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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에서 생긴 일
잉카.
불길한 저주의 마을.
과거, 이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에픽 아이템은 바로 ‘저주의 서’ 다. 효과는 상대의 방어력 및 마법방어를 50% 깎는 사기급 아이템이지만, 태호에게 크게 필요하진 않다.
태호에게는 현재 상시 방어 마법방어 무시 효과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서 자체는 필요하다.
신비의 니바 숲의 은거기인에게 에픽 스킬북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정보를 일찌감치 알고 있는 태호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잉카의 설정은 심플했다.
잉카는 저주받았다.
과거, 유저들이 잉카를 발견했을 때엔 이미 마을이 저주받아 구울과 좀비들로 가득 찬 오픈필드 사냥터로 변해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때 잉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리얼포스의 세계는 굉장히 넓고, 그것 말고도 조사할 것들은 이미 지천에 널려 있었다.
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하는 정보는 잉카의 마을 중심부에 숨겨져 있던 에픽 마법서 뿐이다.
대륙 중부, 앱쉴론 산맥.
끝없이 펼쳐져 대륙 중앙을 세로로 쭉 가로지르는 이 산맥 중, 가장 큰 저 멀리의 산이 바로 미하 마운틴이다.
미하 마운틴은 해발 8820미터이며, 오르다 보면 자연히 스태미너가 부족해진다. 정상에 근접해서는 매 초 마다 생명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고도에 맞는 패널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쪽은 유저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사랑받는 스타팅 지역이었다.
이유는 산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는 약초나 열매 등 때문이었다.
태호가 스타팅지역에 도달하자, 사방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유저들이 보였다.
여기 저기 약초와 열매들을 열심히 따 모으는 그들을 보며 태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훗날 이 곳은 중국인들의 작업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아마 그건 산맥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중국 길드 ‘판다’ 였기 때문일 거다.
산 곳곳에는 다양한 레벨대의 몬스터들이 분포하고 있다. 유저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태호가 걸음을 옮겼다.
* * *
세 개의 산맥을 넘고, 굽이진 비탈길을 오른다. 사방에 울창한 나무들이 시야를 잔뜩 가려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방의 시야가 탁 트였다.
절벽이다.
태호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저 아래.
제법 큰 마을 하나가 보였다. 산중에 위치해 있지만, 제법 인구가 많아 보였다.
저 곳이 잉카인가?
마을의 뒤로 거대한 미하 마운틴으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잉카가 맞는 것 같았다.
헌데.
‘유저?’
마을에 제법 사람들이 보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접근해 들어갔다. 경사 80도 가까이 되는 비탈길에 몸을 싣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 결국엔 데굴데굴 굴러 어찌됐든 안전하게 마을 초입으로 내려왔다.
“......”
그리고 재차 고개를 갸우뚱.
‘여기가 정말 저주받은 마을이 맞아?’
태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온함 가득한 시골의 한가진 마을이었다. 태호는 천천히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사물도, 풍경도 어색한 것 없는 평범한 그냥 마을이었다.
유저들로 보였던 이들은 NPC들이었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마을을 쓱 한바퀴 돌아 보았다.
그제야 이상한 것이 보였다.
‘기괴하군.’
사람들은 밝게 웃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야위었다.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두 눈 밑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태호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이 지형에는 각종 나무열매가 충분히 자란다. 또한 산짐승들이 제법 많아, 마을에는 울타리와 입구 잠금장치 등 대비를 해 두었다.
즉, 단백질도 충분히 섭취가 가능하다.
게다가 마을 안에 작은 논밭들도 제법 있었다. 곡식의 수확 역시 자체수급 정도는 된다는 말이었다.
‘왜들 저렇게 마르고 피곤해 보이지?’
그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태호는 다시 퀘스트를 확인했다.
[퀘스트]
[: 저주의 마을 잉카의 집, 촌장 방문.]
태호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추론상 이 곳이 촌장의 집이었다.
몇 번의 노크 끝에, 문이 열렸다. 그 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채, 피골이 상접한 한 노인이 있었다.
“자넨 누구인고? 보아 하니, 이 곳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가래가 끓는 목소리에, 태호가 대답했다.
“모험가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그런가? 우리 마을에 외지인이 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요즘은 반가운 손님들이 제법 있구만 그래.”
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시게.”
* * *
촌장이 대접한 차 한 잔을 받은 태호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촌장은 태호에게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태호의 말에 촌장이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네. 요즘은 기력이 쇠했는지, 자주 이런다네. 나이를 먹는가보지.”
태호는 빤히 그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오다가다 보니, 다들 안색이 안 좋고 깡말랐던데요.”
“흐음......”
촌장은 가만히 앉아,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없네.”
“......?”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정말로 없어. 우리 마을은 언제나처럼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네. 허나 일 주일 쯤 전부터, 잠을 자도 악몽에 시달리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촌장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우리도 어리둥절 할 따름이라네.”
태호는 가만히 생각했다. 촌장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던 와중, 이상한 부분을 떠올렸다.
-우리 마을에 외지인이 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요즘은 반가운 손님들이 제법 있구만 그래.
“혹시 이 곳에 머무는 모험가 파티가 있습니까?”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모험가인지는 모르겠으나, 외지인들이 일 주일 조금 더 전부터, 이 곳의 여관에 머물고 있지.”
[5급 퀘스트]
[서브 퀘스트]
[불길한 저주의 마을]
[:불길한 저주의 마을, 잉카의 저주 풀기.]
[보상 : ???]
이어 떠오른 퀘스트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촌장의 집을 나서, 태호는 여관을 찾았다.
여관은 마을 입구 쪽에 위치해 있었고, 민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은 여관이었다.
그 순간 든 의문.
‘잠깐만.’
그렇다면, 지금 이 퀘스트는 또 다른 퀘스트와 반대되는 퀘스트란 말인가?
‘누군가가 진행 중인 퀘스트를 방해하는 것이, 지금 이 퀘스트의 조건이란 말인데.’
이런 것은 그 동안엔 없었던 시스템이었다.
우선, 태호는 마을의 의복상점에서 마을의 전통 의복을 구매했다. 느낌이 쎄한 것이, 분명히 유저들이 안 좋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유저로 보이면 견제를 당할 지도 모른다. 속셈을 알기 전 까진 숨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전통 의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태호는 이제 누가 봐도 이름모를 마을의 NPC 정도로 보였다.
그대로 천천히 여관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았다.
손님이 없는지 여관 주인만이 테이블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호는 방 하나를 잡은 뒤 손님들의 행방을 물었다.
“그 외지인들을 물어보시는거라면, 해가 진 뒤에야 나와서 산 쪽으로 향하시던걸요.”
해가 진 뒤라.
태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생각했다.
'여관에서 묵는다고 했으니, 로그아웃을 이 쪽에서 했나 보군.'
태호 역시 시간을 조금 때워 볼까 했지만, 그보다는 산 쪽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 * *
미하 마운틴.
미하 마운틴은 기본적으로 그 자체가 거대한 던전같은 역할을 했다. 산을 오를 때 마다 다양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데, 레벨구간이 1~150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모험가 파티는 아직 접속을 하지 않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사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호는 데스나이트를 소환했다.
데스나이트는 기지개를 쭉 펴며 목을 두드렸다.
[여긴 어디냐?]
“미하 마운틴.”
데스나이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산꼭대기 부근에 닿았다.
[저 곳에서 동료의 냄새가 난다.]
“코가 예리하구나.”
태호가 가볍게 받으며 데스나이트에게 새 장비를 건네주었다.
이번, 쉬폰이 죽으며 떨군 ‘스산한 혈흔의 한손검’ 그리고 ‘스산한 혈흔의 한손방패’ 였다.
“새 장비야. 이걸로 갈아 끼워.”
[오! 고맙다.]
데스나이트는 금세 싱글벙글해져 자신의 새 장비를 받아들었다. 태호는 데스나이트에게 스킬북도 하나 건넸다.
녀석이 스킬북을 찢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가 스킬 ‘도발’을 배웠습니다.]
통하는군.
꽤나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사냥이라도 해 볼까 하던 그 무렵이었다.
[헌데......]
문득.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법 기괴한 기운이 느껴진다.]
데스나이트가 입을 연 것이다.
“응?”
[네게는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혼돈의 힘에 의해 저주를 받은 몸. 그래서인지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이 기운은 꽤나 익숙한데......]
그가 덧붙였다.
[혼돈의 힘이다.]
“......”
혼돈의 힘이라고?
태호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어느 쪽에?”
데스나이트는 잠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다. 온 사방에서 비슷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아직은 미약한 편이다.]
태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모험가들.’
마을에 머물기 시작했다던 모험가들. 그들이 뭘 진행하는 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퀘스트일 것이다.
그 퀘스트가 혼돈의 힘과 관련된 퀘스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본다.
‘판타로스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어. 어떻게 그런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거지?’
그런 태호에게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내가 마주했던 판타로스는 본체가 아니었다.]
“본체가 아니었다고?”
[그렇다. 놈의 본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지. 그리고, 놈의 사념 같은 것들이 지상을 맴돌며 인간들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타락이라.
“어떤 식으로?”
[주로...... 계약이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고, 자신과의 종속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직접 전투를 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던 것 같다.]
“......”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우리의 왕국에도 계약자들이 제법 등장했었다. 허나 그 계약 자체에는 제약이 있었다.]
“제약이라면?”
[예를 들어, 힘을 원한다고 해 보자고.]
데스나이트가 태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판타로스는 계약의 대가를 받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이 가진 역량의 한계치까지의 힘을 계약하기 전 보다 쉽게 이룰 수 있게 되지.]
역량의 한계치까지의 힘.
즉, 놈과 계약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천하제일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 외에, 만약에 재화를 원한다고 치자. 그럼 평소보다 더 재화를 모으기 쉬운 상황들이 온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역량 이상은 갖지 못 해.]
“즉, 놈은 계약자가 가진 역량의 한계치까지 성장하는 것을 용이하게 도와준다는 거냐?”
[뭐 비슷 하다. 중요한 것은,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일정 구간마다 성장의 벽이라는 구간이 있다. 용을 써서 넘겨야 할 그 깨달음의 벽이라고 해야 할까?]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놈은 그 벽을 평소보다 쉽게 넘게 해 준다. 사념체의 수준은 이 정도다. 아마, 놈이 잠에서 깨어나 본체와 직접 계약을 한다면 더욱 강력한 계약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지.]
“흠.”
데스나이트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녀석은 혼돈의 힘과 싸워 본 적이 있고, 직접 저주를 받았다.
결국 이 녀석은 불노불사의 저주에 걸렸다. 외형을 잃고, 시커먼 어둠의 형체로만 남게 되었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과거에도 이러한 것들이 있었는가- 에 대한 의문.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라는 대답이었다.
말 그대로 잘 모르겠다.
과거의 리얼포스는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었다. 유저들은 리얼포스의 컨텐츠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세력을 놓고, 또는 던전이나 사냥터를 두고 싸웠다.
괜히 통제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유리한 지역을 점령한 뒤, 그 곳을 지나가는 것에 대해 통제를 건다. 거대 세력은 더더욱 거대해져 가고, 약소 세력은 거대 세력에 굴복했다.
‘어쩌면.’
태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판타로스가 깨어나게 되는 계기 자체가, 또 다른 메인 퀘스트로 존재할 수도 있어.’
합리적이었다.
아니지.
태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생각했다.
‘놈이 깨어나는 건 어차피 10년 뒤. 즉, 리얼포스의 확장팩들은 대부분 판타로스의 수하들이 등장하여 격퇴하는 시나리오였는데.’
판타로스가 실체화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다.
어쩌면 지금은, 놈의 수하들이 깨어나는 과정을 기타 퀘스트 등으로 진행 중일 수도 있었다.
태호는 데스나이트에게 다시 물었다.
“계약 조건으로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데스나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 헌데 보통은...]
그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인간의 목숨과 영혼을 요구하지. 우리 왕국 역시 왕의 계약조건으로 백성들의 목숨을 가져갔다. 그들의 영혼은 판타로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아.
태호는 불현 듯, 과거 보았던 리치의 회상을 떠올렸다.
그의 왕국의 백성들이 괴물이 되어 가는 장면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
태호는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저 편으로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문득 데스나이트의 두 눈이 흉흉한 빛을 띄었다.
[혼돈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
우선 확실한 것은, 한번 봐야 알 것 같았다.
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