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던전을 얻다
고대 황금의 방패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사기급인 아이템이었다.
사기급의 농도로 치면, 데스나이트의 심장 급이다. 탱커에게는 정말 꿈의 아이템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입수 방법은 태호도 잘 모르는데, 이유는 당연하게도 습득한 이가 정보공개를 하지 않아서였다.
괴짜.
라간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으리라.
하긴, 그는 과거에도 그랬다.
게임을 그저 게임으로만 충실히 즐기던 사람이었다. 게임 안에서는, 그냥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종류의 게이머였다.
매일 라이언의 앞마당에 죽치고 앉아, 레벨업은 안 하고 싸움만 했기에 태호가 억지로 끌고 가 레벨업을 한 적도 엄청 많다.
‘그러고 보니.’
저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앞마당 싸움꾼으로서 유명했던 건, 그 나름의 룰 때문일 거다.
앞마당에는 언제부턴가 암묵적인 룰이 생겼는데, 갑옷은 벗고 무기는 5급 레어 미만을 쓰기 등이 있었다. 상대와 레벨차이가 많이 나면, 알아서 패널티를 주는 것이 예의였다.
이건 그들만의 문화로서, 약간 스포츠 같은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향후 리얼포스 앞마당에 실력 좋은 싸움꾼들이 대거 늘어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가 과거에 ‘바람의 왕국’ 이라는 게임에서 탱커로서 플레이했다는 것은 과거 잠깐 전해 들은 바 있었지만, 적어도 태호의 과거에 그가 탱커 역할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체 하기 싫어해서 시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하긴, 바람의 왕국은 PVP시스템보다는 레이드와 던전 플레이. 즉 사냥에 초점을 맞춘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즐기는 유저들도 압도적으로 사냥 유저가 많다.
때문에 그는 유독 리얼포스에서 PvP를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서대륙 끝, 라이언에서 북대륙까지 날아와 태호에게 결투 신청을 걸던 사람이었으니까.
“......”
돌아와서.
보통 에픽 아이템을 얻게 되면, 싫어도 직업을 그 쪽에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태호는 현재 상황을 떠올렸다.
‘리얼포스는 아직 전성기를 맞기 전이지.’
다가올 미래, 리얼포스가 또 다른 사회를 구축하며 지존의 자리에 오를 무렵이었다면 라간은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리얼포스는 인기순위 10위권에도 들어가지 못 한 ‘기대주’ 정도의 위치였다. 아이템 시세도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짜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진 않다.
‘하긴, 이 녀석 정말 괴짜긴 하지.’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선 태호는 1층에서 획득한 아이템들을 정렬해 보았다.
‘슬슬 6급 레어가 쏟아지는데.’
한 눈에 봐도 쓸 만 한 녀석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태호는 아이템들을 인벤토리 창에 쓸어 넣으며 생각했다.
‘라간에게는 6급 세트를 맞춰 줘야겠군.’
얼마 전 라이언에 들려 창고지기에게 아이템을 싹 다 쑤셔넣은 적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인벤토리 창은 아직 널널하다.
어디보자.
'순수의 강철은 대략 20개.'
순수의 강철이 모이는것은 좋은 징조였다. 100개를 모아 에픽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으니까.
“자자, 조금 더 탱탱해졌으니 2층 가 봅시다.”
라간은 자신이 앞장 서려다가, 조금 겁이 나는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태호는 빙긋 웃었다.
‘이쯤 되면 머더러들이 쫓아올때가 됐는데.’
리벤지 퀘스트가 상대를 추적할 때 위치 갱신이 24시간 단위다. 즉, 놈들은 24시간 전의 위치를 보고 추적해 오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충 이 쯤에서 끊어 볼까-
[초급 :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현재 비활성화)]
태호는 ‘초급 머더러 헌터’ 패시브 스킬의 상태를 바꾸었다.
[리벤지 대상이 해제되었습니다. 당신의 위치가 더 이상 갱신되지 않습니다.]
이제 태호가 움직인 늪지대-던전 의 위치정보가 갱신되지 않고 24시간 전의 갱신 전 정보에서 멈출 거다.
그 위치는 라이언 남부, 평야.
우르즈 백 마운틴 근방일 터.
태호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2층으로 올라섰다.
2층에 즐비한 몬스터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긴 했지만, 약간 뭔가가 변형된 이들이었다.
[Lv. 165]
[혼돈에 잠식된 주민]
태호에게는 제법 익숙한 형태다. 자신도 모르게 이를 뿌득, 하고 갈았다.
‘혼돈의 힘에 타락한 사람들이군.’
태호는 과거의 지구에서 질릴 정도로 이런 사람들을 보았다. 평범한 인간들이 혼돈의 힘을 견디지 못 하고 타락해 버리면, 이렇게 변한다.
인간의 신체를 하고 있지만 양 팔과 다리는 혼돈의 마물의 것을 했다. 누군가는 악어 대가리를, 누구가는 거대하고 길쭉한 촉수를.
“끔찍한걸.”
라간이 혀를 찼다.
이쪽부터는 실전 전투다.
석상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지만, 이 녀석들은 다르다. 165레벨에 걸맞는 대미지와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충분히 빠르고 조직적 행동을 했다.
태호는 왼쪽에 따로 떨어져 배회하는 열 마리 정도의 무리를 가리켰다.
“저거 끌어와서 버틸 수 있을까요?”
“흠...... 도전은 해 보죠.”
라간이 대답을 마친 뒤 왼쪽 무리로 접근해 들어갔다. 원거리에서 도발 스킬을 사용한 뒤, 열 마리가 우루루 달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라간은 놈들이 충분히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짊어지고 있던 방패를 바닥에 쾅! 내리찍었다.
방패가 번쩍이며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훨씬 커져, 좌우와 정면에 큼직한 빛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으어어어- 어어어-
주민이 벽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역시, 옵션이 좋긴 좋네.’
고대 황금의 방패는 발동시 제 자리에 고정되며, 1분의 쿨타임을 갖는 20초 유지의 방패 방어막을 만들어낸다. 사소한 문제라면 저것을 사용하는 동안엔 플레이어가 움직일 수 없다는 점과 일정 대미지 이상을 받게 되면 깨어진다는 것이다.
방패는 기본적인 방어능력이 굉장했지만, 사용자의 생명력과 체력, 힘스텟 계수만큼의 방어력을 추가로 얻기에 저레벨이 사용하더라도 전사 클래스라면 충분히 강력했다.
우어어어-!
촉수며 악어 대가리가 날아들어 방패의 벽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태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들의 머리 위로 광역기를 쏟아냈다.
콰과광!
10마리 정도는 꽤나 손쉬운 듯 하다.
‘10마리 정도를 버티는덴 큰 문제가 없군.’
역시 탱커계 종결 에픽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태호는 멀뚱멀뚱 서 있는 데스나이트에게도 주문했다.
“데스.”
[엉.]
“너도 저기 가서 몰아 와.”
[......어어, 알았다.]
데스나이트도 후다닥 달려가 열댓마리를 끌고 왔다. 자신의 몫으로 열댓마리를 끌고 와 방패의 벽을 기다리던 라간이 눈을 휘둥그래 뜬 뒤 다시 방패를 내리꽂았다.
“어억!”
쿠궁! 쿠궁!
어느새 방패의 벽 사이로 스무 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모였다. 데스나이트가 소리쳤다.
[무한의 방패.]
쫘좌좍!
사방에 방패로 된 긴 벽이 세워졌다.
태호가 그 위로 광역기를 마구 뿌려댔다.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마냥 마구잡이로 쓰고 터트리고를 반복하자, 스무 마리가 오래 버티지 못 하고 저승행 급행열차를 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모으고 패잡고를 반복했을까?
중간 중간 라간의 방패 쿨타임을 기다리는 것을 제외하면 오롯이 사냥에 시간을 썼다.
[당신의 정령 ‘아르카네’ 의 레벨이 50을 달성하였습니다.]
아르카네의 레벨이 50을 달성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때 즈음, 2층에는 남아있는 몬스터가 거의 없었다.
“와...... 세상에, 정신이 하나도 없네.”
라간이 눈을 꿈뻑였다.
말 그대로, 2층을 청소하는 시간은 대략 1시간이 걸렸는데 그새 숨 한번 돌릴 시간도 없이 사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태호는 사방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2층도 손쉽게 클리어됐다.
'순수의 강철이 이번엔 10개.'
문득, 자신을 빤히 보는 아르카네를 의식한 태호가 물었다.
“꼬마가 보기가 좀 힘들려나?”
[전혀?]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령들, 싸움 잘 해. 힘 아주 센데.]
“......”
확실히 정령은 정령.
태호는 아르카네의 정보를 띄웠다.
[이름 : 아르카네]
[레벨 : 50]
[공격력 : 중]
[방어력 : 중]
[생명력 : 5000][마력 : 5000]
[보유스킬 : 어둠의 종소리, 어둠의 장막, 어둠 정령계의 공주님.]
아르카네에게 그새 두 개의 스킬이 더 생겼다.
태호가 천천히 스킬의 성능들을 살펴보았다.
[스킬명: 어둠의 장막]
[어둠의 장막을 쳐 20초간 상대를 일정 범위 안에 가두어버리고 고통을 준다.]
[스킬명: 어둠 정령계의 공주님]
[패시브 적용, 공주님의 상태이상기는 적의 레벨을 가리지않는다.]
“......”
과연 정령계 공주님 답다, 라는 평가가 새삼 들었다. 상태이상 기술이 몬스터의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걸린다는 말이다.
‘흑마법에 특화된 마법들이야.’
마치 흑마법을 위한 보조스킬들 같은 느낌이 강했다.
태호는 일단 2층의 장비도 수거했다.
이번 층 역시, 레어가 쏟아져 내렸다. 그 와중, 태호의 눈이 반짝였다.
‘유니크다.’
[등급 : 6급][유니크]
[종류 : 장신구(팔찌)]
[이름 : 맹약의 팔찌]
[옵션 : X]
[특수옵션]
[지능 +5]
[지능 +5]
[이동속도 증가 10%]
‘오......’
이 시대에 유니크급 장비를 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확장팩이 추가되며 당연히도 아이템 등급은 점점 더 올라갔다.
현시대의 노멀-레어-유니크 등급이 있다면, 향후엔 유니크 위에 ‘전설’ 이 생겨난다.
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아이템 강화 시스템이 생겨나는데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동속도 증가’ 옵션이었다.
자연적으로 이동속도가 붙어 나오는 옵션은 정말 드물었는데, 카오스 스톤을 이용해 랜덤뽑기를 해도 솔직히 1퍼센트 미만의 확률로 등장하는 식이었다.
‘이건 일단 킵.’
2층부터 4층까지의 몬스터들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은, 변화하는 벽화들이었다.
태호는 벽화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1층의 벽화와는 다른 2층의 벽화.
2층에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과 판타로스의 5대장군이 오른쪽에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신성함이 물씬 느껴지는 존재들이 결전의 태세를 마치고 있었다.
‘신들과 혼돈의 힘과의 싸움?’
3층의 벽화는 패퇴하는 5대장군과 의기양양한 신들의 모습.
4층의 벽화는 땅을 뚫고 등장하는 거대한 팔, 그리고 익숙한 판타로스의 형상이었다.
마침내 5층.
태호는 왕좌에 앉아 있는 기사를 주시하며, 사방의 벽화를 살펴보았다.
결과는 패배!
아니, 패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승부라고 해야 할까?
판타로스가 참전한 전쟁은 비등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신들의 일격이 판타로스의 몸을 꿰뚫는것까지 묘사돼 있었다. 허나, 신들의 진영 역시 초토화 된 지 오래다.
‘상처만 남은 무승부!’
태호의 소감은 그러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곱씹던 그 때였다.
[나의 부하들이 하나 둘 죽어나간 것이 너 때문인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왕좌에 앉아있던 기사의 이름은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
[Lv. 200]
[정예]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
200레벨의 정예다.
태호는 놈의 뉘앙스가 묘한 것을 깨달았다. 라간이 잔뜩 긴장한 채 방패를 꼬나쥐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직 태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국엔 혼돈의 주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왜 그리도 의미없는 저항을 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했다. 태호는 대답하는 대신, 데스나이트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데스나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디트로히 단장! 당신은 왜 공포에 순응해 버린 것이오!]
[오, 막시무스. 나는 네가 부럽다, 아무 생각 없이 살 테니 말이다.]
디트로히의 비꼬는 듯 한 목소리에, 데스나이트가 발끈해 소리쳤다.
[헛소리 마시오! 나는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있소!]
[그 신념도, 긍지도 명예도. 곧 허무하게 사라질 지어다. 막시무스, 네깟 것이 감당해 내기엔 무리다.]
[이젠 혼자가 아니오!]
[벌레는 하나든 둘이든 결국 벌레일 뿐이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흥, 어차피 곧 잊혀진 왕국이 떠오르며 혼돈의 힘이 강력해질 터! 이 땅의 존재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
태호는 미래를 안다.
잊혀진 왕국은 제1확장팩이다. 다양한 레이드 던전과 몬스터, 사냥터가 늘어난다.
눈 앞의 디트로히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유저들의 근성이다.
리얼포스가 대세로 자리잡으며 급부상하기 시작하고, 레벨과 아이템이 곧 힘과 권력이 되었다.
특히 한국인들의 근성은 예상 외였겠지.
참고로, 잊혀진 왕국의 최종보스는 릴리즈 된지 반년 만에 한국 공대가 잡았다. 레이드 명문 니힐럼보다 한발 앞섰는데, ‘노블레스’ 길드의 공적이었다.
노블레스 길드는 그것으로 화려하게 리얼포스 판에 데뷔하고, 아시아 최고의 레이드 명문 길드로 자리잡았다. 니힐럼과는 결국 선의의 경쟁 체제를 갖추게 된다.
[또한, 대륙엔 이미 무수히 많은 혼돈의 잔재가 뿌리를 내렸다. 너희가 닦달하지 않아도, 곧 너희 모두는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리리라.]
태호는 그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너는 대격변의 현장에 있었나?”
[물론이다.]
“대격변은 왜 일어난 거야?”
[큭큭큭, 이 싸움은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대격변은 그 일부에 불과하지.]
일부에 불과하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천계와 혼돈의 주인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전쟁의 굴레 중 하나일 뿐!]
지이익!
태호는 놈의 말에서 사실이란 것을 느꼈다.
‘대격변은 한 번이 아니었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까닥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시원하게 말 해 주는 놈이 없으니, 어쩐지 정보에 대한 갈증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출동.”
라간과 데스나이트가 좌우에서 접근해 들어갔다.
태호가 그들에게 주문한 것은 ‘어그로 핑퐁’ 이다. 놈이 아무리 있어 보이는 척 말을 해도, 어차피 레벨은 200 정예다. 놈은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없다.
공격패턴 역시 빤히 꿰고 있었다.
타겟 지정 돌진, 땅에 검을 꽂으며 가하는 광역 공격, 광역 베기를 비롯한 물리 공격들이다.
라간이 놈에게 접근해 들어가며 도발을 걸었다.
레벨이 현저히 낮은 라간이기에 도발 자체의 어그로 수치(몬스터의 적개감 수치)가 매우 낮다. 즉, 시선 돌리기 용도 정도가 한계였다.
[너부터 죽여 주마.]
디트로히가 전신에서 시뻘겋고 회색빛이 섞인 기운을 뿜어내며, 라간에게 달려왔다.
쿵 쿵 쿵 쿵!
라간은 놈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방패를 냅다 땅에 내리꽂았다.
쿠-웅!
디트로히의 거대한 검이 방벽을 때렸다. 태호는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녀석에게 디버프 세례를 날렸다.
‘어둠의 폭탄, 중독, 절망, 시력상실, 어둠의 화살, 어둠의 비.’
쾅 쾅 투-웅! 투-웅! 쏴아아아!
소위 말뚝딜(제 자리에 서서 스킬을 난사해 대미지 딜링을 하는 것) 이었다. 디버프 세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디트로히가 신음성을 흘렸다.
[이, 이건......]
놈이 태호를 노려보았다.
[아나크레온의 힘......!]
하긴, 반갑기도 할 거다.
태호가 사용하는 것은 흑마법. 그가 주군으로 모셨던 아나크레온의 왕, 이제는 리치가 된 서피드 쿤의 마법이나 다름없을 테니.
놈의 머리 위로 쉴새없이 대미지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쾅! 쾅!
디트로히가 방패가 만들어낸 방어막을 기어코 깨부수자, 라간이 잽싸게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빠졌다.
쐐애액!
강렬한 찌르기가 날아 들었지만.
까가강!
“우억!”
라간은 방패를 들어 막아냈다. 그 반동으로 뒤로 쭉 날아갔다. 허나 용케도 균형을 잡으며 섰다.
[내 차례다 디트로히!]
데스나이트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놈에게 몸통박치기를 날리며 도발을 가했다.
태호는 아르카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나 힘 세지.]
소녀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디트로히의 머리 위에 어둠의 기운이 모여들더니, 검은 빛의 종을 만들어냈다.
종이 좌우로 흔들린다.
데-엥!
쩌저적!
소리를 들은 디트로히의 몸에 석화 상태이상이 걸렸다. 거기에 사방에 시커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어둠의 종소리, 그리고 어둠의 장막.’
두 개의 상태이상이 추가로 걸려 디트로히를 옭죄어 왔다.
그때, 태호가 읊조렸다.
‘폭사.’
콰과광!
쾅!
무려 8종의 디버프가 폭발하며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선사했다.
뒤이어 어둠의 폭탄까지 터지자, 디트로히의 정신은 혼미해질 뿐이다.
이내, 놈이 정신을 되찾고 전신에서 시뻘건 오오라를 뿜어냈다.
[이노오옴!]
쿵쿵쿵쿵쿵!
놈이 태호에게 돌진해 들어왔다. 빠르다. 태호는 빤히 그를 지켜보다가, 근접해 들어올 무렵 읊조렸다.
‘어둠의 발걸음.’
팟!
태호의 몸이 사라지고, 디트로히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태호는 디트로히의 맞은편 30미터 거리에서 등장했다. 조금 전 까지 태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어둠의 결계가 남아, 디트로히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사용했던 자리에 속박 마법진을 남기는 ‘어둠의 발걸음’ 의 성능이 발동된 것이다.
[크으윽!]
태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시 디버프를 차곡 차곡 쌓아갔다.
‘어둠의 폭탄, 중독, 절망, 어둠의 화살, 대규모 범위 시력상실, 어둠의 비.’
시력상실의 긴 쿨타임은 광역 시력상실로 대체하고, 놈의 움직임을 죄다 봉쇄했다.
툭!
툭!
툭!
머리 위로 중독과 어둠의 비가 가하는 대미지가 줄줄줄 새고 있었다. 막 ‘어둠의 발걸음’ 이 만들어낸 속박이 해제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라간이 달려가 도발을 건 뒤 방패를 내리찍었다.
[이, 이것들이이이!]
번쩍!
놈의 몸이 커지며 도발을 상쇄했다.
라간은 능숙하게 방패를 회수하고, 발등에 단창을 냅다 찌른 다음 오른발을 내질러 놈의 다리를 걸었다. 그리고 휘청이는 그 순간, 방패로 놈의 몸통을 냅다 밀쳤다.
쿠궁!
놈이 넘어졌다.
뒤이어 데스나이트가 앞을 틀어막으며 두 개의 스킬을 동시에 사용했다.
[오러블레이드, 무한의 방패!]
데스나이트의 검이 빛을 발하며 하얗게 타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방패의 벽이 쫙 깔려, 재차 놈의 행동을 봉인했다.
중독이 미친 듯이 체력을 깎자, 다시금 방아쇠를 당긴다.
‘폭사.’
콰과과광!
꽈광!
이어지는 폭사. 그리고, 어둠의 폭탄.
다시 리필되는 디버프.
틈을 보이지 않는 도발 드리블.
사실상 디트로히는 태호의 몸에 손 하나 대 보지 못한 채 머리위에 해골을 띄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이대로 끝일 거라 생각지 마라...... 나, 나는...... 그, 그리고 나의 부하들은...... 잊혀진 왕국의...... 기사로서...... 다시......]
태호가 고개를 까닥이자, 데스나이트가 검을 쑤셔 넣었다.
[끄윽!]
데스나이트가 짧게 읊조렸다.
[잘 가시오, 단장.]
샤아아악!
이윽고, 데스나이트의 덩치가 더더욱 거대해져 갔다. 전신에서 울끈불끈 근육이 솟아나고, 어둠으로 만들어져 있는 듯 한 신체들이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오오......!]
데스나이트가 환호하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의 펫 ‘데스나이트’ 가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강철의 기사 막시무스’ 로 명칭이 변경됩니다.]
[당신의 펫 ‘강철의 기사 막시무스’ 가 온전한 힘을 되찾았습니다.]
녀석의 온 몸에 윤기 나는 검은빛의 철갑이 착착착, 생겨났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이목구비는 점점 더 선명해져 갔고, 이내 인간의 것을 되찾았다.
[으하하하! 내가 힘을 되찾았다!]
데스나이트, 아니 막시무스가 양 팔을 활짝 벌린 채 환호성을 내질렀다.
태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퀘스트 완료]
[영광의 기사단.]
[경험치 획득]
[던전 ‘증오의 피라미드’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던전을 소유하게 되면 출입 제한을 걸 수 있으며, 던전 경영 및 관리는 오롯이 소유자의 책임입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메시지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태호는 그 메시지들을 읽어 나가다, 한 군데에서 눈을 휘둥그래 떴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