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52화 (52/194)

< 피하십시억! >

울컥! 울컥!

과거,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건물이 지어질 때처럼 건물은 울끈불끈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부에서 힘이 끓는 것 같은 느낌.

그나저나, 아테나라니.

쉬폰에게 메인 퀘스트를 부여한 것이 바로 저 아테나인 모양이었다. 태호는 그제야 경계를 조금 푼 뒤 그에게 다가갔다. 쉬폰은 아테네를 빤히 보다가, 아이템을 내려놓은 그대로 물러섰다.

“저건?”

“내 메인 퀘스트다.”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의 말에 태호도 아테나를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신 자체가 아니고 조각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다만,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나. 그래서 이 곳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아테나의 조각상을 설치해 두는 게 나의 퀘스트다.”

쉬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테나의 조각상이 설치되자 마자 건물이 급격히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아주 약한 미동만이 남았을 뿐.

태호는 이제는 조용해진 건물의 입구를 보았다. 시커먼 입구 저 안쪽에, 태호의 목표가 있을 터다.

“네 목표는?”

쉬폰의 물음에 태호는 문을 가리켰다.

“저 안쪽에. 이 쪽에 NPC가 하나 있는데, 그거 구하는게 목표.”

일부러 뭉뚱그려 얘기했다. 흑마법사는 유령선에서 구할 것이다.

“흐음...”

쉬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막 봉우리를 내려가려던 그가, 재차 몸을 돌리더니 태호에게 물었다.

“너도 그, 혼돈의 주인의 화신체인가에게 소원을 빌었나?”

흠칫!

태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반문했다.

“뭐?”

“아닌가? 나는 그걸 거절한 뒤, 우연찮게 다른 메인 퀘스트를 얻었지만.”

쉬폰이 그런 정보를 공유한다는 건, 의외였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 자신의 입장을 조금은 밝히기로 했다.

“나는 그것과는 정 반대의 퀘스트를 하고 있지.”

“그럼 나와 비슷하겠군.”

아무래도 그는 이 모든 과정이 ‘게임의 일부’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별로 크게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수준은 딱 그 정도. 태호처럼 과거로 회귀해, 미래에 벌어질 참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들려 주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너.”

쉬폰이 태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프로지?”

“......”

“전프로? 아니면 현프로?”

태호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됐든, 새 시대에 좋은 기회를 잡았군. 아이템이고 레벨이고 차이가 나도, 실력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

“솔직히 놀랐다. 실력 좋더라.”

쉬폰은 그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또 보자.”

그대로 봉우리를 빠르게 내려가, 저 편으로 사라졌다.

태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실력 좋더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살다 살다, 저 자존심 강한 놈에게 별소릴 다 들어 본다.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태호는, 앞으로도 저 놈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떠나고, 태호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건물안은 기괴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좌우 어딜 둘러봐도 그렇다. 내부에는 기묘한 벽화들이 마치 글씨처럼 적혀 있었다.

들어온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잊혀진 왕국]

[잊혀진 왕국의 단서를 찾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화아악! 곧. 사방의 벽화처럼 보이는 글자들이, 태호의 몸으로 하나 하나 빨려 들어왔다.

[교환불가 아이템 : 잊혀진 왕국의 서를 획득했습니다.]

단서란 이런 것을 말 하는 듯 하다. 태호는 그것을 펼쳐들었다.

[잊혀진 왕국이 부상(浮上)하기까지 남은시간.]

[12D 11 : 23: 12]

[아테나의 힘이 부상시간을 4일 늦추었다.]

‘시간을 보여주는군.’

그리고 쉬폰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준다.

서에는 왕국의 기원부터 구조까지 소설책처럼 적혀 있었다.

“......”

대충은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태호는 등장하는 몬스터나 보스의 패턴, 그리고 대부분의 설정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우선, 천천히 읽어 보기로 하고.

‘1차 확장팩이 나오는 속도가 빨라졌어.’

근 한 달 이상 단축된 기분이다. 그렇다면, 2차 확장팩은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

‘균형이 파괴된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부에는 더 이상 특별한 것들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더 구석구석 살폈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막시. 뭐 특이한 거 있어?”

여기 저기를 둘러보던 막시무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다. 혼돈의 힘이 요동을 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약화된 상태군.]

태호는 건물에서 나왔다.

[연계 퀘스트]

[잊혀진 왕국, 심연의 궁전]

다음 퀘스트는 잊혀진 왕국의 중심, 그 심연의 궁전을 탐사하는 퀘스트.

지금으로선 할 수 없다.

이제 태호는 유령선을 찾아야 했다.

봉우리는 높았다. 섬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기에,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유령선 찾기엔 딱이다.

여기 저기를 살펴볼 무렵, 북동쪽 바다에서 희끄무리한 안개가 자욱하게 차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유령선 사냥.

많은 유저들이 유령선을 털어 보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그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유령선을 상대하기 위해 바다로 나서는 건 자살행위다. 바다 위에서 놈들은 마력을 이용해 움직이는 지극히 빠른 범선을 타고 있기에, 무차별 포격에 배가 침몰해 익사하기 딱 좋다.

그렇다면?

정박하는 시점을 노린다.

태호는 안개 너머, 시커먼 배의 형상을 목격한 뒤 그 방향으로 내려갔다.

배는 크지 않다. 적당한 크기이지만, 배의 동력원은 인력이 아닌 마력. 덕분에 빠르고, 무척이나 강하다.

섬의 끝자락.

바다와 맞닿은 곳에, 음침한 부둣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놈들은 이 곳에 정박한 뒤, 지상으로 올라와 사로잡은 산제물들을 학살하는 의식을 치를 것이다.

보통은 NPC들인데, 가끔씩 괴짜 유저들이 잡혀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 위한 의식이냐?

바로, 유령선을 존속시키기 위한 의식. 일정량의 산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유령선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

섬에서 시간을 기다렸다가 유령선을 공략하는 방법이 유행을 타고, 유령선은 그야말로 심심하면 털리는 맛집이 돼 버린 것이다.

태호는 허름한 부둣가에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촤아아아-

유령선이 순회공연을 마쳤는지 부둣가로 돌아와 정박했다. 그리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해골만 앙상하게 남은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Lv. 250]

[유령 선원]

유령 선원의 평균레벨은 대략 250.

[Lv. 270]

[유령 부선장] 부선장이 270. 그리고.

[Lv. 300]

[유령 선장]

이 정도. 선원 10여명과 부선장 하나, 선장 하나다. 태호는 놈들이 배에서 내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전리품들을 꺼내 내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중, 기절해 있는 한 남자를 확인했다. 산제물은 총 하나였는데, 언뜻 봐도 저 남자가 태호가 찾는 흑마법사 같았다.

‘저 정도 구성이면 얼추 다 나왔군.’

태호는 막시무스를 보며 낮게 말했다.

“신호 주면 가서, 저기 저 남자 구해 와.”

[음! 알았다!]

해적들이 둥그렇게 앉아,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선장이 큰 칼을 들고, 섬뜩한 눈을 빛내며 남자에게 저벅 저벅 걸어와 소리쳤다.

“오오! 데샹이시여! 오늘도 산제물을 바치오니, 심연의 가호를 내려 주소서!”

헌데.

놈이 말하는 주문이, 태호가 기억하는 것과 약간 달랐다. 원래의 주문은 ‘오오, 바다의 유령이시어. 오늘도 산 자의 영혼을 바치오니, 우리의 배를 견고히 만들어 주소서’ 였다.

‘데샹?’

데샹이라면, 혼돈의 장군 중 하나. 그리고, 잊혀진 왕국에서 등장할 왕의 수하 중 하나다.

태호가 막시무스에게 물었다.

“막시. 데샹도 아나크레온 침공 때 있었냐?”

[...그렇다.]

아무래도 태호가 기억하는 것은 잊혀진 왕국이 등장한 이후인지라, 그 전까지의 사정과는 달라진 듯 했다.

그 순간.

해적들의 사방에서 회색 기운이 스멀 스멀 피어오르며,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놈의 머리는 마치 벌레의 머리 같았다. 파리 같기도 하고, 풀무치 같기도 하다. 몸은 인간의 것이었는데, 양 팔과 다리에 촉수가 달려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팔, 진짜 데샹이잖아.’

그 순간.

태호의 눈 앞에 양팔저울 하나가 떠올랐다.

[균형을 파괴하는 자]

양팔저울이 끼익 끼익 좌우로 흔들거리다가, 우측으로 픽! 하고 꺾였다.

아무래도 균형의 수호자란, 균형파괴자를 만나게 되면 이런식으로 표현되는 스킬인 모양이었다.

[너희가 가져온 제물은 맛있게 먹겠다...]

데샹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샹.

놈 역시 근거리 공격의 스페셜리스트. 놈의 형체가 점점 더 확실하게 변하더니, 실체화 되어 땅에 내려앉았다.

‘흠.’

싸워야 하는군.

태호는 머리를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 카이저?]

약간은 불안한 목소리의 막시무스가 묻자, 태호는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진행.”

[음! 알았다!]

태호가 숨죽인 채 기다리다가, 데샹이 제물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지시를 내렸다.

“출동.”

[나의 검을 받아라, 사악한 혼돈의 종자들이여!]

막시무스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태호는 아르카네를 소환한 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웅!]

콰직!

막시무스가 데샹에게 몸을 들이 받았다.

[막시무스? 이 놈은 분명히 저주를 받았을 지언대...!] [공포를 초월하여, 강철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노라!]

깡! 까가강!

막시무스가 데샹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태호는 막시무스의 뒤를 따라 달리며, 아르카네의 스킬을 사용했다.

‘어둠의 종소리.’

데-엥!

삽시간에 사방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상대의 레벨을 가리지 않는 석화 상태이상이 찾아왔다.

[어억?]

데샹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막시!”

[간다!]

막시무스는 쓰러져 있는 남자를 번쩍 들어, 태호 쪽으로 냅다 던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카네의 두 번째 스킬이 이어졌다.

‘어둠의 망토.’

휘리릭!

사방을 싸악 쓸며, 시커먼 망토가 해적과 데샹을 한 곳에 묶어 버렸다.

‘어둠의 장막.’

마지막 스킬까지 사용한 뒤, 태호는 아르카네를 소환 해제했다. 태호가 그 곳에 광역기를 그야말로 쏟아 부으며 소리쳤다.

“이리 와! 튀자!”

[튀, 튀다니?]

막시무스는 당황해 하면서도 후다닥 달려와 태호 쪽에 붙었다.

“들어!”

막시무스가 남자를 들었다. 태호는 잽싸게 달려, 유령선으로 향했다.

[과, 과연!]

막시무스가 감탄하며 태호의 뒤를 따랐다. 두 남자는 유령선에 올라탄 뒤, 깊게 내려와 있는 닻 줄을 냉큼 잘라 버렸다.

태호는 후다닥 조타실로 달려가 핸들을 잡고, 마력을 쏟아 부었다.

지이이잉-!

유령선의 사방이 굉음을 내며 마치 자동차처럼, 점점 깨어나기 시작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해적들이 상태이상에서 해제되어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막시. 돌진!”

[......아, 알았다!]

막시무스가 배에서 뛰쳐나가, 다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젠장! 배를 지켜라아아!”

고함을 지르는 선장의 뒤에서, 데샹이 이를 뿌득 갈았다.

[막시무스! 이 교활한 잡놈 같으니라고!]

[그 입 다물라!]

동시에 막시무스의 사방에 방패의 벽이 만들어저 해적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막아냈다.

지이이잉-!

그 사이, 유령선이 제 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끼긱- 끼기기긱-

유령선이 움직인다. 운용법은 마치 자동차 운전과 비슷했다. 퍼억- 하고 돛이 펴지고,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 유령선이 빠르게 바다로 나아갔다. 쇄애애액-!

이 배를 가질 수만 있으면 바다의 패자가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닐 테지만, 유저의 손에 들어간 배는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 한다. 해적들이 의식을 치러 배를 강화시키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태호는 배를 육지에서 한참이나 띄어 놓은 뒤, 막시무스를 소환해제했다.

재소환한 막시무스는 배 위에 서 있었다. 그 사이, 생명력이 왕창 깎여 나가 있었다.

“체감이 어때?”

[샤, 샤반타와 맞먹는다. 동급! 혹은 그 이상!]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도망칠 것이냐?]

“도망치긴? 패 죽여야지.”

태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펴, 저 편을 가리켰다.

“장전해서, 죄다 쏴 죽여 버리자.”

배 위에 함포와 포탄이 줄지어 서 있었다.

[......!]

막시무스는 뭔가를 깨달은 듯 경악한 얼굴로 태호를 보았다.

[너... 나의 주군이지만, 정말 악마 같다!]

“칭찬으로 듣지.”

* * *

해적들이 부둣가로 달려와 발을 동동 구를 무렵이었다.

[이, 이, 이런 쓸모없는 개자식들!]

데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해적들을 윽박지를 그 때. 선장이 흠칫, 놀랐다.

“저, 저놈들이 다시 다가옵니다!”

[뭐어?]

데샹이 시선을 돌리자, 과연 유령선이 다시 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헌데.

“어?”

선장이 가만히 보다, 경악했다.

퍼-엉!

함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포탄이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오고 있었다.

“피, 피하십시... 억!”

쾅- 콰콰쾅!

삽시간에 부둣가에 난리가 났다.

< 피하십시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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