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젠티움 >
유령 표범.
지구력이 뛰어나고, 순간 가속력이 리얼포스의 모든 탈것들보다 빠르다. 그 뿐 아니라, 발소리가 나지 않으면서 일시적 자체 은신효과를 보유하고 있기에 향후 가치가 가장 크게 뛰는 탈것이었다.
태호는 막시무스나 아르카네를 소환하지 않고, 홀몸으로 저벅저벅 놈의 앞까지 걸어갔다.
유령 표범은 상대를 인정하기 전엔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 때문에, 놈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대 일로 상대해야 했다.
태호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느꼈는지, 유령표범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며 그르르릉- 소리를 냈다.
태호 역시 놈을 똑바로 보며 자세를 낮추었다. 사방에서 이를 갈며 태호에게 달려들 기세던 표범 무리가 좌우로 흩어져 사방에 원을 그리며 앉았다.
도전자로 받아들인다는 신호다.
크르릉-!
유령 표범이 태호를 노려보다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태호는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해냈다.
[Lv. 210]
[유령 표범]
210의 레벨이지만, 테이밍이 완료돼 탈것으로 변한다면 레벨은 무의미해진다. 마법을 사용하면 제압하긴 쉽지만, 굴복시킬 수가 없다.
태호는 그대로 놈의 공격을 슥 슥 피하며 기회를 보았다.
휘리릭!
놈의 형체가 허공에서 귀신처럼 회전하며, 착지와 동시에 총알처럼 쏘아져 나왔다. 이번에 태호는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놈을 맞았다.
몸에 달려드는 그 순간.
타악!
땅을 차고 뒤로 몸을 날리며 놈의 대가리를 꽉 붙잡았다. 그대로 허공에서 몸을 틀며 등에 올라탄다.
크르르릉! 크릉!
태호는 그대로 놈의 등가죽을 꽉 붙잡은 채 찰싹 붙었다. 유령 표범이 태호를 떨구려는 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탓!
사방의 사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마치 초고속 오토바이에 올라탄 느낌! 전신이 짜르르 울리는 그 기분이 좋아, 태호는 우하하하! 하며 웃었다.
달빛 아래 태호와 유령 표범이 그림처럼 초원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유령 표범은 태호를 떨어트리기 위한 마지막 발악을 했다. 가파른 절벽에서 냅다 몸을 던져,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요 자식! 어딜!”
태호는 더욱 꽉 등짝에 엎드린 채, 몸을 찰싹 붙였다.
[순수의 강철 망토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추락 대미지를 흡수합니다.]
망토가 태호의 몸을 덮은 채 대미지를 상쇄하고 있었다. 그렇게 절벽 아래까지 굴러 떨어진 뒤.
[순수의 강철 망토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완전상쇄되었습니다.]
태호는 멀쩡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르르릉...
유령 표범은 비틀거리며 일어 서 태호를 노려보았다. 허나, 곧 태호의 앞에 납죽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유령 표범’ 이 당신에게 굴복하였습니다.]
드디어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당신의 탈것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등록된 탈것은 타인에게 양도가 가능합니다.]
“예.” [‘유령 표범’ 이 탈것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로서, 태호는 유령 표범을 얻을 수 있었다.
“휴.”
망토 덕분에 대미지는 하나도 없었다만, 등 위에서 느낀 속도감과 스릴은 진짜였다. 특히 일체감이 100%인지라, 절벽에서 굴러 떨어질 때의 사실감 역시 실제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이다.
“으으-”
태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본래 태호의 목적은 ‘검은 머리 드워프족’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본래 노펜시아의 초원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향하면 ‘아젠티움’이라는 활화산이 나타난다.
끝없는 골짜기와 이어진 그 활화산은 검은 머리 드워프족의 영역.
목적?
바로, 에픽 제작 때문이었다.
태호는 이미 노펜시아의 드워프, ‘헉스’ 에게서 에픽 아이템을 만든 바 있다. 바로, 방금 전 태호의 목숨을 구해 준 망토 말이다.
하지만 한 개의 에픽을 더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헉스에게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
태호는 그에게서 위업을 통해 힌트를 얻은 바 있었다. 바로, 검은 머리 드워프족의 평판이다.
그들의 평판을 통해 친밀감을 형성한다면, 다른 종류의 에픽을 제작할 수 있으리란 계산을 한 것이다. 이는 과거, 태호의 기억에는 없었던 새로운 지식들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 추론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태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절벽 아래의 좁은 땅을 걸었다. 이 곳은 마치 협곡 같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조금 걷자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빠져나오자, 저 편의 땅 끝에 시커먼 산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산의 봉우리에는 하얀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며, 가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용암 조각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젠티움이다.”
다행히 달리는 위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위치가 나쁘다고 해도 이제 유령 표범이 태호의 것이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태호는 자신의 정보창에 새로이 나타난 탭을 쳐다보았다.
[탈것 소환]
보유 중인 탈것인 ‘유령 표범’ 이 보였다. 야타는 펫으로 등록이 돼 있으니, 일단 키운 다음 생각해 볼 예정이다.
화아악!
반투명한 에너지가 일렁거리더니, 태호의 눈 앞에 유령 표범이 나타났다.
방금 전 까지와는 다르게, 이제 놈은 태호에게 복종하였기에 무덤덤한 얼굴로 나타나 고개를 숙일 뿐이다.
“역시 멋은 있네. 짜식.”
태호는 씩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탈것은 교환이 가능하다. 마치 거래품처럼 경매장에 올릴 수 있다는 말인데, 개체나 몬스터의 등급 별로 능력치나 고유 스킬이 천차만별인지라 저마다의 개성이 확실했다.
태호는 녀석의 등에 올라 탔다. 탈것으로 등록이 되어서 그런지, 목과 몸 쪽에 마치 고삐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태호는 고삐를 잡고 저 편, 아젠티움을 가리켰다.
“가 보실까!”
크르릉-!
유령 표범이 달리기 시작했다. 쇅, 쇅, 쇅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태호는 녀석의 특수스킬을 사용했다.
[귀신질주]
스킬이 발동되자, 움직임이 두 배는 빨라졌다. 파파파파팍! 하며 사방을 가르지만, 기묘할 정도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마치 고급 세단에 올라 탄 기분이었다.
[자연화]
두 번째 스킬, 자연화가 발동되자 유령표범과 태호의 몸이 완전한 은신상태로 변했다. 은신인데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정말 비싼 이유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렇게 쾌속으로 질주해 나가며, 태호는 그 기분을 즐기다 웹 사이트를 켰다.
[첫 번째 매드무비 완성작입니다.]
김택환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태호는 빙긋 웃으며 메일을 확인했다.
동영상은 총 3분 20초.
태호가 주문한 요건 중 하나였다. 매드무비는 기본적으로 짧아야 한다. 5분이 넘어가면 쉽게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인트로에서 임팩트를 준 뒤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하며 아쉬움을 남긴 채 끝내야 하는 것!
그 요건에 부합한, 아주 괜찮은 매드무비였다.
‘실력이 역시 좋은데.’
[그리고 임금 요건에 대해서인데요... 동영상 건당 발생한 수익을... 수수료 뗀 금액의 20% 정도... 어떨까요?]
그가 제안해 온 수익은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태호는 그럴 생각은 없다. 그는 매우 유능한 인재였다. 때문에,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30% 드리겠습니다. 당장은 프리랜서 계약을 하시는 쪽이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팩스로 계약서가 갈 테니, 잘 읽고 회신 부탁드릴게요.]
사전에 만들어 둔 계약서 폴더를 켜, 온라인 팩스전송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건을 마무리한 태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매드무비를 올렸다.
현재 태호의 팔로워는 110만명.
이 쯤에서 발전이 더딘 것을 보니, 예고편으로는 한계가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본편이 업로드 된다면, 그 파급력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무렵.
유령 표범이 아젠티움에 도달해 있었다.
“멈춰.”
태호는 아젠티움의 코앞에 멈춰서, 녀석의 등에서 내린 뒤 소환을 해제했다.
“세상에.”
그리고 방금 전 까지 달려온 거리를 돌아보았다. 기존이라면, 족히 수 시간 걷고 뛰어야 했을 거리가 단 몇 분 만에 해결된 것이다.
썩 만족스러워,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요리 재료로 쓰이는 짐승 고기 하나를 꺼내 유령 표범에게 주었다.
아작! 아작!
녀석이 고기를 씹어 먹을 동안 아젠티움을 올려다 본다.
크기는 태호의 소유가 된 ‘증오의 피라미드’ 와 비슷하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시커먼 땅에는 생명체가 살기는 영 글른 듯 한 기운이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태호는 천천히 아젠티움의 입구로 향했다.
‘흠.’
헌데.
묘한 일이었다. 입구 쪽에는 보통 드워프 경비병들이 있어야 할 진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기분마저 들었기에, 태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막시무스와 아르카네를 소환했다.
[나의 주군 카이저!]
막시무스는 간만에 소환된 것이 신나는지 등장하자마자 호쾌하게 떠들었다.
“쉿.”
태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막시무스는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 되자 마자 ‘사과 줄거야?’ 라고 물어보려고 했던 아르카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태호를 보다 옷깃을 툭툭 당겼다.
“응?”
태호가 소녀를 쳐다보자, 소녀는 가만히 태호를 올려다 보며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손으로 동그란 것을 만든 뒤 자신의 양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두 눈을 깜빡였다.
“......”
태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아르카네는 크게 낙심한 얼굴이 되어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아!”
그제야 대충 알아챈 태호가 인벤토리 창에서 사과 두 개를 꺼내 양 손에 하나씩 쥐어 주었다. 아르카네가 방긋 웃자, 태호도 씩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영 냄새가 이상하다.
태호는 후덥지근한 아젠티움의 바람 속에서, 묘한 피냄새를 맡았다.
과거, 엘프의 숲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적대하며, 고등 사고를 하면서도 강한 축에 속한다.
그것은 비단 엘프 뿐만은 아니다. 드워프들도 그에 못지 않다. 다만, 조금 더 탐욕스러우며 호쾌하다는 점이 특징일 터.
피 냄새가 난다?
태호 일행이 천천히, 입구로 들어섰다. 조심조심 입구를 들어 서자, 어두침침한 아젠티움의 내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거대한 동굴!
검은 머리 드워프 일족은 이 거대한 아젠티움 산의 한 켠에 거대한 땅굴을 만들어, 그 내부에 요새 같은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 켠에서는 뜨겁게 들끓는 용암이 폭포처럼 흘러 내리고 있었고, 여기 저기에는 웅장한 대장설비시설들이 가득했다.
허나, 태호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화려한 내부가 아니었다.
“뭐야... 이건.”
사방에 즐비한 것은 드워프들의 시체들이었다. 누군가가, 검은 머리 드워프 일족을 싹 쓸어 버렸다. 태호는 다급히 내부로 달려갔다.
그들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세련된 건물들과, 고급스러운 조각상들에 피가 가득 튀어 있었다.
[...처참하군.]
막시무스가 낮게 읊조리며, 아르카네를 번쩍 들어 두 눈을 가려 주었다.
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쓰러진 드워프들의 사체를 살펴 보았다.
모두가 일격에 죽었다. 마치 생명이라는 것이 모조리 사라진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태호는 어둠의 기사단을 소환해, 그들에게 말했다.
“생존자들 찾아 봐.” [분부대로.]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한 드워프를 품에 안은 채 돌아왔다.
“쿨럭!”
그 역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는 50대를 훌쩍 넘긴 노인이었는데, 심각해 보이는 자상을 여러 곳에 입은 채였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을 뒤져, ‘힐링 포션’ 하나를 꺼냈다. 그간 태호는 여러 포션들을 모아 왔는데,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데스나이트의 심장 때문이다.
리얼포스에서 ‘포션’ 의 역할은 정말 크지는 않다. 힐링 포션이 일시적 회복이 아닌, 지속적인 회복을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생명력이 100 단숨에 회복되는게 아니라 1분에 걸쳐 100이 회복된다- 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태호는 힐링포션을 그의 환부에 부은 뒤 입에도 넣어 주었다.
“크, 크으으...”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자, 조금 나아진 듯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태호는 그를 바닥에 내려 놓고, 포션을 한병 더 꺼내 그 외의 환부에 골고루 뿌려 주었다.
노인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대는...?”
“제 이름은 카이저. 인간의 대도시 노펜시아에서, 헉스 님의 친구가 되어 이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헉스! 그 녀석의 친구라고?”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의 친구는, 일족의 친구. 내 이름은 엑셀일세.”
태호는 그와 악수를 한 뒤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엑셀은 긴 한숨을 내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내,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 얼마 전... 세상이 진동하며 변화를 겪지 않았는가?”
“예.”
확장팩 가동으로 인한 지형 변화를 말하는 듯 하다.
“그 직후였네.”
“직후?”
“자신을... 신노스라고 소개한 괴물이... 이 곳에 찾아온 걸세.”
쿠구궁!
태호는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반문했다.
“신노스? 확실합니까?”
엑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리고 놈은... 뭔가를 찾는 듯 했지. 수틀렸는지... 우리 일족을 학살한 뒤 떠났다네.”
신노스.
판타로스의 5대장군 중 하나.
놈이 등장했다는 말이었다.
태호는 머리를 정리했다.
잊혀진 왕국의 최종보스는, 앙헬 바로스.
그는 왕으로서 휘하에 판타로스의 장군 셋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 자체도 확장팩의 최종보스로서 악명을 떨친 바 있었다.
헌데.
그래야 할 미래가 바뀌었다.
‘신노스가 나타났다는 말은...’
놈들의 계획 역시 바뀌었다는 말. 되짚어 보자면, 놈들이 깨어나야 할 타이밍에 깨어나지 못 했다는 말과도 같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아젠티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