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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피라미드
무사드의 가호.
티케의 가호가 패시브 스킬 ‘행운’ 이라면, 무사드의 가호는 ‘전투 본능’ 이라고 할 수 있다.
무사드의 전투본능은 동료의 레벨과 차이가 심하게 나더라도 파티 경험치 패널티를 받지 않으며, 자신보다 고레벨 몬스터를 상대로 할 때 주력스텟 5의 보너스가 주어진다.
꽤나 매력적인 가호가 아닐 수 없다. 태호가 여지껏 잡아 왔던 몬스터들은 대부분 태호보다 레벨이 높았기 때문에, 유용했을 터다.
아무튼.
라간이 파티에 합류함으로써, 보통은 경험치를 50:50으로 나누기에 손해를 봐야 하지만 무사드의 가호가 있기에 그런 손해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늪지대에서 야트막한 북쪽의 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호는 그 곳에서 데스나이트를 소환했다.
이제 태호에게는 데스나이트와 아르카네, 두 소환체가 함께 할 것이다.
[......뭐가 늘었군.]
데스나이트가 영 찜찜한 얼굴로 아르카네를 바라보았다. 아르카네 역시 데스나이트를 보았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데스나이트를 보던 소녀가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빠?]
“아니, 착한 친구야.”
[응.]
라간은 그 소환체들을 보며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런 녀석들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구만.”
* * *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
영광의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그는, 자신 소유의 던전을 가지고 있다.
디트로히의 던전이라 함은 과거에 꽤나 유명했던지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던전 클리어에 소모된 유저는 다섯 명. 레이드급의 던전은 아니었다. 물론, 보스 디트로히는 꽤나 까다로웠던 걸로 기억한다.
디트로히의 던전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던전이었다.
리스폰 타임은 매일 6시간 간격으로 0시, 6시, 12시, 18시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평균레벨은 대략 150. 보스는 200레벨의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 다.
물론 첫 등장시에는 본체가 등장하고, 본체가 죽은 다음에는 증오의 망령이 되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설정이었다.
태호는 산 앞에 섰다.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의 던전이 열리는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던전을 열기 위한 ‘자격조건’ 이 필요하다.
바로 앞서 태호가 잡았던 기사들 중 하나를 잡는 것이다.
태호에게는 당연히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다. 그중 하나를 잡는 게 아니라, 데스나이트를 빼곤 모조리 다 잡아 버렸으니까.
과연.
구구구구구궁!
산이 육중한 울음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양 대지가 떨리고, 산이 점점 모습을 변화해 간다.
태호는 천천히 그 모습을 감상했다. 과거에는 유료 동영상으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산은 완연한 던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은 거대한 피라미드 같았다. 회색빛의 거대한 벽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처럼, 홀연히 나타나 우뚝 서 있었다.
“햐, 연출 봐라.”
라간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태호는 고개를 까닥였다.
“갑시다.”
* * *
입구로 들어서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 : 증오의 피라미드.]
[던전을 첫 개방한 유저입니다.]
[특별 던전 보너스!]
[축복!]
[3일 동안 던전 내의 경험치량과 아이템 드랍률이 50% 상승합니다.]
[던전이 오픈된 첫 날 한정, 올 스텟 10 상승의 축복을 받습니다!]
[던전 초기화는 매일 4회, 6시, 12시, 18시, 24시 입니다.]
이미 한번 본 적 있는 메시지였다. 예상범위 안이다.
내부의 구조는 꽤나 화려했다. 거대한 공간의 사방에는 화려한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주로, 무수히 많은 괴물들을 부리는 지배자의 그림이다.
태호는 그 그림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저건......’
큰 체구와 마치 뱀 같은 양 팔과 머리를 가진 놈이었다. 온 몸에선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듯, 안개 같은 것이 묘사돼 있었다.
‘판타로스의 5대장군 중 하나, 헤파이돈.’
태호에게는 익숙한 놈이다. 판타로스는 자신의 휘하에 5대장군을 두었는데, 그중 한놈이었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 5대장군에 대한 벽화가 그득했다.
‘저건 데페로.’
인간형이지만, 온 몸에 눈알과 촉수가 일렁이는 대장군 데페로다.
‘샴.’
홍학의 머리가 열 개 달린 사자의 형태를 한 대장군 샴.
‘케노스.’
광역 환술을 거는 대장군 케노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노스.’
케노스와 형제이자, 선두에 서서 학살하는 것을 즐기는 대장군 신노스까지.
태호의 인상이 금세 찌푸려졌다. 과거의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과거의 유저는 5대장군 중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 했다. 어느 정도 치명타를 입히는 데엔 성공했으나, 놈들에게까지 닿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태호는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던전 내에는 마치 흙으로 빚은 듯 한 기사들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이 던전의 형태는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다.
총5층까지의 단계가 존재하며, 최상층에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가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1층은 기사들이 잔뜩 있었고.’
2층은?
‘슬슬 혼돈에 잠식된 마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단계가 점점 더 강력해진다. 물론, 레이드 급 던전은 아닌지라 난이도는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다.
허나 과거의 이 던전을 클리어한 뒤 독점하다시피 해서 사용한 길드가 ‘로만 제국’ 인 것을 떠올려 본다.
‘로만 놈들이 여길 먹고 급성장을 했었지.’
심지어 통제를 걸고, 파티당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걸어 두기도 했다.
입장료를 낸 파티는 1일 24시간의 4번 리스폰 타임을 누릴 수 있었으며, 그 시간 동안 단 한숨도 쉬지 않고 파티원을 교체해 가며 던전을 돌았었다.
‘레벨업이랑 드랍 아이템이 그 시기엔 아주 괜찮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이 던전을 독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나 다름없었다.
과거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었던 일이, 아주 손쉽게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라간은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여기 우리 둘이서 깰 수 있습니까?”
“흠...... 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간은 잠재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향후 리얼포스의 세계에서는 통합 랭킹14위까지 올랐다.
‘이번 생에는 그보다 더 올려야 해.’
태호는 판타로스를 혼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또, 향후 등장할 레이드나 레이드 급 보스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레이드 급은 혼자서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오직 사냥만이 리얼포스의 컨텐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대륙에는 무궁무진한 컨텐츠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모조리 하기엔 태호의 몸이 모자라다. 향후 태호는 대도시 노펜시아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다방면에서 고려해 보았을 때, 믿을 만 한 동료가 있어야만 했다.
물론 모든 것을 함께 할 수는 없다. 태호 혼자서 획득해야 할 것들도 제법 있는 편이니까.
게다가 모든 것을 앞장 서서 해결해 주면, 자신에게 의존하게 될 확률이 매우 크다. 때문에 적절 선까지만 도와 주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의지로 해 나가게 만들어야 했다.
태호는 그런 과정에서 최대한 너무 과하지 않을 서포트를 해 주며 키워낼 생각을 했다.
머리가 복잡해져 가는 것을 깨닫고, 다시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자, 시작합시다.”
라간의 직업은 현재 ‘중급 전사’ 다. 공방 밸런스가 좋은 베이스 전사 직업군으로, 조금 공격쪽에 치우쳐진 성향이 있다.
창을 쓰며 관련 마스터리를 올리다 보면, 3차 전직으로 창 관련 직업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태호는 그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가서, 한 놈만 끌고 와서 잡아 봐요.”
“옛서!”
라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의 기사 하나에게 근접해, 창의 리치를 이용해 툭 건드렸다. 기사 하나의 석화가 풀리며 라간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Lv. 150]
[증오에 찬 기사]
그리고 그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라간은 창을 꼬나쥔 채 놈과 전투에 들어갔다.
레벨차이가 2배가 넘는다.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선방하고 있었다.
‘현재 일체감이 대충 65%쯤 되는 것 같은데.’
꽤나 높은 수치이지만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리얼포스가 전성기를 달릴 무렵, 라간의 일체감은 대략 70%가 조금 넘었었다.
월드 클레스에 육박하는 잠재력을 가진 것을 태호는 안다.
라간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고전을 했다. 올스텟 보너스가 10이 추가된 데다, 무사드의 가호로 힘스텟이 5 증가했지만 어마어마한 레벨차이는 꽤나 넘기 힘든 벽일 터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결국.
쿵!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라간이 헥헥거리다가, 놈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곤 양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으하하하!”
‘나쁘지 않군.’
태호는 고개를 까닥였다. 대략 10분간의 전투였다. 레벨차이를 고려한다면, 솔직히 유튜브에 올려 조회수를 좀 올릴 수 있을 법 한 수준이었다.
우선.
태호도, 라간도. 일단 레벨업을 좀 해 볼까 한다.
태호는 석화된 기사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녀석에게 지팡이를 뻗었다.
‘어둠의 폭탄.’
본래 어둠의 폭탄은, 10초의 시간 동안 상대에게 가해지는 어둠 마법 대미지를 50% 증가시키며 효과가 끝날 시 폭발 대미지를 일으킨다.
이것에 선지자의 해골이 부여한 마법 성능2배가 추가됐으니, 20초의 시간에 100% 대미지 증가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대미지 뻥튀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치이이익!
기사의 머리 위에 폭탄 문양이 떠올라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대규모 범위 중독, 절망, 시력상실.’
태호가 재차 지팡이를 뻗었다. 삽시간에 거대한 범위의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며, 각종 광역 상태이상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둠의 비.’
어둠의 비가 추가로 쏟아져 내리며 무지막지한 대미지를 띄우고 있었다.
“오...... 세상에.”
라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로 물러서 태호의 옆에 다가왔다.
“그쪽, 대체 레벨 106 맞아요?”
태호는 말 없이 씩 웃어 보였다.
-선지자의 해골이 발동 중입니다.
-데스나이트의 심장이 발동 중입니다.
메시지들을 확인하며, 읊조렸다.
‘대규모 광역 폭사.’
콰과과과광!
콰과광! 쾅!
폭발이 두 번 울려퍼졌다. 한 번은 폭사에 의해 상태이상 중첩 대미지가 터지는 소리였고, 다른 한 번은 어둠의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
라간이 입을 쩍 벌린게 느껴졌다. 데스나이트는 옆에서 지켜보며, 어쩐지 익숙한 양 하품을 했으며 아르카네는 그런 것엔 딱히 흥미가 없는지 태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라간의 눈 앞에 레벨업 메시지가 두 번이나 떠올랐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깜빡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대박이다.”
아닌 게 아니라, 광역기술이 펼쳐진 범위 안의 기사들이 싸그리 죽어 있었다. 106짜리가 150짜리를 광역기로 싹 잡아 버리다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태호는 쉼 없이 다음 광역기술을 펼쳐나갔다. 하늘에서 쏟아지고, 터진다.
그렇게 한참 동안 태호의 독주가 이어졌다.
이윽고.
1층의 무수히 많던 기사들이 싹 다 사라져 버렸다.
‘많이 세졌네.’
태호는 스스로의 대미지가 엄청나게 강해졌음을 체감해 버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라간의 레벨은 어느새 70이었다. 태호도 레벨이 꽤나 올라, 어느새 110을 달성했다.
‘확실히 파티 경험치 패널티가 없군.’
라간과 파티를 해서 경험치를 나눠 먹었을 때의 패널티가 없다. 순전히 무사드의 가호 덕분이었다.
태호가 손짓하자, 데스나이트가 후다닥 달려가 아이템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어이씨, 이거 너무 대단한데.”
라간이 팔짱을 낀 채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인벤토리 창에서 방패 하나를 꺼내 착용했다. 창은 리치가 짧아진 단창을 꺼내어 맞은편 손에 쥐고, 이것 저것 갈아 입기 시작했다.
“......?”
태호는 그 방패를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내, 깜짝 놀랐다.
‘뭐야. 왜 고황방이?’
고황방.
고대 황금의 방패라는 에픽 아이템을 말한다. 특유의 문양과 큼직한 크기, 그리고 뛰어난 탱킹능력을 부여하는 탱커계 사기아이템이라 불릴 에픽 장비다.
“내가 다른 게임에서 하도 탱커를 오래 해서, 이번엔 꼭 딜러를 하려고 했걸랑요.”
그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안되겠다, 이건 너무 민폐군 그래. 내 모자라지만 탱커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이건 조금 나을 거에요.”
“......”
태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쉬폰을 잡음으로서 시작된 변화가, 어떤 과정을 거쳤길래 라간을 저렇게 변화시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