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원 수호자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장사꾼들은 무의미한 시간 투자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근래의 가상현실 게임의 유저중 일부는 이미 ‘플레이’ 의 범주를 넘어서, 직업의 색채를 띄고 있었다. 강민이 가진 자신의 ‘팀’ 은 게임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요즘에는 그런 식의 팀이 제법 많았다.
놈의 말처럼 리얼 포스는 향후 대박이 난다. 그냥 대박이 아니고, 가상현실계를 뒤흔드는 초대박이다. 솔직히 말 하자면 놈의 안목에 조금 놀랐다.
“열심히 해 보시라고, 미래의 랭커 양반.”
강민은 낄낄거리며 태호에게 검지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태호는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은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 젖 대신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을 것이다. 약간은 과도한 리액션도, 저 특유의 말투도. 실은 어쩌면 계산 속에 있는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 않다.
그는 과거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유저였다. 향후 리얼포스의 경제조차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 넣을 테니까.
경매장의 잡템들을 모조리 사재끼고 있는 것이 바로 저 녀석이란 걸 아니, 기분이 묘해졌다.
“퀘스트 재료를 죄다 사재기하고 있더군? 동료가 많아?”
“얼마 전에 바람의왕국을 정리했거든. 돈과 시간은 많고, 애들은 놀고 있으니까.”
“그럼 내 장비들도 좀 사 주든가.”
“반복퀘 보상이지? 현금? 골드?”
태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골드.”
“단검 하나에 1골드. 방한복도 세트로 1골드. 그 이상은 안 돼.”
태호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씩 붙여서 되팔 건데?”
“두세 달 쯤 뒤에. 지금은 골드랑 아이템 사기만 할 거야. 되팔 가격은 알아서 뭘 하려고?”
“이거 순 사기꾼이네.”
태호는 자연스럽게 그와 말을 섞어 나갔다. 어쩐지 마음이 퍽 안심이 됐다. 그와 대화하는건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태호에게 에픽 아이템을 세 개나 판매한 전력이 있었다.
강민이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사기 아닌 사기를 치는 게 장사꾼이니까. 난 그 말이 좋아, 익숙하거든.”
“단검, 방한복 개당 3골에 사가라.”
태호의 말에 강민이 가운뎃 손가락을 내밀었다.
“엿이나 드셔.”
“어차피 4골드까지는 예상 범위 안에 있을 거 아냐. 경매 수수료 떼고 별 손해도 아니겠지.”
“흠.”
어차피 미래에 판매할 아이템들이었다.
아마, 리얼 포스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면 저 기본 무기인 단검과 방한복은 개당 5골드에도 팔릴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의해서다.
골드대 현금의 시세는, 미래의 시세가 지금보다 훨씬 비싸진다. 즉, 지금은 그냥 마진이 남는다면 모조리 쓸어 담으며 사재끼는게 관건이었다.
강민은, 빤히 태호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본 놈이지만 의외로 마음에 드는걸.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 바람의왕국 랭커였어?”
기묘한 기분이었다. 강민은 태호라는 낯선 유저에게서 어쩐지 친근함을 느낀 것이다.
“아니. 그건 알아서 뭐 하시려고?”
태호가 강민의 말투를 따라하자, 강민은 실눈을 떴다.
“당돌하군. 싫지 않은 성격이야.”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랭커에게 투자하는 셈 치지. 다 줘.”
* * *
태호는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가상현실 고글을 벗고, 가만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삐걱, 삐걱, 소리가 나는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가만히 누워 게임만 즐긴 지 벌써 18시간이나 지나 버렸다.
1일 접속시간 한도 초과로 접속종료라는 시스템이 발동되기 전, 자발적으로 종료한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분명한 도움이 된다.
건강은 언제나 최우선이 되어야 했다.
몸을 가볍게 풀어 본다. 스텟의 보너스가 적극 반영된 가상현실 게임에서 일체감 100%의 플레이를 즐겼다.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 태호는 두둑 두둑 한참 동안이나 스트레칭을 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요리를 해 볼까.
파를 썰고, 묵은 된장과 두부를 넣어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 냈다.
“......”
과거에는 한 때, 리얼 포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라면만으로 끼니를 때우다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라면 역시 당연히 주식 중 하나가 되겠지만 일 주일 중 두어 번은 요리를 해 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허술하지만 먹을 만 한 된장찌개와 갓 지은 밥을 식탁 위에 차려놓아 식사를 해결했다.
첫 날.
첫 날의 성과는 제법 의미가 있었다. 솔직히, 강 민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반갑기도 했다. 새삼,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태호는 좁은 방에 오도카니 앉아, 가만히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 보았다.
돈!
돈이 없으니 필연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과거의 태호는 돈을 어느 정도 벌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돈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태호의 기준에서 80%는 됐다. 돈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고, 그 세상에는 좋은 것과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일정 기준 이상의 돈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닌, 정신적 풍요와 삶의 변화를 야기한다.
‘우선은 현실의 돈을 버는 것도 겸해야 해.’
강민에게 판매한 아이템은 총 16개다. 단검 8개, 방한복 세트 8개. 단검 두 개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놔두고, 방한복 세트 두 벌 역시 마찬가지다.
향후 가격들이 오르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나, 당장 효율적 장비를 구매해 앞으로의 컨텐츠들을 선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거래한 골드는 총 48골드. 재산은 총 52골드였다.
이 골드를 현금화 하는 것 보단 재투자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딱 한 달.
한 달 정도만 근근히 버티며 살아 보자.
막상 회귀하니 할 것이 꽤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는 삶인지라 열심히 살 의욕도, 또 목표도 확고했다.
날은 어느새 오후로 접어들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으며, 특유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가을 바람이 창문 밖에 아른거렸다. 태호는 자신의 좁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바깥 세상을 만끽했다.
솔솔, 어느새 잠이 왔다. 태호는 자신의 싸구려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푹 눌리며, 전신이 나른하게 푹 퍼져 버렸다. 머리 속으론, 이런 저런 생각이 아른거렸다.
* * *
-네놈이 그 소문 자자한 카이저란 놈이냐?
눈 앞의 사내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놈이었다. 한 손에는 창을 꼬나쥐고, 노란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는 취향 괴상한 놈이었다.
-내 이름은 라간! 한 판 겨루러 서대륙 끝에서 여기까지 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나랑 생사결을 나눠 보자고!
지랄이 풍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찮지만 응해 주기로 했다.
놈과는 몇 날 며칠을 겨루었다. 태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때론 분함에 가득 차 돌아갔으며, 때론 감탄하며 오늘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를 무렵.
마지막 전투에서 태호가 승리했을 때 그가 말했다.
-야!
-왜.
-내 형님이 돼라.
-......?
웃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형님이 싫으면, 내 대장이 돼라!
태호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이번엔 이렇게 소리쳤다.
-그것도 싫으면! 동료가 돼 주라! 까짓 거 함 해 주라!
그런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될 라간과 동료가 된 날이었다.
.
.
.
.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호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익숙한 천장.
그리고, 익숙한 전신의 감각. 통증은 없고, 세상은 고요한 어둠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후-”
다행이다.
회귀를 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잠들었다 깨어날 땐 항상 두려웠다.
짝!
태호는 자신의 양 뺨을 찰싹 찰싹 때렸다. 여섯 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8시의 한가로운 저녁이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샤아악!
가상현실의 감각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태호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하얀 빛이 가득한 설원!
그 곳이 다시 한눈에 들어왔다. 태호는 가만히 서서 일체감을 재확인했다. 전신이 전달하는 감각에 귀를 기울이고, 여전히 100%의 느낌을 재확인했다.
태호는 저 편을 쳐다보았다.
쿵-
쿵-
쿵-
‘기억이 정확해.’
새삼 자신의 기억력에 감탄하며, 정면에 걸어다니는 덩치 큰 몬스터들을 떠올렸다.
[Lv. 30]
[정예]
[설원 수호자]
설원 수호자들은, 알바롱 남부에 위치한 얼음호수를 수호하는 존재들이다.
레벨은 30, 정예. 정예란, 보통의 몬스터보다 체력이 월등히 높고 방어력이나 공격력이 매우 높은 일종의 등급을 뜻했다.
얼음호수의 설원 수호자들은 얼음호수 속의 비밀던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지금이야 비밀일 테지만, 나중에는 초보 유저들의 빠른 레벨업 공략엔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던전 코스로 변모하게 된다.
이 던전은 향후 독일 길드 ‘크로이츠’에 의해 관리되는데, 크로이츠는 이 초보자 던전 입장료로 쏠쏠한 소득을 올린다.
물론.
그건 일단 저 수호자들을 해치우고 나서 생각 해 볼 문제다.
패턴은 대충 알고 있다. 그래서 어제, 태호는 접속 종료하기 전에 놈들에게 상태이상이 걸리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결과는, 성공.
아무래도 정예급이라고 해도 동등한 레벨이라면 상태이상에 패널티는 없는 듯 했다.
태호는 실제로 어제, 몇 마리를 잡아 본 적이 있었다. 한 마리 잡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25분. 레벨이 1 올랐다. 전투 시간이 길기에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에도 충분했으며,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사냥할 수 있으니 일체감 활용이 용이하다.
동등한 레벨의 플레이어가 잡았을 시 폭발적인 경험치를 얻을 수 있으며, 부가적으로 떨어지는 장비들 역시 꽤나 기대가 되는 수준이었다.
가장 큰 장점이란, 저 녀석들을 해치우고 던전을 처음으로 열었을 때의 특혜!
결국 다음 레벨링 코스는 이 곳으로 정한 것이다.
우선, 어제 태호는 결국 30레벨을 달성했다.
레벨 30.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그간의 퀘스트가 인근의 잡다한 사건 해결 및 반복 사냥 퀘스트에 불과했다면, 지금부터는 쓸 만 한 장비들을 보상으로 주며 점차 유저들을 초보자 지역에서 벗어나게 유도하기 시작하니까.
‘2차 전직 레벨이 50이었지.’
보통의 레벨링 코스 대로라면, 소위 ‘메인’ 퀘스트라는 줄기를 따라 유저들은 현 위치에서 가까운 대도시들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무수히 많은 히든피스들과 퀘스트, 놀라울 정도로 고등의 의사소통을 하는 NPC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태호는 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당금의 목표는 북대륙 끝에 있으니까.
당장은 마을로 돌아가 퀘스트를 수령할 필요도 딱히 없어 보였다.
태호는 어제 드랍한 장비 하나를 보며 씩 웃었다.
[등급 : 3급]
[종류 : 무기(지팡이)]
[이름 : 은빛 설원의 지팡이]
[옵션 : 마법 공격력 100]
3급 장비다.
한손검, 양손검, 단검, 활 등을 비롯해 기타 등등의 장비가 그렇게 많은데도 지팡이가 단숨에 나왔다.
운이 좋았다.
운.
그러니까, 그 운이라는 것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패시브 스킬로 깃든 ‘행운’ 덕분인 것 같았다.
[패시브 : 행운]
[설명 : 최초로 행운의 여신 티케를 리얼포스 대륙에 강림시켜, 그녀의 권능을 아주 조금 부여받았다.]
[운이 좋아진다.]
설명은 단촐하였으나, 처음으로 잡은 몬스터가 바로 3급 지팡이를 떨구었으니 제법 효과가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