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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정령 (2)
어두컴컴한 산은 그야말로 호러영화가 따로없다. 특히나 태호에게는 더욱 와닿았는데, 일체감 100%의 몸으로 이 곳을 돌아다니자니 정말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하긴.’
그래도 과거 겪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나마 애교수준인가.
판타로스의 5대장군 중 하나, 케노스가 걸던 환각은 과장을 보태지 않고 이보다 100배 정도 참혹했다. 살면서 그런 지옥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태호의 정신력은 매우 강력한 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미쳐버린다는 환각에서 태연히 깨어나, 놈에게 치명타를 먹이기까지 했으니까.
밀란은 태호의 앞에 서서, 구불진 산을 걸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넓고, 하늘에 달이 떠올라 있긴 하나 어두우면서도 음습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곳 귀신들의 타락 원인은 혼돈의 힘이 아닐까 싶어. 실제로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고. 혼돈의 힘이란, 상대가 감당하기 힘든 힘을 선뜻 부여해 줌으로서 시작된다는 말이야.”
밀란은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힘이 뿜어져 나오는 근원지로 가는 거야.”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뒤져 보자.
‘우르즈 백 마운틴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태호가 아무리 리얼포스에 인생을 바쳤으며 그 방면 지식에 독보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곤 해도, 정말 모든 곳에 대해 정밀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곳 저곳에서 어떠어떠한 일이 있었느니- 정도인 지역도 분명히 있었다.
우르즈 백 마운틴은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아, 몇 가지 영상을 접한 적은 있다.
예전, 만월이 뜬 어느 날 등장하는 보스가 인근으로 내려와, 초보자 마을까지 도달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는 했다.
결국 그 보스는 초보자 마을에 주둔하며 리스폰된 유저들을 싹 다 해치우다가 레이드 명문 ‘니힐럼’ 에 죽었다는데......
‘그 당시 니힐럼의 평균 레벨이 150은 넘었을라나.’
딱 그 정도.
그렇게 산을 한참이나 걷다 도착한 곳은 딱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사당 하나가 있었다. 사당의 주변에는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는데, 무슨 결계의 일종인 듯 하다.
“저 안일세. 잘 보게.”
두 사람이 숨죽인 채 기다릴 무렵, 달이 정점에 달하자 사당이 달빛을 받아 기묘하게 빛났다. 동시에 사방으로 기묘한 빛을 뿜어냈다.
마치 칠흑같은 바다에 홀로 선 등대처럼, 사방을 조금씩 밝혀 나가고 있다.
스으응-
스으응-
괴상한 음색이 울려 퍼지며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해 왔다.
“기분이 안 좋지?”
“예.”
“혼돈의 힘이 혼돈을 퍼트리는 중이야.”
“우린 안전한 겁니까?”
“너, 이 산에서 산짐승들 본 적 있어?”
있다. 토끼나 다람쥐 등, 간혹 보이는 것들이었다.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그 녀석들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알겠지. 이것은 육체를 지닌 이들을 타락시키는 힘이 아니야. 태초부터 육체가 없는 이들을 타락시키는 힘이지.”
확실히, 예전 잉카 마을에서 본 종류는 아니었다. 그것은 안개를 뿜어냈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다.
“고대에는 육체를 지니지 않던 이들도 제법 많았을 것으로 추정돼. 예를 들어, 정령을 보라고.”
정령.
10가지 종류를 가진 정령은 정령계에서 인간이나 유저의 부름을 받아 리얼포스의 대륙으로 온다. 또는, 리얼포스의 대륙이 정령의 등장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소환된다.
그들은 육체가 없으며, 일정 타격 대미지를 받으면 정령계로 강제 귀환되는 식이다.
“정령뿐이냐? 이 곳에서 멀리 떨어진 동양 대륙에는 혼령 등을 부리는 영술사나 강림술사도 있다고 들었어. 혼백들을 타락시키는 데에도 주효하겠지?”
동방대륙.
이는 네 번째 확장팩에서 등장하는 신비세계 동방대륙을 뜻한다.
돌이켜 보니, 남방 북방 대륙에서도 고유의 영체들이 있었다. 항해술이 발달하며 유저들이 개척한 신대륙은 여럿 있는데, 그중 남방대륙에서는 정령과 비슷한 ‘동화체’ 라는 것이 있다.
매나 짐승들의 혼과 계약해 힘을 발휘하는 직업으로, 이 역시 훗날에 공개될 이야기들이었다.
태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결계를 풀어 보려 애써 보았지만, 결계에 가까이만 가면 귀신들이 달려들어 훼방을 놓는 통에 힘들어서 말이야. 네가 시선을 끌어 주면, 내 열심히 풀어 보지.”
“죽여야 합니까?”
밀란은 쓴미소를 지었다.
“결계에 손을 댄 그 순간, 그들은 지극히 공격적으로 돌변해 버려. 나도 내키진 않지만...... 결계를 풀기 위해선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그의 말에 태호는 고개를 다시금 끄덕였다.
“그러죠.”
“좋아. 시간은 대략 30분. 이 곳은 귀신들이 달려드는 입구 쪽이니, 이 쪽을 철통처럼 막아 줘.”
밀란이 태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저 편으로 달려갔다.
“흐음......”
태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놈들을 모조리 패 죽이는 것도 물론 방법일 것이다. 허나, 일종의 감이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잊고 있는 게 있다.
‘뭘까?’
곰곰이 되짚어 가 보자.
태호는 우르즈 백 마운틴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우르즈 백 마운틴에서 보름달이 뜬 날, 보스급 몬스터가 등장한다.
태호가 본 영상은 총 두 개다.
4인의 파티가 사냥을 하는 영상이었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사냥을 하며 레벨링을 하던 이들이었는데, 그건 순전히 당시 리얼포스가 유저가 많아 독점 사냥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한참이나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패잡으며 정상까지 올라간 그들은, 저 너머에서 포효성과 함께 등장한 거대한 귀신에게 일격에 죽는다.
‘사냥.’
그렇지.
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상식적으로 리얼포스를 본다면, 이 곳의 몬스터들은 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
이곳 초입의 몬스터는 56. 그리고 중간 중간 제법 강해 보이는 녀석들도 100을 넘지는 않는다.
즉, 대강 난이도가 나온다. 이 정도라면 보스 난이도는 높아 봐야 130~150정예 정도일 것이다.
‘헌데......’
거대 귀신이 보스로 등장해, 4인파티를 일격에 죽일 정도의 파워는 아닌 것이다. 유저들은 스텟이 있고, 직업 밸런스를 맞추어 파티사냥을 하기 때문에 동레벨보다 훨씬 좋은 성능을 발휘하기 마련.
그리고 그 다음은 니힐럼이 거대 귀신을 해치우는 영상.
따져 보니, 니힐럼이 그 보스를 잡았을 때 평균레벨 150이었던 그들이 10명이나 모여 장시간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이 정도 몬스터들이 있는데, 보스는 또 레이드 급 보스가 나온다고?’
추론을 해 보자면, 보스는 뭔가를 통해 강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내, 데스나이트를 소환해 냈다.
“데스.”
[......왜.]
“지금부터 귀신들이 올 거거든? 우린 그 녀석들 죽이지 않으면서 막는다.”
[죽이지 않는다고?]
“그래. 느낌이 그래.”
[흐음......]
데스나이트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곧.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계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밀란이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꺄 아 아 아!
비명 소리가 들려오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크르릉-!
크아아아!
사방에서 귀신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공을 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맹렬히 달려와 태호를 공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 출동.”
[알았다.]
데스나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이내 녀석의 몸이 살짝 빛났다.
그는 저 편에서 달려오는 가장 큰 귀신 하나에게 도발을 걸었다.
[Lv. 82]
[강렬한 형태의 불빛]
놈이 뭔가에 홀린 듯 데스나이트에게 달려든다.
캉! 캉! 캉!
데스나이트의 전신에 귀신들이 달라붙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회색빛 에너지를 쏘기도 하는데, 데스나이트가 쯧 혀를 차는게 느껴졌다.
태호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104482]
녀석의 생명력은 본래 105000. 즉, 저렇게 몸빵만 해도 크게 죽어나갈 정돈 아니다. 태호는 양 손을 쫙 펼쳐 이 입구 쪽에 절망과 시력상실을 걸었다.
‘대규모 범위 절망, 시력상실.’
싸 아 아 아 아!
그리고.
‘재수 없으면 죽일 수도 있으니까.’
지능과 마법 공격력에 관련된 모든 장비들을 해제하고, 체력과 민첩 위주의 레어 아이템들을 주워 입었다.
대규모 절망과 시력상실의 지속시간은, 현재 선지자의 해골이 가져오는 성능2배 보너스를 받아 30초.
놈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다 이동속도 저하까지 받아 거의 제자리에서 허우적대는 것으로 보였다.
태호는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0초로 딱 떨어지는 그 순간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절망, 절망, 절망.’
사방에 쿨타임이 1초로 가장 짧은 절망을 난사해 나간다. 수십 마리의 작은 귀신들이 달려드나, 태호는 귀신처럼 요리 조리 피하면서도 하나 하나의 몸에 절망을 맞춰 나갔다.
[......대단하군.]
데스나이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100%의 일체감은 1초란 쿨타임을 온전히 돌릴 수 있게 했으며, 저 작은 귀신들 하나 하나에게 스킬을 적중시키는 말도 안 되는 곡예를 가능케 했다.
푹! 푹!
물론, 그 와중에 대미지를 받기는 했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빠악!
태호는 지팡이 대신 빼든 몽둥이로 달려드는 귀신의 관자놀이를 냅다 후려친 뒤, 몸을 비틀며 돌려차기를 먹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절망 세례.
터엉! 터엉! 터엉!
저 편.
[카이저! 저 쪽에 큰 놈들이 왕창 온다!]
데스나이트가 달려간 곳에 90레벨에 육박하는 귀신들이 우글거렸다.
거대한 무리에게는.
‘어둠의 비.’
어둠의 비를 내렸다. 지능 관련 아이템과 무기를 해제해, 이제 마법 공격력은 현저히 낮아졌다. 오직 지능 스텟으로 오른 마법 공격력과 지능계수 대미지만 적용될 테지만, 그래도 대미지가 상당했다.
아무튼.
그렇게 광역 범위기술을 쓰며, 태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잘한 귀신들을 이끌고 데스나이트 쪽으로 달렸다.
아아아-!
아아-!
귀신들이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며 따라오는데, 그 모습이 꽤나 그로데스크했다. 태호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데스나이트 쪽으로 모조리 끌고 갔다. 그리고 뒤로 빠지며 소리쳤다.
“데스!”
데스나이트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치훌린을 흡수하여 얻은 스킬을 사용했다.
[무한의 방패.]
데스나이트의 사방에 길다란 방패의 벽이 생겨났다.
태호는 치훌린이 저 스킬을 사용하던 것을 똑똑히 지켜본 터라, 꽤나 만족하며 씩 웃었다.
꾸어어-!
으어어어-
귀신들이 방패로 만들어진 벽을 넘지 못한 채 허우적 거릴 무렵, 태호는 다시 그런 놈들의 머리 위로 광역 상태이상기를 날렸다.
‘대규모 광역 절망’
30분의 시간을 막아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진 않을 무렵이었다.
샤아아악-!
결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시커먼 저 편,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꺄 아 아 아 아 아!
데스나이트를 에워싸고 있던 귀신들이 움찔, 놀라더니 더욱 공세를 가해 왔다.
태호는 계속해서 광역 상태이상을 걸며 저 편을 주시했다.
사당 안에서 거대한 형체를 한 귀신이 쓰윽- 마치 검은 안개처럼 새어나와 허공에 일렁거리는 것이다.
태호는 그 녀석의 정보를 확인했다.
[Lv. 10]
[정예]
[강렬한 혼돈의 불빛]
헌데, 그 모습이 기괴했다.
마치 거대한 구체에 회색 소용돌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 소용돌이에서 기괴한 빛이 번쩍인다.
‘레벨이 10? 게다가 예전에 본 것과 생긴게 다른데?’
그 무렵.
데스나이트가 막아 내던 귀신 하나를 죽였다.
[카이저! 실수로 하나가 죽었다!]
“아, 마침 잘 됐군.”
태호는 그 순간 아- 하고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귀신이 마치 회색의 빛처럼 변해 보스에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주시해 본다.
[Lv. 11]
놈의 레벨이 올랐다.
동시에, 천천히 형태를 변형해 갔다. 추측컨대, 이 산의 귀신들이 죽거나 저 귀신에게 흡수되면 과거에 보았던 긴 머리를 한 거대한 귀신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과거에 이 산에 올랐던 파티는 귀신을 마구잡이로 사냥했기에, 저 녀석의 레벨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알아서 결계를 깨고 등장한 모양.
‘역시.’
예상대로였다. 귀신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조금만 더 버텨!”
태호가 소리친 뒤 보스를 향해 달렸다. 보스를 향해 달리던 중, 쓰러진 밀란이 보였다. 그의 몸은 결계를 풀다 함정에 당했는지, 자욱한 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태호는 망설임 없이 지능 장비와 지팡이를 재착용하곤, 중독을 쏘아냈다.
‘중독, 폭사.’
쾅!
중독이 내려앉고, 폭사가 이어졌다. 삽시간에 보스의 머리위에 해골이 뜨고, 강렬한 대미지가 들어갔다.
샤아아아악-!
그 순간.
놈은 다시 거대한 구체로 돌아가 회색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쏴아아아악!
온 사방에 퍼져 있던 불쾌한 기운이 소용돌이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며, 그대로 증발하듯 하늘로 흩뜨려지더니 소멸해 버렸다.
[......크윽! 아?]
데스나이트는 문득, 아무런 미동도 없어진 귀신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다시 비선공 몬스터가 된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태호는 피식 웃으며 보스가 사라진 근처로 향했다.
이 곳 어딘가에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이다.
"엥?"
헌데 놀라운 일이 저 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