 적당히 평범하게 설정했다.

어차피,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연예인 커스터마이징이 인기였다. 아마 향후 리얼포스가 인기를 얻게 된다면, 온 사방에 연예인보다 예쁜 캐릭터들이 활보하게 될 것이다.

초기에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은 리얼 포스의 전 맵 100% 중, 고작 20%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도 충분히 넓다. 그리고, 그 중 태호가 선택할 지역은 바로 북대륙 끝 알바롱이었다.

알바롱 마을.

지형으로 치면 대륙 최북단, 평균 기온은 섭씨 13°c. 리얼 포스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은 오후 7시 40분, 날은 흐리며 폭설이 진행 중.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으며 곧 밤이 될 예정.

저레벨 몬스터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된 북대륙.

알바롱을 중심으로의 크기는 대략 현실의 강화도 급은 된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하게 넓다.

북대륙은 저 위로 너른 빙설원이 펼쳐져 있기에 항시 차가운 날씨가 고르게 유지된다. 자연히 그 생태계의 몬스터들은 털가죽이 두껍고 방어도가 높은 편이다.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유저들은 이 곳을 기피하기 마련.

멋도 모르고 선택했다가, 몬스터 사냥에 진땀을 빼다 캐릭터 삭제 후 다시 키우는 것이 다반사일 지경이다.

과거의 태호는, 호기롭게도 이 땅에서 게임을 시작했다.

이유?

그 때의 이유는 단순했다.

‘눈이 보고 싶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탈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초현실의 세계. 태호는 그 세계에 들어서서, 사방에 흩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았다.

“알바롱......”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 손을 뻗어 눈을 맞았다. 온 몸에 차근 차근 떨어지는 눈송이의 감각이 생생했다.

12년 전의 오늘이 생각났다.

이 감각에 놀라며, 또. 광활히 펼쳐져 있는 드넓은 설원에 감탄하며 스크린 샷을 얼마나 찍었는지 모른다.

또한, 12년 후.

하얀 눈이 내리는 초토화된 지구의 땅 위에서, 태호는 절규했었다.

모든 것의 시작점. 그리고, 세상의 끝을 알리는 시발점.

그래.

다시 돌아왔다.

태호는 고개를 한껏 젖힌 채 쏟아지는 눈을 마음껏 맞았다.

.

.

.

.

.

.

유저들이 시작할 수 있는 스타팅 지역은 대략 100여 군데가 넘는다. 지금 당장은 교류가 불가하지만, 유저들이 늘어나며 각 지역의 퀘스트가 일정량 이상 클리어되면 지역이 서서히 추가 개방돼 가는 시스템이었다.

즉.

유저들이 한참 유입될 시기인 두 달 15일 전까진, 아마 이 곳에서 사람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태호는 우선, 자신의 스킬창을 띄웠다.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보유 스킬]

[엑티브 : 없음]

[패시브 : 에픽 콜렉트]

“......허, 참.”

정말이었다.

전승된 스킬, 에픽 콜렉트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급히 에픽 콜렉트의 정보를 확인했다.

[패시브 : 에픽 콜렉트]

[설명 : 최초로 에픽 아이템을 획득한 플레이어가 전직할 수 있는 히든피스 ‘에픽 콜렉터’ 의 패시브 스킬]

[에픽 아이템의 콜렉션이 늘어날 때 마다 추가 효과를 얻습니다.]

[3개 - 추가 대미지 30%]

[6개 - 추가 대미지 50%]

[9개 - 추가 대미지 100%]

[추가 개방 - ???]

과거, 태호는 리얼 포스 역사상 첫 에픽 아이템을 획득한 바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엔 천운이 따랐다.

설산에서 멋도 모르고 사냥을 하려다, 설인 무리에게 쫒겨 도망치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절벽으로 발을 잘못 디딘 태호가 마치 무협 소설에서처럼 동굴에 안착해, 기연을 얻은 것이다.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그 뒤로 에픽콜렉터라는 직업을 얻고, 에픽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새삼 느낀 점이었다. 첫 에픽 아이템을 얻은 것은, 그야말로 순전히 운빨이었다는 것을.

어디보자.

우선, 태호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목재로 만들어진 마을과 바깥의 경계 울타리 안,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가며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NPC.

NPC들에게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때론 히든 피스의 단서를 흘린다던가, 다양한 퀘스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알바롱 마을은 기본적으로 ‘초심자 마을’ 이라는 컨셉에 충실하다. 대략 50명 정도의 NPC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크기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여섯 개의 민가와 경매장 하나, 조촐한 편이다. 건물 양식은 중세 서양식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예나 지금이나 전체적으로 조용한 마을이었다.

태호는 우선 자신의 상황을 체크했다.

[아이디 : 카이저]

[레벨 : 1]

[직업 : 무직]

[성향 : 중립][속성 : 무속성]

[생명력 : 100][마력 : 100]

[공격력 : 1][마법 공격력 : 1]

[방어력 : 1][마법 방어력:1]

[스텟 : 힘1, 민첩1, 체력1, 지능1]

[특이사항 : 없음.]

[*위업- 최후의 생존자]

단촐한 1의 향연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계승이라는 건, 정말로 스킬 뿐인 모양인데.’

계승 시스템은 그 동안 리얼 포스엔 존재하지 않았다. 태호의 머리가 조금 더 복잡해졌다.

‘게임사 측에서 개입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어폐가 있다.

과거, 리얼 포스의 운영 시스템에서 캐릭터 자체에 특혜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운영자를 본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간혹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치 천사의 형상을 한 빛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곤 사라져 버렸다던가.

아니.

게임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게임이라고 생각하기엔, 불가사의하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좌우로 흔들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 * *

인벤토리 창에는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장비들이 존재한다.

방한용 가죽 갑옷 상, 하의. 그리고 무딘 철검이라는 장비 하나였다.

옵션은 기본적으로 제공해 주는 장비이니만큼 기대 할 가치조차 없다. 공격력 1, 그리고 방어력 1씩을 자랑하는 허술한 장비들이었다.

다만, 방한용이기에 추위에는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본래 성 내에는 각종 직업 NPC들이 존재한다.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적 등을 비롯한 소위 ‘기본 직업’ 들이다.

리얼 포스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직업들이며, 각각 뛰어난 밸런스를 자랑했다.

딱히 히든 피스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강력함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히든 피스로 얻을 수 있는 직업 중 대부분은 그저 특이한 설정이나 능력을 사용할 뿐, 효율적이지 못 한 경우도 많다.

실제로 과거 리얼 포스의 상위 랭커들 중엔 기본 직업의 파생 전직군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많은 이들이 한다면, 그만큼 무수히 많은 공략과 효율적인 육성법이 존재한다는 것. 가장 큰 것은, 뭐니뭐니해도 일단 기본빵은 한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튼. 기본 직업도 괜찮다.

때문에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태호였다.

이제는 길을 흑마법사로 정한 뒤, 오픈 하자마자 접속했는데 전승이라는 기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에픽 콜렉트란 스킬을 전승받았으니까.’

에픽 아이템을 수집했을 때의 ‘추가 대미지’. 그 덕에 어쩐지 훨씬 더 그 선택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아니지.’

이건, 고려했던 그 어떤 변수에도 없던 특급 혜택이었다.

흑마법사의 기본 딜링 시스템이 장시간에 걸쳐 적은 대미지를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잘한 대미지들이 추가 대미지를 받아 뻥튀기 된다면?

생각했던 대미지보다 두 배의 대미지를 기대할 수 있다.

시작이 좋았다.

태호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양 손목을 까닥여 보고, 손가락 하나 하나의 감각 역시 체크했다. 원하는대로 약간의 딜레이도 없이 움직여 주는 캐릭터가 묘하게 익숙했다.

조금 더, 이 세상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각 초보 마을의 NPC들은 기계처럼 움직이나, 더 너른 땅으로 나섰을 때의 NPC들은 가끔은 유저인지 NPC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양한 의사소통을 한다.

그 중엔 리얼포스가 현실로 튀어나왔을 때에도 유저 측과 합심하여 싸워 준 이들도 있을 정도다.

비밀.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리얼 포스. 그토록 통달해 있다고 자부하던 태호조차 알지 못하는 어둠속 깊숙한 비밀.

태호는, 이 게임을 다시 플레이해 나가며 그 비밀을 점차 풀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했다.

* * *

알바롱의 북쪽으로는 한없이 펼쳐진 끝없는 설산이 있었다.

눈 덮인 설산 위를 날카로운 나뭇잎을 가진 나무들이 빼곡이 덮고 있었다. 거대한 침엽수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폭설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설산의 경사는 그리 높지 않으나, 사방에 포진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초보자들에겐 난이도 높은 상대였다.

쌔애애애앵-

칼바람이 불었다. 가상현실의 체감이라지만, 뇌에서 일으키는 착각은 제법 리얼한 편이다.

조심 조심 놈들의 이목을 피하며 산을 오르던 태호는 사방에 드문 드문 솟아 있는 허리춤만 한 길이의 식물들에게 다가섰다.

식물에는 저마다 빨간 색 열매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을 최대한 따 인벤토리 창에 집어 넣었다.

[따끈 열매를 획득하였습니다.]

따끈 열매.

작명 센스가 돋보이는 아이템이다. 태호는 따끈 열매를 양껏 모은 뒤, 해가 지는 것을 확인했다.

해가 지면 온도는 영하로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 유저건 몬스터건 저마다의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가장 먼저.

-상태이상, 혹한의 추위가 가해집니다.

라는 메시지와 함께 움직임이 현저히 둔해진다. 물론 상황은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밤이 되어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게 되면, 몬스터들의 움직임 역시 느려지고 감지능력이 떨어진다.

태호는 눈더미 사이에 숨어, 사방을 살폈다.

[Lv. 1]

[설인]

설인은 1레벨 몬스터로서, 공격력은 약한 편이지만 무지막지한 맷집을 가진 몬스터다. 생김새는 큼직한 성인 남성과 비슷한데, 온 몸이 하얀 털로 뒤덮혀 두 눈만 시뻘겋게 반짝이는 녀석이었다.

특징은, 단합력이 좋다. 잘못 건드리면 떼거지로 우루루 몰려와 얻어 맞다 죽기 딱 좋다.

그래 봐야 1레벨 몬스터인지라 조금만 레벨링을 한다면 쉽게 공략이 가능할 테지만- 무직으로는 상대할 생각이 없다.

태호는 숨죽인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기다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반짝!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고 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올랐다. 그 별무리 가운데, 유독 큼직하게 빛나는 별이 보였다.

‘북극성.’

북극성을 빤히 쳐다보던 태호는 기억을 되새겼다.

‘북극성이 오후 9시 쯤만 되면 특정 방향으로 떨어졌었지.’

과거의 태호는 그 북극성이 떨어지는 곳을 며칠째 반복하여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가다 설인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첫 기연을 얻게된다.

바로, 에픽 콜렉터라는 직업을 선사해 줄 첫 번째 에픽 아이템과의 만남이었다.

꿀꺽

자.

과연, 기억이 맞을까?

숨죽인 채 기다리기를 30여 분. 한 시도 놓치지 않으며 하늘에 시선을 집중하던 태호의 두 눈이 확신을 띄었다.

피유웅-

마치 미약한 폭죽음을 내며, 하늘에 떠 있던 북극성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그것은 별똥별처럼 잔상을 남기며 저 편으로 멀어져 갔다.

태호는 그제야 일어섰다. 그리고 모아 두었던 따끈 열매 두 개를 입에 넣고 까득, 씹었다.

알싸한 맛이 스쳐 지나가며 온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상태이상! 따끈따끈!

: 혹한의 추위가 일시적으로 면역됩니다.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히든피스는 무난하게 얻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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