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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이단 옆차기
비석이 쓰러지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 잉카 마을에 내린 정체불명의 저주의 근원을 파괴하였습니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퀘스트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비석 안쪽에서 기괴한 빛을 뿜어내는 마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이것이로군.’
에픽 마법서, ‘저주의 서’ 다.
망설임 없이 저주의 서를 주워 들었다.
“......”
생김새가 기묘했다.
태호는 저주의 서가 가지고 있는 그 이질감이 뭔지를 고민하다, 문득 생김새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태호가 처음으로 얻은 에픽 마법서는 리치에게서 얻은 ‘어둠의 계약’ 이었다.
그 스킬북의 표면은 맨질맨질한 검은색이었고, 양각으로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허나 이 스킬북의 표면엔 기괴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음각으로 그려져 있었다.
‘판타로스가 남긴 유산.’
그렇다.
태호는 이 스킬북이 판타로스가 남긴 유산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놈은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을 여럿 대륙에 뿌려 놓았을 수도 있어.’
그리고 많은 퀘스트들이 존재할 것이다.
추정컨대 판타로스는 자신의 사념체를 이용해, 자신이 남긴 유산들을 유저들이 발굴해 내는 것을 의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놈은 분명히 뭔가를 얻는다.
태호는 추론해 보았다.
‘과거의 리얼포스와는 다른 흐름들.’
자신의 행적과 연관돼 있었다.
본래 리치는 타락해 있었고, 태호는 놈과 피의 계약을 맺었어야 했다. 허나 리치는 아직 타락하기 전이었다. 그렇기에 태호는 그 곳에서 ‘어둠의 계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리치에게 얻은 당초의 목적인 ‘선지자의 해골’을 바탕으로 타락하기 전의 데스나이트와 조우했다.
‘이 역시 과거와는 다르지.’
과거의 데스나이트는 완전히 타락하여 무조건 공격을 해 오던 일개 몬스터였으나, 이번 생에선 달라졌다. 그는 분명히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동료들이 타락하였음을 슬퍼했다.
‘그래서 리얼포스의 흐름을 바꾸는 메인 퀘스트가 등장.’
리얼포스의 이야기가 바뀌고 있었다.
과거의 메인 퀘스트는 큰 줄기를 따라가는 이야기였다. 대륙의 세력구도와 이종족의 침공, 그리고 그것을 수호해 나가는 인간의 이야기다.
‘만약에.’
태호가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받은 메인 퀘스트로 인해, 내 퀘스트와 상반되는 메인 퀘스트를 받는 사람들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어.’
모든 것은 상관관계가 있다.
태호가 판타로스의 잔재들을 지우는 퀘스트를 부여받았다면, 누군가는 잔재들을 일깨우는 퀘스트를 부여받았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
‘변화.’
회귀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변화. 과거에는 있을 수 없었던, 미래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가 리얼포스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나쁜 방향으로 작용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
태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8급 퀘스트]
[메인 퀘스트]
[영광의 기사단][연계]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영광의 기사단 중 하나의 기사를 찾기.]
[보상 : ???]
우선 태호는 로만 제국 놈들이 떨군 장비들을 하나 하나 수거해 나갔다. 다들 사람 꽤나 썰고 다녔는지, 장비들이 수두룩했다.
* * *
해발 고도가 높아질수록 움직임에 제한이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상태이상, 고산병이 가해집니다.
고산병이라는 상태이상에 걸렸을 땐 딱히 해결책이 없다. 체감상 일체감이 대략 20%정도는 떨어진 것 같았다.
체력이 슬금 슬금 깎이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방에 쌓인 만년설 때문에 세상이 하얗다.
미하 마운틴, 해발 8820미터 정상의 풍경이었다.
구름조차 발 아래에 두는 드높은 세계의 날씨는 의외로 맑음. 강풍이 불었지만 상태이상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기후의 변덕도 없었다.
태호는 그 정상에 서 있는 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Lv. 150][정예]
[성혈의 기사, 하테온]
옛날, 하테온을 공략하던 영상을 떠올려 본다.
하테온은 정말 생각 이상으로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태호는 눈을 깜빡이다가, 데스나이트에게 입을 열었다.
“저기 가서 말 걸어 봐.”
[......알았다.]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정상 부근까지 도달해, 하테온을 향해 소리쳤다.
[하테온! 막시무스가 왔다!]
[......]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던 하테온이 대답했다.
[막시무스로구나.]
그의 목소리 역시 기괴했다. 광휘의 기사를 잡을 때랑 똑같았다.
[네 목을 혼돈의 주인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이이익! 너도 그 소리냐! 하테온! 공포에 순응해 버린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기사의 긍지는 어디로 간 것이냐! 왕께 한 맹세는 어디에 갔느냔 말이다!]
[이미 내 모든 것을 그분께 바쳤다.]
하테온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
태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변화?]
데스나이트의 반문에 하테온이 킬킬킬, 웃었다.
[허나, 결과적으로 혼돈의 주인이 깨어나는 것은 변함없으리라. 나는 이 미하 마운틴을 타락시켜 혼돈의 주인께 바치기 위해...]
그 뒤로 공방이 오고갔으나, 주목할 만 한 대사가 없었다.
과거 하테온을 공략한 것은 레벨 50의 초보 유저였다. 그는 그냥 산을 타는 게 좋아서, 근방에서 가장 높은 미하 마운틴의 꼭대기에 올랐고 하테온을 발견했다.
그리고 매우 손쉽게 잡았다. 어떻게 잡았냐면......
“텄다. 대화가 안 되는군.”
[......]
데스나이트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내 하테온에게 말했다.
[네가 잃은 기사의 긍지와 맹세를, 내가 이어받겠다. 나는...... 어?]
그때.
타다다다닥!
저 멀리서 달려온 태호가 힘껏 점프하더니, 맹렬한 이단 옆차기를 하테온에게 먹였다.
[건방지다, 막시무......어엇!]
진노한 하테온이 검을 뽑아들기도 전에, 놈의 몸이 뒤로 휘청! 하고 넘어졌다.
이 곳은 해발 8820미터의 정상, 그리고 사방은 깎아지는 경사를 자랑한다.
[우 어 어 어 엇!]
하테온이 데굴데굴 굴러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데스나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호를 보았다.
[이, 이, 이게 무슨?]
“......”
태호는 눈을 깜빡이면서 생각했다.
‘진짜 되잖아...’
그리고 홱, 몸을 돌렸다.
* * *
산 초입.
태호는 거대한 눈덩이 같은 덩어리를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눈덩어리를 깨 내자, 초죽음 상태의 하테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이익...... 이런 건방진......]
태호가 녀석의 머리 위에 해골을 띄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데스나이트가 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아, 긍지 높았던 영광의 기사가 이리도 추잡한 죽음을 맞다니.]
데스나이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푹!
그가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몸으로 기운이 스멀 스멀 새어 들어왔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가 ‘성혈의 기사 하테온’ 의 힘을 일부 흡수합니다.]
두둑! 우두두두둑!
데스나이트의 몸집이 더욱 커졌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가 ‘성혈의 기사 하테온’ 의 스킬, ‘오러블레이드’를 습득했습니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의 레벨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의 올스텟이 5상승했습니다.]
[이름 : 데스나이트]
[레벨 : 140][정예]
[생명력 : 70000]
[공격력 : 3000][방어력 : 1500]
[스텟 : 힘10 , 민첩10, 체력10, 지능5]
[마력 : 0]
[보유스킬 : 왕실 검법, 영광의 축복, 오러블레이드]
[보유장비 : 스산한 혈흔의 한손검...(더 보기)]
태호는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의 레벨이 족히 25가 넘게 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생명력은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이번엔 올스텟도 5 상승했다.
‘나머지 기사들을 흡수하면서 결국 저 녀석이 온전한 영광의 기사가 돼 버리는 것 같은데.’
이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데스나이트가 보유한 스텟치는 아직 용도를 알기가 힘들었다. 딱히 뭐가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군.’
데스나이트는 충분히 쓸 만 한 녀석이었고, 솔직히 쉬폰을 상대하는 것만 봐도 매우 효율적이었다. 아무래도 레벨이 오르는 것에 따라 그야말로 피통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의사소통이 용이하다는 것이 아주 좋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호의 레벨은 100이 되었다.
[3차 전직 퀘스트!]
[서부의 대도시, 라이언의 흑마법사를 찾아가세요.]
전직 퀘스트 역시 떠올랐다.
이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하테온이 떨군 아이템은, 당연하게도 ‘어둠 기사 세트’ 의 일부였다.
[등급 : 8급][유니크]
[종류 : 방어구(하의)]
[이름 : 어둠 기사단의 하갑]
[옵션 : 방어력 500]
[특수옵션]
[힘 +5]
[힘 +5]
[민첩 +5]
[세트 옵션이 존재합니다.*비활성화*]
옵션은 힘과 민첩이었다. 이건 카오스 스톤으로 옵션을 바꾸면 될 일이다.
이로서, 현재 어둠 기사단 세트는 총 3개를 모았다.
‘나머지 두 놈만 더 잡으면 되는군.’
태호는 어쩐지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3차 전직 퀘스트가 서부의 대도시에서 시작되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일부러 광휘의 기사 라온하르트를 먼저 잡고, 하테온을 잡은 것도 어느정도 동선의 계산이 있었다.
남은 것은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 섬멸의 기사 치흘린.
이 두 녀석은 서부 도시 ‘라이언’ 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생각한 것처럼 딱 맞진 않았지만, 얼추 동선이 잘 맞아 떨어졌네.’
계획대로 되지 않은 점은 제법 있었지만 성과가 있었다.
하테온이 떨군 아이템은 저 장비 외에도, ‘순수의 강철’ 다섯 개가 있었다.
이로서 태호가 보유한 순수의 강철은 총 47개였다.
태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잡다한 아이템들을 정리하며, 시무룩해져 있는 데스나이트를 다독였다.
녀석은 과거의 동료였던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다.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닐 것이다. 태호도 겪어 보았고,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지금 움직이고 있으니까.
[......휴우.]
데스나이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호는 말 없이 그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나저나.
[패시브 : 초급 머더러 헌터]
[머더러를 상대로 할 때 경험치 획득량 100% 증가.]
[머더러를 잡을 때 마다 스킬의 경험치가 상승하며, 일정량을 충족시키면 스킬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업그레이드 1단계]
[초급 :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현재 비활성화)]
패시브 스킬 머더러 헌터가 1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이제 태호는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의 대상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초급의 옵션을 활성화 시키면, 리벤지 퀘스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놔 두기로 했다. 지금 상태라면 사망 패널티가 끝난 머더러들이 태호를 노리고 다시 달려 들 확률이 높았다.
태호는 과거, 머더러들과 피 터지게 싸운 전력이 있다.
놈들의 리벤지 퀘스트가 얼마나 큰 보상을 주는 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리얼포스에는 유독 머더러들이 많았다. 이는, 리얼포스의 시스템 자체가 머더러에게 혜택을 주었기 때문일 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리고.
‘어쩌면, 판타로스와 관련된 퀘스트를 받는 것들은 머더러일 가능성이 높아.’
과거, 판타로스가 현실에 강림했을 때 일부 유저들은 오히려 판타로스와 계약을 한 경우가 있었다. 개중엔 머더러가 특히 많았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보면, 유저의 ‘성향’ 역시 어떤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태호의 성향은 현재 중립.
PK를 통해 일정량 이상의 살인행위를 하면, 성향은 ‘악’ 으로 바뀐다. 악 성향이 된다면 유저들의 일부 대도시에는 진입이 불가하며, 여러 패널티를 받는다.
‘악.’
악 성향의 유저들에게 판타로스의 퀘스트가 부여된다?
일단은 그런 가설들을 하나 둘 모아 두자.
아무튼.
그 놈들의 행동패턴은 뻔할 뻔 자다.
그것을 이용해 역공을 펼칠 계획이 머릿속에 착 착 세워져 갔다.
그러는 한편으론 퍽 기대가 됐다.
서부 도시 라이언!
그 곳은 리얼포스의 낭만이란 낭만이 죄다 모여 있는 대도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