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정직함, 아주 마음에 들었다. >
태호가 아이템을 챙기며 힐러 쪽에 지팡이를 뻗었다.
‘어둠의 폭탄, 중독, 어둠의 화살.’
투-웅!
힐러에게 한 방을 갈기려던 그 순간.
화아악!
머더러 무리에서 돔 형태의 빛이 생성됐다.
‘오호?’
저건 사제 계열 3차 전직기술인 광역 결계진이었다. 일순간 광역 무적을 걸어 버리는 빛 안에서 머더러들이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천상의 결계로군.’
저 결계 속에 있으면 일순간 전투상태가 풀리기에 이동 스크롤을 찢을 수 있게 된다. 다만, 태호가 가진 무적기처럼 그 안에서 공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접근도 거부하기에, 선공격 하기 전 아이템부터 챙긴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텄다. 하... 퀘스트로 조합한 아이템 없어졌어. 엿됐네.
-뒤져서 템 떨구면 대장 지랄병 더 도진다. 일단 빠지자. 어세신즈랑 마법사 새끼랑 같이 왔으니, 붙으면 우리 다 죽는다.
그 때.
길드 채팅으로 보이는 채팅이 들려왔다
-에라이 씨발! 로키 이 개새꺄아아아!
-야, 대장 지금 지랄병 이미 났는데? 왜 저러지? 누가 벌써 일러 바쳤냐?
-일단 튀자.
샤샤샥!
그리고 어느새,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파티 단위로 저장된 위치로 귀환하는 스킬을 사용한 모양인데, 꽤나 조직적으로 훈련된 모습이었다.
‘오?’
의외의 모습에 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분지에는 어세신즈 다섯과 태호만이 남았다.
어세신즈에도 사제가 있는지, 로만제국이 무적기를 사용하자마자 자신들도 무적기를 쓴 모양이었다.
태호는 현재 숲의 가호로 은신 상태이상을 받고 있기에 보이지 않을 터. 허나 놈들은 제3의 세력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 하다.
어세신즈 역시 빠르게 퇴각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네.’
어세신즈가 로만제국을 사냥하고 다닌다더니, 그게 정말이었나보다.
‘뭐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정확히 여기로 급습을?’
그 점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로만제국 내부에 스파이 하나를 심어 놓은 것 같은데,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태호는 김이 팍 새 버려, 여기 저기 놈들이 미처 회수하지 못 한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인벤토리 창에 넣었던 아이템을 꺼냈다.
‘이게 뭐지?’
[공허의 퍼즐조각(좌,우,하)]
그저 재료 아이템이었다.
아무래도 놈들의 메인 퀘스트가 이 조합템을 이용해서 진행되는 듯 한 기분이었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인벤토리 창에 집어 넣었다. 분명히 혼돈의 힘과 관련된 아이템일 것이다. 안전한 곳에서 맞춰 보든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놈들의 대화를 엿듣자니 결국, 로만이 로키에게 제대로 엿을 먹은 모양이었다.
* * *
로키의 폐신전에 가기 전, 너른 평야에 들른 태호는 어둠의 기사단과 막시무스 그리고 아르카네를 소환했다.
“너희들 가서 용과 좀 찾아와 줘.”
[사과는 없어?]
아르카네의 말에, 태호는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꺼내 양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응. 사과 좋아.]
아르카네는 금세 기뻐하며 양 손의 사과를 한 입씩 베어먹으며 터덜 터덜 걸어갔다.
[까악.]
야타는 지난 시간 동안 태호의 행적을, 주변의 나뭇가지 위에서 보며 깨달았다.
‘이건 미친 인간이닥.’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정말 악독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러니, 절대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야타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다 말했다.
[나, 나도 도와주겠다악!]
“......그래?”
태호는 눈을 깜빡이며 야타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든가.”
야타까지 날아가 용과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꺼낸 아이템을 내려놓았다.
[공허의 퍼즐조각(상)]
[공허의 퍼즐조각(좌,우,하)]
두 아이템은 분명히 합치면 하나가 될 것이다. 생김새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잠시 망설이던 태호는 마지막 파츠인 (상)을 나머지 부분에 끼워 넣었다.
딸깍!
이제 구체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지잉- 지잉- 지잉-
그 순간.
구체에서 회색 빛이 흘러나오며 음산한 기운을 만들어냈다. 그 자체가 아이템으로서 완성된 기분이다.
다급히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착(캐릭터에 장착귀속됨)]
[이름 : 공허의 혼돈]
[나의 힘 앞에 복종하라.]
[옵션 : ???]
[개방까지 필요한 생명과 영혼 : 792/10000]
“......”
뭔가 미친 아이템인거 같다는 건 착각일까?
분명히 장착시 귀속아이템이며, 등급이 에픽이지만 장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개방까지 필요한 저 정신나간 수치는 뭐란 말인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아이템이야.’
태호의 기억 속에 없는 에픽 아이템. 게다가, 다른 아이템들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초보 학자, 카실론.’
카실론의 한 마디가 붙어 있지 않았다.
카실론의 정체가 뭔지는 사실 알려지지 않았다. 리얼포스가 끝장나는 그 시점에도 밝혀진 것은 없고, 그저 ‘으레 설정상 그럴듯하게 한 마디씩 넣어 둔 게 아닌가?’ 라는 추측이 신빙성 있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점.
‘이로서 큰 일 하나는 막아낸 건가.’
그 확신은 들었다.
그렇게 이리 저리 생각할 무렵, 파견보낸 녀석들이 속속 도착했다.
[나의 주인 카이저여. 나의 말이 맞지 않은가! 하하하! 저 까마귀는 좋은 까마귀다!]
야타가 하늘을 날며 용과의 위치를 알려 준 모양이었다. 태호는 양 품 가득히 용과를 들고 낑낑거리며 달려오다가 아코, 하고 넘어진 아르카네를 번쩍 들어 올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파.]
“아이구, 장하네.”
[하하하.]
아르카네는 칭찬받는 것이 기분 좋은지, 방긋방긋 웃었다.
그렇게 발견해 낸 용과는 총 15개. 경매장에서 용과를 찾을 수 없기에, 이 가치는 크다. 이 정도면 로키가 기뻐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 * *
폐신전.
폐신전을 찾은 태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로키의 제단이 아예 초토화가 돼 있었다. 접시는 온데간데 없고 여기 저기 부서지고 반파돼 아주 난리가 나 있다. 로만이 화풀이를 제대로 하고 간 모양이다.
‘접시가 없어도 되려나.’
곰곰이 생각하던 태호는 이내 인벤토리 창에서 ‘기사단의 훈장’을 꺼내 제단이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막시무스와 아르카네는 돌려보내고, 야타는 저 밖에서 보초를 서게 했다.
화아악!
과연.
로키가 그 부름을 받고 나타났다.
“......”
오늘의 로키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머리를 멋지게 빗어 넘기고, 웬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턱을 괸 포즈로 등장한 것이다.
[아하하, 너였구나.]
“음... 예에.”
[나는 오늘 기분이 아아주 좋단다. 건방진 인간에게 엿을 먹였기 때문이지, 후후. 바로 이 맛이야, 짜릿해.]
로키를 빤히 보던 태호는 피식 웃었다. 저게 바로 로키의 본모습이었다. 그래서, 간 보지 않고 크게 베팅하기로 했다.
“약속드린 용과입니다.”
인벤토리 창에서 용과를 잔뜩 꺼낸 태호가 이번에 발견한 15개, 그리고 사전에 가지고 있던 3개를 전부 다 로키에게 바쳤다.
[흐흥.]
로키는 용과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태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약간은 선택의 기로군.’
여기서 조금 더 진심으로 가느냐, 가식으로 가느냐의 차이다.
리얼포스의 신들은 신이되, 인간보다 뛰어난 사고를 한다.
특히 이 눈 앞의 로키는 더욱. 어쩌면, 그간 생각보다 편하게 속여 넘겼다는 생각 자체가 놈의 술수일 수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로키는 거짓말과 장난의 신이었으니까. 어쩌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은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태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생각했다.
‘기왕 하는거 크게 한다.’
이내, 인벤토리 창의 골드를 꺼냈다.
4만 골드.
막상 꺼내 보니 굉장히 양이 많았다.
“그리고 놈들에게 뜯어낸 돈입니다.”
[오호?]
“이 주변에 용과가 많더군요. 보이는 족족 따 왔습니다. 로키 님 덕분에 뜯어낸 돈은 모조리 돌려 드리겠습니다.”
로키는 가만히 태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김 샜다.]
“......?”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꽤나 귀여워, 어차피 봐 줄 생각이었는데 자진신고 하다니 특이한 인간이군. 이리도 용과를 좋아하는 내 사원의 주변에, 용과 나무가 없을 리가 있겠느냐?]
“......”
나쁘지 않은 선택지를 고른 듯 하다.
로키는 마치 처음 보는 인간을 보듯, 태호를 찬찬히 뜯어 보다가 고개를 까닥였다.
[돈은 필요 없다, 네 거 해라. 적어도 내게는 지상의 재화가 큰 의미가 없노니.]
로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용과를 모조리 챙긴 뒤 태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 정직함,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네 녀석은 기대 이상이구나.]
동시에 로키가 손을 뻗었다. 태호의 몸으로 로키가 쏘아낸 빛이 스며들었다. [내 약간의 힘을 회복 중이니, 가호 하나를 내려 주마. 하하하!]
태호의 눈 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패시브 스킬 : ‘말재간’을 획득했습니다.]
로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제 네 녀석의 말재간이 더 좋아졌으니, 이 땅의 존재들이 더 쉽게 속아날 것이다. 허나, 다시 이 몸에게 거짓말을 하진 말아다오. 아하하하!]
태호가 급히 스킬을 확인했다.
[패시브 스킬 : 말재간]
[설명 : 거짓말과 장난의 신 로키의 마음에 들어 그의 권능을 아주 조금 부여받았다.]
[리얼포스의 존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쉽게 신뢰를 얻는다.]
‘오...’
베팅이 성공했음을 새삼 깨달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나이스를 속으로 외쳤다.
[이 곳은 이미 글렀다. 너는 내 신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라. 성스럽고도, 용과 나무가 아주 많은 곳으로. 알겠느냐?]
“예?”
이번엔 퀘스트가 부여됐다.
[퀘스트 발생!]
[7급 퀘스트]
[서브 퀘스트]
[로키의 신전]
과연.
퀘스트를 직접 내려 줄 정도라면, 이제 태호는 로키의 완전한 신임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아와의 대화에서 신들이 ‘퀘스트’를 부여한다는 것이 보통 의미가 아니란 것 정돈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기간은 딱히 상관 없다. 그럴 듯한 곳에 신전을 옮기고, 이 것을 내려놓아라.]
로키가 꺼낸 것은 큼직한 접시였다. 로키의 제단에 존재하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태호는 그것을 받아 인벤토리 창에 챙겼다.
[아이템 : ‘로키의 제물상’을 획득했습니다.]
이제 만족한 듯 로키는 팔짱을 끼었다.
[나는 이제 안식을 취해야 하노니, 부르지 마라.]
회복한 힘을 다시 태호에게 써 버려, 쉬어야 한다는 뜻 같았다.
샤샤샥!
로키가 사라졌다.
그리고, 로키의 폐신전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호는 골드를 모조리 다 챙긴 뒤, 후다닥 뛰쳐나와 완전히 무너져 버린 로키의 폐신전을 바라보았다.
‘하하...’
단시간 내에 신의 가호를 두 개나 받아 버리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특히, 로키에게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말재간이라서 다행이야.’
지금부터 태호가 만나러 가야 할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적대하는 엘프들이었다.
이미 태호는 우리아의 가호를 받았기에 ‘어느정도는’ 그들의 적대를 덜어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론 모자라지 않나- 란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
이로서 그 고민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려면, 꽤나 험악한 숲을 헤쳐 나가야 한다.
바로, 남쪽 끝의 샤미드 수림이다.
평균 몬스터 레벨 200~250, 몬스터 리스폰 시간이 짧고 포악해 파티를 제대로 짜고 진입해야 했던 곳이다.
아무튼.
이로서 태호는 로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로만제국에게 크게 한 탕을 해 냈으며, 놈들의 메인 퀘스트를 매우 효과적으로 방해한데다 두 신의 가호까지 받았다. ‘이제 슬슬 이쪽 지역에서 할 일이 거의 끝나가는구나.’
샤미드 수림은 몬스터들이 많기에, 그 곳을 지나치면서 사냥 겸 ‘스킬 숙련도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이미 태호는 스킬 숙련도 쉽게 올리는 에픽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반지인 ‘고대 왕국의 증표’ 그리고 귀속 아이템인 ‘메소드의 기운’ 이다.
그간 바쁘게 움직인지라 느긋하게 스킬작 할 시간이 조금 모자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순수의 강철.’
태호에게는 이미 200개가 넘는 순수의 강철이 모였다.
월드 제한인 2개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 그 정직함, 아주 마음에 들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