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35화 (3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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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계약

정령사.

리얼포스에서 정령사란 무난한 직종 중 하나였다. 무난한 사냥속도, 무난한PvP 성능, 그리고 모나지 않은 대미지와 편리함 등등.

정령사들의 정령은 친화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령의 능력치도 저마다 다르긴 하나 그것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의 느낌이다.

즉, 어떤 부분이 특출나면 어떤 부분이 모자라는 등의 문제이다.

성격도 중요한 요소였는데, 가끔 정령 중엔 성격이 지랄인 녀석도 존재했다.

태호는 가만히 밀란과 아파치 레퓨어를 관찰했다. 두 남자가 하나 둘 정령을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샤아악!

어두컴컴한 불빛이 번쩍이더니 아파치 레퓨어의 앞에 정령 하나가 나타났다.

‘오.’

[어둠의 상급 정령]

상급 정령이었다.

태호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본다. 상급 정령은 과연, 산에서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정령과 아파치 레퓨어가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정령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밀란 역시 중급 정령을 소환하더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이내 아파치 레퓨어가 씩 웃었다.

“역시나, 상급 정령은 조건이 꽤 세군.”

“조건이요?”

태호의 반문에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밤에만 소환하는 것에, 매일 하나씩 레어 급 장비를 요구하네.”

“......?”

아-

태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밀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정령들과의 친화력이 낮은 상태에서는 정령이 제시하는 ‘조건’ 이 상당히 강력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하급 정령과 계약해서 차분히 키워 나가는 수 밖엔 없겠어.”

하급 정령은 조건도 매우 낮고, 낮은 상태에서 차분차분 성장시켜 나가면 친화력이 자연히 높아지는 것.

태호는 대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저들이 정령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뒤, 보통은 그런 식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하급 정령을 소환하여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정령들을 저마다 소환하여, 수련장에 내려놓았다.

이제, 태호의 차례였다.

태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시계를 본다.

새벽 6시 50분.

태호는 정령 소환에 대해서는 영상이나 공략을 보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진작부터 소환해서 관찰이나 해 볼까.’

먼저 소환해서 어떤 녀석들이 나오는지 본 뒤, 7시 7분 7초에 맞춰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윽고, 오전 7시.

태호는 정령 계약을 발동했다. 스킬을 발동하자, 양 손에서 어둠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세상이 어두침침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곧,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이저’ 님과의 계약을 원하는 어둠의 정령은 현재 총 10체입니다.]

‘10체?’

태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눈 앞에 첫 번째 정령이 나타났다.

샤악!

“......!”

태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키가 크고 칠흑같은 머리를 한 사내였다. 사내는 허리를 숙이며 태호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카이저 님. 저는 최상급 어둠의 정령, 아도로입니다. 저는 카이저 님께 강력한 화력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맙소사.

최상급 어둠의 정령?

“최상급 정령이라니? 그건 정령계 간부쯤 되는 애들 아니야?”

아파치 레퓨어의 말에 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태호도 처음 들었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상급 정령 소환은 듣도 보도 못 했는데, 어째서?”

아도로가 빙긋 웃었다.

[카이저 님께서는 타락했던 어둠의 정령들을 구해 주셨기에, 계약을 원하는 최상급 존재들이 많습니다.]

“......!”

[그간 저희는 대륙으로 소환되지 못 했습니다. 어둠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카이저 님과 계약을 원하는 정령이 저 말고도 아홉 체나 더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상에 내려오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다른 속성의 정령들은 정령사라는 매개체로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을 테지만 어둠의 정령은 태호가 나타나기 전에는 나온 바가 없었을 터다.

“조건은?”

아도로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매일 레어 아이템 1종과, 충분한 경험치를 원합니다. 현재 제 어둠의 정령 서열은 58위입니다.]

태호는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내가 만약 아도로와 계약을 맺는다면, 지금의 그 상태로 소환되는 건가?”

[예. 하지만 세계의 맹약에 따라, 대륙으로 소환되었을 때에는 재성장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령사들이 정령을 1레벨부터 키워나가듯, 최상급이란 등급은 건재하나 1레벨부터 레벨업을 시켜야 한다는 말 같았다.

‘흐음......’

헌데, 그 때였다.

7시 7분대에 진입하자, 사방에 더욱 검은 기운이 뿜어지며 넓은 수련장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또다시 떠오른 것이다.

[‘카이저’ 님에게 계약 요청이 1건 추가로 발생하였습니다. 허용하시겠습니까?]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신을 ‘아도로’ 라고 소개했던 정령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런... 그 분까지 관심을 가지실 줄이야. 이렇게 되면 제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져 버리겠군요. 오래간만에 대륙 구경을 하지 못 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는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내 아도로가 꾸벅 인사를 한 뒤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한 녀석들도 난감하다는 듯 사라져 갔다.

마지막이었다.

7분 7초.

그 시간에 딱 맞춰 등장한 녀석은 작은 소녀였다. 소녀는 가만히 서서, 빤히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홉 살? 나이는 잘 가늠이 가지 않지만, 꽤나 어려 보이기도 했다.

[안녕?]

태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소녀는 태호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기뻐. 나의 백성들 행복해하고 있는걸.]

그 순간이었다.

아파치 레퓨어와 밀란이 소환했던 어둠의 정령들이 콩콩 뛰어오더니,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그쪽은 서열이 몇 위?”

태호의 물음에 그녀가 손가락을 펼쳤다.

[7등.]

그리고 으흥흥, 하고 웃었다.

[아빠 몰래 왔어.]

그야말로 맙소사였다. 태호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분명히, 최상급 정령보다 한 급수 위의 존재였다.

“이, 이름은?”

[아르카네, 사과 좋아해.]

웬 사과?

[사과 좋아하는데, 정령계엔 사과 별루 없어. 사과 매일 줄거야?]

촉이 왔다. 뭔가 놓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매일 줄게.”

[응!]

소녀가 태호와 손을 맞잡았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둠의 정령계 서열 7위, 3공주 아르카네와의 계약에 성공하였습니다.]

맙소사.

서열 7위, 심지어 공주란다.

* * *

“네 능력은 정말이지 놀랍군. 신이 우리에게 보낸 선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아파치 레퓨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태호는 생각했다.

어느정도는 사실이긴 했다. 그게 선물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탑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다른 지역의 동지들은 아직 연락이 닿질 않고 있어, 연락이 오면 널 부르도록 하지.”

“불러요?”

“응. 그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아파치 레퓨어가 한쪽 눈을 찡긋인 뒤 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선, 모험을 계속 하고 있으라고. 우린 우리대로 열심히 할 테니까!”

태호가 흑마탑을 나온 것은, 해가 뜬 오전이었다.

우선은 시장거리로 들어가서 사과를 잔뜩 구매했다. 과실이나 곡식류는 보통 배를 타고 무역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끼루루룩! 끼룩!

갈매기가 열심히 우는 저 편, 큼직한 범선과 무역선들이  또다시 항해를 나서고 있었다.

태호는 사과를 들고 시장 구석의 외진 골목길로 들어가, 정령을 소환했다.

‘정령 소환.’

화악!

검은 빛이 일렁이더니, 아르카네가 나타났다. 허리까지 오는 길고 탐스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크고 쏟아질 것 같은 푸른빛 눈망울이 태호를 보......

‘사과를 보고 있군.’

태호는 사과를 내밀었다.

“약속대로 사과 줄게. 오늘은 많이 줄게.”

사과는 대략 30알이 넘는다. 아르카네는 감격한 듯 두 눈 가득히 눈물을 글썽였다.

[착해.]

그리고 아삭, 아삭, 사과를 베어 먹기 시작했다. 태호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아르카네의 정보창을 띄웠다.

[이름 : 아르카네]

[레벨 : 1]

[공격력 : 하]

[방어력 : 하]

[생명력 : 100][마력 : 100]

[보유스킬 : 어둠의 종소리]

정령들의 정보창은 간소한 편이었다. 일정량 이상의 대미지를 받으면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며, 1레벨부터 키워야 하기에 아직 별볼일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태호는 녀석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을 살펴보았다.

[스킬명 : 어둠의 종소리]

[어둠의 종소리를 퍼트려, 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에게 10초간 석화 상태이상을 건다.]

쿨타임이 조금 긴 편이었지만, 아직 1레벨이다.

“......”

아니.

별볼일 없는 수준이 아니잖아. 레벨1때 이런걸 가지고 있다면, 성장시켰을 때 대체 얼마나 더 대단한 것들을 보유할 수 있단 말인가?

[나 센데.]

“세다고?”

[응. 밥 많이 먹고, 쑥쑥 크면 더 세지. 어둠의 정령, 힘 아주 세. 다른 애들보다 세!]

좋다.

어찌됐든, 태호의 입장에서는 석화 상태이상이라는 것이 추가된 셈. 레벨1때 이 녀석을 키우는 것은 태호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다하다 이젠 정령까지.’

이제 태호는 데스나이트와 정령, 두 개의 소환물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태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운의 여신 티케, 당신 최고야.’

* * *

간만에 들른 앞마당에는 여전히 대련이 한창이었다. 태호는 오늘 라간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친구등록해 놓은 그에게 물었다.

-뭐 해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사냥하고 있슴다! 어디신데요?

-앞마당인데 없어서 귓속말 해 본 거에요.

하긴.

사냥을 열심히 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일 터다. 태호가 그럴려니 하려는 그 때였다.

-근데, 여기 좀 기묘한걸. 지금 바쁘심까?

-그리 바쁘진 않아요.

-그럼, 이쪽으로 조금 와 보실래요? 아무래도 히든피스를 발견한 것 같아서.

히든피스라.

-무슨 종류의?

-던전 같슴다!

태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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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전해들은 곳으로 향했다.

라이언에서도 북동쪽에 위치한 허름한 늪지대였다. 지역 명칭은 ‘죽음의 늪지대’ 인데, 70대부터 150대까지 다양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곳이었다.

‘위치는 나쁘지 않군.’

이 곳을 탐방한 뒤, 바로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해 보유한 ‘영광의 기사단’ 의 메인 퀘스트의 마지막을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늪으로 들어서자, 입구 쪽에 앉아서 창을 손보고 있던 라간이 손을 흔들었다.

“하하하! 오셨구만!”

이쪽 늪지대는 그리 인기가 많은 사냥터는 아니었다. 태호의 기억에도 딱히 뭐가 남아있는 곳은 아니었던지라 흥미가 동했던 것이다.

“자, 가 봅시다!”

늪지대로 들어섰다.

사방에는 뭔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모든 것이 썩고 침적되어 가라앉아버린 늪 사방에는 고요함만이 맴돌 뿐.

라간은 태호를 이끌고 제법 익숙한 듯, 늪지대를 요리조리 잘 피해 걸어갔다. 잘못 밟으면 ‘늪지옥’ 이라는 상태이상이 걸리는데, 그대로 슬금 슬금 유저의 머리 끝까지 늪이 빨아들이는 상태이상이었다.

걸리면 스태미너를 모조리 소모해 나와야 해, 아주 귀찮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늪지대를 걸어 나가던 그 무렵이었다.

“쉿.”

라간이 일순간,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태호가 고개를 까닥이자, 그가 수풀 너머 저 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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