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5화 (1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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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죽더라도

까득!

태호는 따끈열매와 태양초를 씹으며 인벤토리의 수량을 확인했다.

‘대충 열 개 정도씩 남았나.’

접속종료 이후 푹 쉰 다음, 이틑날까지 얼음대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략 10시간 정도를 꼬박 투자한 셈이었다. 사실, 이 얼음대지는 사람이 딱 정신병 걸리기 좋은 지형이었다.

아무 것도 없다!

온 세상은 그저 하얗고, 투명한 얼음 뿐이었다.

눈보라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가시범위가 채 2미터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가운데, 태호는 팔짱을 꼈다.

챠라라락-

저 편.

가시거리가 닿지 않는 멀리에서부터 기괴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빙하 지룡들이 움직이는 특유의 비늘소리였다. 시야에서 벗어난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태호에게는 정신적 대미지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저것들이 현실에서 활보하던 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

그 때는 정말로 지옥이었다.

리얼포스가 현실로 튀어나오던 날, 세상에는 함박눈이 내렸다. 제야의 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세상은 지옥으로 바뀌었다.

상상해 보라.

한강과 바다는 얼어붙었고, 세상엔 짙은 안개와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하나 둘 등장하는데 그림자 만을 보았는데도 미쳐버리는 인간들이 부지기수였다.

솔직히.

태호도 두려웠다. 미쳐 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으.’

이내 태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빌어먹을 상황을 다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얼추 맞게 오고 있었군.’

저 편.

삐죽뾰족한 기하학적인 형태가 차츰 그림자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안개 사이 드러난 건축물은 그 자체로도 섬뜩하고 괴상쩍은 형태를 띄고 있었다.

‘체크.’

맞게 도착한 것 같았다. 팀 니힐럼이 사전에 공개했던 정보에 의하면, 이 안에 리치가 있다.

그의 봉인은 허술할 정도로 보안이 미비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리치에게 접근한다면, 리치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준다.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면, 리치는 일시적으로 부활해 유저를 공격해 올 것이다.

태호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혹한의 바람과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내부의 공기는 탁했다. 마치, 아주 오래 된 고서관 같았다. 모든 것이 착 가라앉고 침적되어 있었다. 형이상학적 문양이 온 사방에 가득 그려져 있었고, 그 안 저 편.

큼직한 왕좌에 한 해골이 고급스러운 옷을 갖추어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불사왕 쿤!

영생을 얻고자 타락하여, 리치가 된 고대의 왕!

그는 이미 해골이 되었다.

태호는 저벅 저벅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숨죽인 채 그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끼릭- 끼리릭-

어느 순간.

그의 두 눈에 시퍼런 안광이 들어찼다. 마치 눈동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그 안광이 태호를 바라보았다.

끼기긱-

해골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달그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인간인가.]

“......”

[큭, 큭큭큭. 인간은 실로 오랜만이로군.]

목소리는 머릿속을 울리는 것처럼 메아리쳤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내게 무슨 일이지?]

태호는 니힐럼의 정보를 곱씹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해골이 말했다.

[나의 이름은 쿤. 영생을 꿈꾸었으나, 잘못된 길을 찾았기에 영겁의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지.]

해골의 목소리는 음울했다. 그의 감정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왜 이 곳에 봉인된 겁니까?”

니힐럼이 했던 질문은 이러했다. 이 질문에, 리치는 ‘멍청한 고대의 존재들은 이 나의 힘을 시기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며, 자신과의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 후로, 유저는 리치와 계약 조건에 대한 조율을 해야 했다. 조율에 실패한다면, 리치가 일시적으로 깨어나 유저와의 전투가 시작된다.

태호는 질문을 던진 뒤 그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선했던 힘은 타락하였고, 나의 백성들은 혼돈에 침식되었지.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스스로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에 자신을 봉인시킨 것이다.]

“......?”

리치의 말이 이상했다.

태호는 드물게 당황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머리를 굴리던 그가, 침착함을 유지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스스로를 봉인하였다......?”

[나는 잘못된 존재와 계약을 했다.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영겁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내야 했지.]

계약.

태호의 눈이 번뜩였다.

“누구와 계약을 한 겁니까. 당신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죠?”

[그는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언젠가는 다시 깨어날 존재이네. 그 존재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 인간 따위가 갖기에는 금단의 지식이다.]

“......”

태호는 혼란스러웠다. 생각한 것과 다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자. 나를 찾아온 이유를 말하도록 하라.]

그의 목소리는 기괴하였으나, 기묘하게도 그가 악한 성향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친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태호는 생각했다.

이럴 때, 어떻게 말 해야 할까. 과연 이 리치라는 자는, 몬스터가 맞긴 한 걸까? AI가 설정된 몬스터가?

리얼포스의 NPC들은 때론, 인간처럼 고등 의사소통을 한다. 실제로 리얼포스가 현실로 튀어나왔을 때, 그들은 자체적 의사결정을 하며 인간의 편에 서 싸우기도 했다.

태호는 정면의 리치도, 어쩌면 그런 종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세계가 단순한 게임이 아님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때론.

정면 돌파가 답이다.

“선지자의 해골을 얻기 위해 왔습니다.”

[호오.]

리치의 안광이 시뻘건 색으로 변했다. 그는, 킥킥대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왜지?]

“강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10년 뒤, 이 대륙에 위기가 올 겁니다.”

[위기라 함은?]

태호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판타로스라는 존재가 오랜 잠에서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죽습니다.”

[......!]

리치의 두 안광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명백히,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저는 그것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힘이 필요합니다. 동료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죠.”

리치는 한참 동안이나 턱을 움직이며 딱딱딱 소리를 냈다. 이내, 그가 태호에게 손을 뻗었다.

화아아악!

어느새.

사방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어느순간 태호는 거대한 영화의 한 장면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긴 흑발을 흩날리며 고풍스러운 로브를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사내는, 정면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내게 영생을! 무한한 힘을!

태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자신의 시야가 공유했다.

‘......!’

그 곳에, 안개에 뒤덮힌 채 그림자만이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까마득하게 큰 빌딩과 맞먹는 크기의 그림자. 전신에서 촉수를 일렁거리며, 섬뜩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존재였다.

‘판타로스......!’

[무엇을...... 바치겠느냐.]

판타로스의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초음파 같기도 하고, 소음 같기도 했다. 허나 의사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금은 보화와 우리 왕국의 비전 마법서를 바치겠소!’

[너의...... 보물을...... 바쳐라.]

‘바치겠소!’

[네 보물을...... 바치겠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렇다면 좋다. 네게...... 영생과 힘을 허락하마.]

그 순간.

사내의 온 몸이 기괴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장면이 변하고 거대한 왕국이 나타났다. 왕국은 평화롭고, 따스했다. 하지만 일순간 급변해 갔다.

사람들은 흉측한 마물로 변하고, 태양은 녹색으로 변했다. 하나 둘 괴물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해친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안돼! 나의 백성들은 안 돼!’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너의...... 보물을...... 받았다.]

판타로스가 말했다. 남자가 포효했다.

‘나의 보물은 이것들이었소! 이 금은보화와 왕국의 비전 마법서 말이요! 인간 세계에서 천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것들 말이오!’

판타로스는 비웃듯 말했다.

[너는...... 그것들을...... 보물이라...... 생각지 않는다. 저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을...... 그 보다...... 높게 생각하니까.]

놈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약속대로...... 보물을...... 받았다.]

팟!

판타로스가 사라졌다.

사내는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백성들을 희생시켜 힘을 얻은 들...... 무엇에 쓴단 말인가! 나는 그저...... 그저......’

쌔애애애앵-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장면이 바뀌고, 그가 무릎꿇고 있던 곳은 거대한 얼음지대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 홀로 남아 있었다.

스팟!

“헉.”

태호는 그 회상이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눈을 부릅뜨고 리치를 본다.

“당신...... 판타로스와 계약을 했군.”

[그렇다.]

끼기긱-

리치가 몸을 일으켰다.

[판타로스는 약속대로 영생과 힘을 주었다.]

“......무슨 힘 말이지?”

[인간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나의 왕국 비전의 마법을 대성할 수 있었지.]

리치의 목소리는 어쩐지 서글펐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태호가 알고 있었던 과거의 리치와는 달랐다. 과거의 리치는, 충실한 악의 대행자였다. 놈은 계약조건으로 목숨을 요구했으며, 피의 대가를 갈구했다.

그저, 살아 있는 악 그 자체였다.

‘가만.’

태호는 생각했다.

‘니힐럼이 리치를 잡은 게 언제지?’

리얼포스가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고 대략 2년 뒤. ‘혼돈의 좌’ 에서다.

악의 화신인 오렌이 깨어나, 자신의 주인에게 이 세계를 바치기 위해 거대한 의식을 행하는 스토리.

그 쯤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리치는 어쩌면 ‘혼돈의 좌’ 의 영향으로 타락해 버린 게 아니었을까? 지금의 리치와는 정 반대의 성향으로 타락하여, 결국 유저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건 아니었을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리치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와의 계약으로 인 해 더 이상 혼돈의 힘에는 대항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리치는 이번엔 태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너는, 그와 맞설 수 있겠는가? 네 생각은 오만일 것이다. 그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고 기괴하도다. 일개 인간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태호는 그의 말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판타로스는 너무나도 강하고 기괴했다. 놈의 손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고, 세계는 멸망했다. 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태호는 어찌 된 영문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 점에서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다시 죽더라도, 최선을 다 해 놈과 맞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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