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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줄 생각은 없다.
태양초.
태양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풀. 진작부터 경매장에서 찾아 보았으나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얻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찾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태양초는 태양의 기운이 절정에 달하는 지역에 등장한다. 매일 매일 눈이 내리고, 태양은 오후 늦게 잠깐 비춰 버리는 북반구에서 구할 수 없는 이유다.
태호는 경매장 아이템들을 눈여겨 보았다. 강민은 잡템들을 사 모으고 있었지만, 경매장 가득히 남아 있는 아이템들 중 놓치고 있는 아이템들이 제법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
[등급 : 1급]
[종류 : 재료]
[이름 : 망가진 잡동사니]
[잊혀진 문명의 잔재.]
이는, 3달 뒤 리얼 포스의 정식 서비스가 시작될 때 개시될 첫 확장팩인 ‘잊혀진 왕국’에서 사용될 재료 아이템이었다. 사실, 태호의 입장에선 다른 것들은 다 놓쳐도 이것만 챙겨 가면 이득이었다.
이것의 가격은 현재 1실버.
잡화상인조차 사 가지 않는 재료 아이템으로서, 현재는 대륙 동부의 허수아비들이 떨구는 중이다. 즉, 그저 아이템 칸만 차지하는 골칫덩이였다.
잊혀진 왕국.
이는, 리얼포스의 세계관에 맞물리는 스토리였다.
본래 리얼포스의 고대에는 여섯 왕국이 존재했다. 불, 물, 바람, 땅, 빛, 어둠을 다루는 여섯 왕국이. 그런데, 그들과 함께 고대를 살아갔던 잊혀진 왕국에 대한 확장팩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리얼포스의 세계관이 확립되며 하나 둘 정보를 공개하던 시점이 정식 서비스 무렵이기도 했다.
리얼 포스 세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서서히 등장하는 악에 대해 대비해 가는 과정이었다.
두 번째 확장팩 ‘혼돈의 좌’ 에서는 고대에 봉인되었던 혼돈의 별자리가 움직이며 시작된다. 악의 화신인 ‘오렌’ 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주인에게 이 세계를 바치기 위해 거대한 의식을 시행하는 스토리였다.
세 번째 확장팩 ‘드래곤의 유산’ 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타락한 드래곤들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이야기였고, 그 이후로도 대부분 ‘세계관의 확장 -> 악이 등장->해결’ 의 패턴을 따른다.
과거에는, 그 스토리 역시 흥미 깊게 살펴 본 바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충 가늠이 왔다.
지난 확장팩들은, 모두 하나의 결론을 위한 초석들이 아니었을까?
바로, 최종 보스 판타로스 말이다.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판타로스와 얽혀 있을 것이 분명하다. 회귀하여 다시 살게 된 지금, 그 연결고리를 파악하게 된다면 더욱 깊이 있게 이 세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일단, 태호는 망가진 잡동사니를 모조리 구매해 가기 시작했다. 강 민은 이 망가진 잡동사니를 사 모으더라도 소량만 사 모을 것이다.
이유?
리얼 포스에 떨어지는 잡템들 중, 저런 식의 재료 아이템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예를 들면.
[등급 : 1급]
[종류 : 재료]
[이름 : 돌멩이 파편]
[잊혀진 문명의 잔재.]
이런 것이 있다.
전형적인 페이크성 재료 아이템이었다. 남부의 돌 골렘이 떨구는데, 어찌 보면 잊혀진 문명의 잔재가 맞긴 하다. 마도시대에 만들어진 골렘의 잔재니까.
이는 훗날 판타로스가 나타날 때 까지도 쓸모가 없었다. 그 뿐 아니라, 리얼 포스의 잡다한 아이템들은 죄다 하나씩 단서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설명이 적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조리 사 모으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결국, 강민이 사 모으는 것은 적어도 반복퀘용 잡템이 대부분인 것이다. 리스크는 없고, 오를 일만 남았을 테니까.
태호는 여유롭게 망가진 잡동사니를 구매해 나갔다.
이는, 훗날 50배 정도는 뛸 거다. 그쯤 되면 강민이 배가 아파 죽으려 하겠지만, 회귀자를 정보에서 이길 수는 없다.
현재 소지 골드는 310골드. 던전을 그야말로 홀로 초토화 시키며 골드를 파밍했던 결과였다.
장비 아이템은 던전에서 대충 충족했으니, 이중 250골드를 소비해 망가진 잡동사니를 모조리 구매했다. 인벤토리 창에 망가진 잡동사니가 25000개가 쌓이자, 매물이 싹 사라졌다.
허나 곧 매물이 하나 둘 차올랐다. 그것이 갑자기 싹 쓸린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올라오는 매물들의 시세가 급격히 뛰었다. 한 개에 5실버가 넘어갔다.
태호의 인벤토리 창에는 현재, 다양한 장비 아이템들이 있다. 노멀, 레어까지 말이다. 허나 그것들은 지금 절대 팔지 않을 것이다. 향후 가치가 얼마나 뛸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경매장 탭을 닫은 채, 가만히 강 민을 관찰해 보았다.
“......!”
강 민이 이상징후를 깨달았는지 얼굴이 기묘한 빛을 띄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시작하는지, 가만히 앉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사장님. 망가진 잡동사니 싹 사라졌는데요?
-그거 정보 공개됐어?
-아뇨. 팬 사이트도 그렇고 그냥 조용한데요. 일단 그럼 비슷한 설명 붙은거라도 쟁여 놔 볼까요?
-다시 올라오는 매물들이 대부분 5실버에요. 누가 장난질 하는 것 같슴다.
-확인결과 반복퀘나 수집 퀘스트도 없어요.
강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정보가 없음은 누구나 동일하다. 적어도, 그는 50명의 군단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50명의 직원들이 리얼포스의 전 대륙에 퍼져, 정보를 수집하며 레벨링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정보들은, 고스란히 경매 수집으로 이어진다.
허나, 정보가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누가 분탕질을 하거나, 독점 정보를 얻었거나.’
전자에 더 의심이 간다. 경매질을 하다 보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가치 없는 아이템을 모조리 헐값에 사 모은 뒤, 비싸게 판매하는 일 말이다. 훗날 가치가 있다고 해도, 아직 이쪽에는 입수된 정보가 없다.
장사꾼은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 따윈 하지 않는다.
적어도 강 민은, 50명의 식솔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입이 50명이 넘으니, 그런 식의 투자는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우리는 수집 포기. 반복퀘 재료 아이템 수집만 한다. 그것만 해도 충분해.
강민이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전했다.
-옛서!
태호는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머리 좀 아플 거다.
한번 싹 쓸었으니, 골드를 계속 모으다 적당한 시점에 다시 한번 매물을 싹 쓸면 된다.
* * *
경매장을 나선 뒤, 인벤토리 창을 뒤적이던 태호는 스크롤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등급 : 4급]
[종류 : 소모품]
[이름 : 이동 스크롤]
[초보자 마을 중 한 곳을 선택하여 이동이 가능합니다.(쿨타임,1시간)]
던전을 클리어하며 떨어진 아이템 중, 제법 희소성 높은 종류의 아이템이었다.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는 스크롤은 가격이 제법 높게 형성돼 있었다. 리얼포스의 대륙이 워낙 넓은 탓이다. 적어도 지금의 태호에게는 아주 유용했다.
이동할 위치는, 대륙 최남단.
시작의 대평야였다.
찌직!
스크롤을 찢자 거대한 월드맵이 떠올랐다. 마치 깨알처럼 여기저기 찍혀 있는 이 포인트들이, 바로 초보자 마을의 포인트들이다.
태호는 그 중, 남쪽 끝자락을 선택했다.
[이동을 시작합니다.]
샤아악!
온 몸에 하얀 빛이 휘감기며, 태호의 몸이 사라졌다.
잠시 후.
태호는 사방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태양!
이 곳에는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올라 있었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태양인지, 정말 새삼 감격스러워 고개를 한껏 젖힌 채 빛을 만끽했다.
이 곳의 온도는 섭씨25°c.
태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여기저기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유저들을 보며 씩 웃었다.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이 곳은 향후에도 가장 인기 있는 스타팅 포인트로서, 아마 지금도 리얼포스 팬사이트에서는 제법 각광받고 있을 것이다.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분명히 산 하나가 있을 것이고-
고개를 들자 저 편, 큼직한 산 하나가 보였다.
저 산을 따라 태양초가 골고루 분포돼 있다. 문제는, 지금. 태양이 정점에 달한 지금만 태양초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2시 10분.
딱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 * *
산 곳곳에 시뻘건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태호는 쪼그리고 앉아, 풀들을 하나 둘 수거해 나갔다.
[등급 : 1급]
[종류 : 소모품]
[이름 : 태양초]
[태양이 가장 잘 내리쬐는 곳에서 자란다는, 열기를 머금은 풀.]
시험 삼아 하나를 먹어 본다.
-상태이상! 태양의 가호!
: 온 몸에 열기가 들어찹니다!
여기에 따끈열매를 하나 먹으면.
-상태이상! 따끈따끈!
: 혹한의 추위가 일시적으로 면역됩니다!
두 개의 효과가 합쳐지면서.
-상태이상! 후끈후끈!
: 온 몸의 열기가 엄청납니다!
한기가 없는 곳에서는 이렇게 된다.
-지나친 열기로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과연, 생명력이 1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찾았다. 태호는 태양초를 싹 수거했다. 그 무렵이었다.
[지역 현상수배범 : 쉬폰 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쉬폰?’
태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왜 쉬폰이 지금?'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태호는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벌써부터 플레이하고 있었나?’
일단 뒤로 미루고.
태호는 그대로 산을 따라 쭉 돌며 태양초를 수집해 나갔다. 시간은 오후 1시까지가 마지노선이었고, 오늘 수거를 마치면 바로 선지자의 해골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슬슬, 흑마법사 특유의 약한 딜링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향후 레벨링이나 선점해 나갈 에픽 아이템들을 위해, 선지자의 해골이 꼭 필요했다.
[태양초를 획득했습니다.]
태양초는 대략 40여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태양초 하나에 기본 10분 지속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30개 정도를 더 모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태양초를 수집하고 있을 때. 여기 저기 유저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평야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호는 사냥에 열중하는 유저들을 보았다.
파티 사냥을 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좋을 때다.’
태호도 한때는 저렇게 진심으로 게임을 즐기던 때가 있었다. 정말로 즐거웠는데, 이제 다시는 저 시절로 돌아가지 못 할 것 같았다.
태호는,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회귀자였으니까.
어쩐지 입맛이 써, 고개를 돌릴 무렵이었다.
푹!
푹푹!
“아이 씨! 쉬폰이다! 님들 쉬폰이에요 튀세......억!”
“......”
태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파티사냥에 열중하던 유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 사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머더러 하나가 보였다.
평범한 커스터마이징, 평범한 체구, 그리고 평범한 무기. 무기의 종류는 한손검과 방패였다. 무자비하게 유저들을 썰어 나가는 그의 머리 위에 아이디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쉬폰]
분명히.
태호는 혀를 찼다. 귀찮게 엮이면 오늘의 수집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었다.
샥! 샤샤샥!
태호는 잽싸게 움직이며 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태양초를 그야말로 싹쓸어가며 움직일 무렵, 저 머더러가 접근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샥! 샥!
‘민첩이 높나?’
태호는 부리나케 움직이면서 지팡이를 뻗었다.
저렇게 빠른 상대에게 스킬을 성공시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태호에게는 지난 경험과 높은 일체감이 있다. 놈이 움직이는 동선을 잘 보며, 예상지점에 미리 스킬을 뿌려 놓는다.
‘절망.’
샥!
놈이 절망을 피한다. 하지만, 피하는 위치 역시 예상범위 안이다.
그 곳에 더 넓은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규모 범위 절망.’
샤아악!
절망의 시커먼 마력이 놈의 전신에 내려앉았다. 놈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이 관측된 그 순간, 태호는 태양초들을 수거하며 몸을 피했다.
샥! 샥! 샥!
절망이 끝나갈 무렵, 태호는 재차 절망을 리필하며 60레벨을 달성하며 새로이 얻은 두 개의 스킬 중 하나를 사용했다.
‘시력상실.’
[기본 흑마법사 스킬]
[등급 : 3급]
[스킬명 : 시력상실][숙련도 : 4]
[쿨타임 : 60초][소모마력 10]
[상대를 시력상실 상태이상에 빠트려, 10초의 시간 동안 시력을 빼앗는다. 같은 대상에게 중복 사용은 불가능하다.]
동일 대상에게 중첩하여 사용이 불가할 뿐, 쿨타임이 돌아오면 재사용이 가능했다.
“......!”
아마, 세상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졌을 거다. 그 틈을 타, 태호는 마지막 태양초까지 수거해 넣었다.
‘이제 다 모았군.’
리얼 포스에는 흔히 막피(마구잡이 pk)를 하는 유저들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pk에도 히든피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머더러들은 pk를 하며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 및 고유의 퀘스트를 얻는다.
마치 유저가 몬스터를 잡아 레벨업 하는것과 비슷하다. 머더러의 입장에서는, 다른 유저가 몬스터로 취급될 뿐이다.
이제, 저 머더러를 볼까.
‘지역 현상수배범이면 어지간히 썰고 다녔나보네.’
현상수배범을 잡으면 포상금과 놈이 가진 경험치의 일부를 획득할 수 있다. 또한, 리얼포스의 머더러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사망 시 아이템의 드랍이었다.
사람을 죽였을 때 생기는 ‘카오’ 수치가 높을수록 소지중 장비가 드랍되는 개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소위 ‘카오 다이’ 라고 하는데, 모든 리얼포스 유저들이 벌벌 떠는 패널티였다.
스팟!
쾅!
놈이 시력상실 상태이상에서 벗어나자마자 태호를 덮쳐 왔다. 태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가 쇄도하는 한손검을 막아냈다. 동시에, 태호는 땅을 차며 두 다리를 뒤쪽으로 쭉 빼냈다.
휙!
놈이 몸을 비틀며 돌려차기를 가해 온 것이다. 돌려차기 이후 이어지는 방패 가격이 태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쾅!
태호는 방패가 가격한 그 방향으로 일부러 몸을 날렸다. 대미지를 최소화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후려쳤다.
깡!
놈이 방패를 수습하며 가볍게 공격을 막아냈다.
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민첩으로 속도를 올린 게 아니군. 일체감이 기본적으로 매우 높고.’
당연하게도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날아드는 한손검을 지팡이의 자루로 막는다. 막는 동시에 살짝 뒤로 빼 내며, 몸을 틀었다. 날아온 힘을 분산시킨 뒤 흘려 버리는 고등 테크닉이다.
몸을 틀며 지팡이를 비튼다. 공격을 흘리고, 한손검이 휘청이는 그 사이 태호의 발재간이 빛을 발했다. 땅을 빙글 돌며 놈의 몸 뒤로 이동한 것이다. 스텟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전투 센스와 노하우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
그대로 등 뒤에서 놈을 힘껏 밀었다
놈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데굴, 낙법을 이용해 몸을 굴리며 벌떡 일어난 놈의 얼굴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주된 클래스는 흑마법사. 적어도, 근접 클래스와 힘 스텟 면에서 동등하게 겨룰 순 없다.
“......!”
태호가 그런 놈에게 절망을 걸었다.
뒤로 물러서자, 놈이 독특한 스탭을 밟으며 좌우로 몸을 흔든다. 어느새, 다시 착 달라붙어 있었다.
‘배틀 스탭.’
WOF를 어느정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는 배틀 스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프로게이머들이 현실에서도 연습한다는 특유의 스탭이었다.
놈의 머리 위로 중독이 내려앉았다.
‘폭사.’
절망이 끝나갈 타이밍에 폭사가 이어졌다. 폭사와 함께 지팡이가 놈의 어깻죽지를 가격했다. 태호는 놈의 다리를 걸어 균형감각을 무너트린 뒤, 콱! 명치를 내리찍었다. 물론, 물리 대미지가 터무니없이 약한 지팡이였다.
동시에 사방에 중독과 절망의 비가 내렸다.
‘중규모 범위 중독, 절망.’
놈의 전신에 중독과 절망이 리필됐다. 몸을 데굴 굴러 잽싸게 일어나 달려오는 놈에게 오히려 파고든다. 어깨를 내밀어 놈의 명치를 한방 가격한 뒤, 재차 스킬을 사용했다.
‘폭사.’
쾅!
‘중독, 절망.’
그리고.
‘시력상실.’
시력상실을 걸어낸 뒤, 놈이 주춤대는 사이 백 스탭을 밟았다.
사각!
풀 밟히는 소리에 반응한 놈이 정확한 궤도로 검을 찔러 들어왔다.
방패 가격의 궤도나, 일체감의 수준이나, 전투의 스킬들이 어쩐지 퍽 익숙했다.
스응!
방패가 날아들고.
휘릭!
한손검이 상상 못 할 궤도에서 기습을 가해 온다. 저 효율적이고 극도로 훈련된 움직임.
태호는 혀를 찼다.
‘검방을 저렇게 쓰는 놈은 우리나라에 윤형석이밖에 없지.’
언젠가 마주쳐야 할 인연이긴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놈은 훗날, 어세신즈라는 PK조직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일각에서는 과거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난 악동이 된 그를 비난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흑마법사는 현재 직업중엔 최약체로 분류될 정도로 약한 편이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코어 아이템들(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아이템)을 갖추기 전까지는 과거의 명성대로 '애매한' 직업을 벗어나지 못 하는것이 흑마법사의 숙명이리라.
PK에 특화된 쉬폰의 '휴먼 어세신' 에 비하면, 지금 당장 대인전에 턱없이 약한 것이 현실.
허나 지금의 태호는 과거의 태호가 아니다. 이미 쉬폰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 본 태호였다.
아무리 흑마법사라 한들, 절대 지지 않는다.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이 시기의 윤형석은 WOF에 한창 회의감을 느낀 채 무기력함의 절정을 달릴 무렵이겠지.
뭐.
어떻게 됐든 봐 줄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