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격을 갖춘 이 >
[저는 60레벨이지만, 방금 캐삭하고 가슴이 시키는 흑마법사를 하기로 했어요.]
댓글 세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귀엽고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아르카네, 그리고 찹쌀떡 같이 생긴 정령들은 인기 대폭발이었다.
[정령들 귀여워...]
[흑마법사가 악당이 아니라 천사 같네요. 리얼포스 설정 상태가?]
[간지 나고 귀엽기도 해... 이거다...]
이런 저런 의견이 나오는 와중, 동영상이 팬사이트의 메인에 곧바로 게시됐다.
[히든피스 흑마법사, 그 비밀에 뒤덮혀 있던 전직방법이 공개되었다! 더불어, 흑마법사는 어둠의 정령까지 부릴 수 있는 하이브리드 클래스?!]
며칠 사이 팬사이트는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속속, 흑마법사에 입문했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태호는 그 사이,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태호가 향하려는 곳은 에픽 아이템 ‘엘 로스의 가면’을 얻기 위한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우선순위가 아닌, 차순위에 있었다.
얻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엘로스의 가면은, ‘엘 로스의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에픽 아이템이었다. 이 던전의 특징이라면, 레벨 100 미만의 유저만 입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엘 로스의 던전 초반부는 나쁘지 않다. 경험치도 상당히 잘 주는 편이며, 몬스터도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어 레벨에 맞는 수준이었다.
허나 중반부부터 던전의 난이도는 매우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그리고 실질적으론 250~300레벨에 육박하는 유저들이나 후반부를 클리어할 수 있는 정신 나간 던전이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던전이 왜 있느냐?
그 공략법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얼포스에는 이유 없는 결과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훗날에야 밝혀진 이 던전의 비밀은, 바로 ‘축소 물약’ 에 있었다.
레벨 300대 유저가, 축소 물약을 통해 100 미만의 레벨로 일시적 강제 ‘렙따’를 한 뒤 진입해 물약의 효과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 클리어하는 식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전제조건에, ‘축소 물약’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 클래스가 등장하기 전 까진 그냥 ‘버그성 던전’ 정도로 취급되던 것이 사실이었다.
태호도 얼마 전 까지 축소 물약은 어떻게 구해야 하나, 란 생각에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지금.
태호는 기묘한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바로, 로키가 부여한 가호 중 하나 ‘속임수’ 였다.
속임수는 변신한 순간, 상대의 레벨과 스텟치도 그대로 따라해 버린다는 점이다. 태호는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노펜시아에서 마을 NPC로 변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진짜로 NPC처럼 올 스텟이 완전히 내려가 바닥을 기었던 것. 물론 장착하고 있는 에픽 아이템들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양날의 칼이겠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임수는 태호보다 강한 상대는 따라할 수 없으며, 약한 상대만이 가능했다.
아무튼.
로키의 속임수 덕에, 굳이 축소 물약을 구하지 않고도 진입할 수 있게 됐으니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속임수는 경우에 따라,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태호는 대륙 남부의 초보자 스타트 지역으로 향했다. 이 근방은, 대도시 ‘안타라스 슬램’ 과 꽤 가까운 편이다.
안타라스 슬램은 머더러들의 대도시라고 보는 편이 맞게 됐다. 대도시들 중, 유일하게 머더러 패널티가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 머더러들은 보통의 대도시로 들어갈 때,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가장 먼저 문지기 NPC들에게 선공받는 것은 당연하고, 진입해도 상인 NPC들에게 냉랭한 대접을 받는 데다 도심 안에서 늘 경비병에게 쫒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더러가 리얼포스에서 각광받는 직종 중 하나가 된 것은, 그들에게 ‘독자적 메인 퀘스트’ 가 부여되는데다 보상이 짭짤해서일 거다.
레벨업도 쉽고, 장비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사망 패널티가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기묘한 세계.’
태호의 의견은 그랬다.
머더러에게 이렇게까지 가산점을 주는 이유가 대체 뭘까? 과거에는 그냥 그럴려니 했지만, 이제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든다.
‘이 세계를 만드는 데, 판타로스 역시 큰 몫을 했기 때문에?’
균형.
균형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아무튼, 태호는 유령 표범의 등 위에 올라 타 힘차게 달려갔다.
대륙의 남동부, 엘 로스의 던전을 향해.
* * * 엘 로스의 던전.
고대의 왕 중 하나. 태호의 기억 속엔 ‘땅’ 속성의 왕국 ‘데로스’ 의 왕 ‘엘’ 의 유적지였다.
그러니까 고대 땅속성 왕국의 왕이 죽으면서 유산 하나를 숨겨 두었다는 설정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래서인지 지하로 파고드는 거대한 던전이었다.
이 곳에는 유저들이 제법 복작거리는 것이, 여태까지와는 달라서 흥미로웠다.
태호는 던전의 입구에서부터 꽤나 여러 파티를 만날 수 있었다.
“언노운이 크레이지 도그 썰어 버린 뒤에 잘 안 보이는거 보니까, 요즘 할 맛 나지 않아요?”
“맞아요. 머더러 새끼들 없어지니까 저쪽 쪼렙 던전 통제도 풀렸다고 하고...”
유저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태호에게 있어선 신선한 광경이었다.
그간은 대부분의 컨텐츠를 홀로 진행해 왔던 지라 유저들이 도란도란 떠들며 파티 사냥을 하는 게 꽤나 보기가 좋았다.
태호는 던전의 입구로 들어섰다.
엘 로스의 던전은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큰 던전이다.
구조는, 초반부는 큼직하고 긴 동굴이다.
그리고 초반부를 지나가면, 본격적으로 난이도가 뻥튀기되는 지저협곡(地底峽谷)이 시작된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무지막지한 폭탄박쥐와 거대 지네 떼가 유저를 반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지저 깊숙한 곳, 흙으로 빚은 병사들을 조우하게 된다. 그들까지 해치우고 나간다면, 최종보스 ‘엘 로스의 문지기’를 만나게 되며 문지기로부터 ‘엘 로스의 가면’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토록 길고 경악스러운 난이도를 자랑하면서도 클리어 조건이 까다로웠기에 태호는 안심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고대의 유산 중 하나.
혹시라도 문지기를 만나게 되면, 힌트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에 잔뜩 들뜬 태호가 거대한 동굴을 저벅 저벅 걸어갔다.
지금의 태호는 이미 지나가던 한 유저로 변신한 상태였다.
‘레벨이 70이라.’
변신한 상태로 레어 갑옷을 덕지 덕지 갖추어 입자, 구분을 할 수는 없게 변했다.
“몹 한 마리 끌어 올게요!”
“힐 주세요!”
여기 저기서 사냥이 한창이었다. 태호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가득하던 유저들은 점점 적어지고, 정말 소수의 유저들만 남아 사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저협곡의 입구에 도착하자 남은 유저는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받아!”
“오케이!”
다섯 유저가 일사불란하게 사냥하는 모습이 보였다. 태호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힐럼이잖아?’
니힐럼.
미래의 레이드 명문 길드로 서방의 일인자 자리에 위치할 이들이었다.
‘킹, 프로진, 야하드, 스콧, 쿼든. 다 있네.’
저들이 니힐럼의 주축멤버로서, 핵심전력 5인방이다. 태호는 미래의 영웅들의 쪼렙 시절을 보는 것이 꽤나 신기해, 가만히 지켜 보았다.
‘쟤들이 아마 엘 로스 중반부까지 깼다던가?’
던전 안에서는 100레벨이 넘어도 상관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과거의 니힐럼은 99레벨 때 던전에 진입해 최대한 레벨링을 해 가며 엘 로스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전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들은 리얼포스 이전부터 레이드 컨텐츠로 명성이 높은 그룹이었으니, 중반부까지 진행해 나간 것도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긴 했다.
태호는 씩 웃으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본격적인 지저협곡이 시작됐다!
이제 유저는 볼 수가 없어졌다.
태호는 유령표범을 소환한 뒤,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탁!
유령표범이 던전 안을 쇄도해 갔다. 지저협곡은 길었지만, 이 녀석과 함께라면 딱히 그리 길게 느껴지지도 않을 터다.
어느 순간.
끝없을 것 같던 지저협곡이 끝나고,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곳에, 흙으로 빚은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태호는 그들의 정보를 하나 하나 확인했다.
[Lv. 130]
[고대의 토병(土兵)]
레벨 130.
하지만 유저들의 체감 난이도는 대략 300레벨 급일 것이다. 태호는 놈들을 스쳐 지나가며, 토병들의 끝에 서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Lv. 200]
[정예]
[엘 로스의 문지기] 이 문지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엘 로스의 가면이다. 태호는 마치 날 듯 토병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 놈의 앞에 섰다.
[......]
문지기는 체장 5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 인간이었다. 생김새는 인간의 것과 똑같은데, 입고 있는 옷이나 무기의 풍이 옛 이집트의 것과 비슷했다.
전신은 모래로 만들어져 있다.
[이 성스러운 유적의 끝에 도달한 이가 있는가.]
그가 말을 할 때에도, 전신에서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태호는 빤히 그를 올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엘 로스의 가면을 가지러 왔다.”
[너는... 우리의 왕국 데로스의 주민이 아니다. 합당한 자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내어줄 수 없다.]
놈의 목소리에서 태호는 기묘한 것을 느꼈다.
‘자격을 제시하면 내어줄 수도 있다는 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거에도 이런 류의 대사가 오고갔던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엘 로스의 가면’ 은 당대의 땅 마법사, 아서의 손에 들어간다. 리얼포스가 오픈하고 5년이 훌쩍 지난 즈음의 이야기였다.
‘이런 식이었나?’
태호는 그를 올려다 보며 반문했다.
“증거라면 어떤 종류의 증거를 말 하는 거냐?”
[......]
그 말에 묵묵부답.
태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데 로스는 땅 속성의 마법을 숭배하던 고대의 왕국. 땅 속성의 신은 ‘가이아’ 라는 여신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법은 태호도 아직은 모른다.
아, 잠깐만.
태호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아 님의 보물 정도면 되겠냐?”
[우리아... 님?]
문지기는 우묵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땅의 여신 가이아 님의... 친우인 우리아 님이시라면... 합당하다.]
이건 약간 의외의 결과였다.
[또한 너는... 이 유적의 그 어떠한 것도 죽이지 않았으며, 훼손하지 않았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아무래도 이런 대화법으로 빠지기 위한 전제조건인 듯 했다. 태호는 어차피 경험치를 못 받고 쓸데없이 강하기만 한 녀석들을 상대하는게 귀찮았을 뿐이지만.
‘잘 됐군.’
우선.
인벤토리 창에서 ‘맹렬한 지진’ 마법서를 꺼내들었다.
“자! 봐라!”
이는 우리아에게서 받은 에픽 마법서였다. 그 마법서를 본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자격을 인정하겠다.]
쿠구구궁!
일순간, 문지기의 몸이 요동치더니 거대한 모래 더미로 바뀌었다.
“......?”
그리고 그 모래더미가 다시 움직이며 큰 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입장을 허가한다.]
태호는 조심스럽게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지기가 만들어 낸 일종의 아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들어서자, 부조화스러운 그 공간 안에 가면 하나가 둥실 떠 있었다.
가면을 잡는다.
[아이템 : 엘 로스의 가면을 획득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어느새 눈 앞에는 자신의 크기만큼 줄어든 문지기가 서 있었다. [약속 하나를 해 다오.]
“약속?”
[가이아 님께, 그 가면을 바칠 것이라고.]
“흐응.”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그래야 할 이유는?”
[나조차 알지 못 한다. 허나, 그 가면은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제물이 되기 위함.]
이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기브 앤 테이크’를 떠올렸다.
신들에게 바쳐지기 위함이라는 속뜻을 알 길은 없지만, 가이아를 불러 내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흠... 알겠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군.”
[고맙군.]
문지기는 이내 태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약속했다, 자격을 갖춘 이여.]
“그래.”
태호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화아악!
어느 순간.
태호의 몸은 던전의 입구로 이동해 있었다.
‘제물로 바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이는 중요 사항이 될 수도 있었다. 엘 로스의 가면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니까.
‘잠깐만.’
태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고대의 여섯 왕국의 신들이 리얼포스에 제대로 등장한 적이 있었나?’
아니었다.
볼카노스는 판타로스와의 일전에서 힘을 대부분 소진해 흑마법사 후손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다른 다섯 왕국의 속성들은 각기 불, 물, 바람, 땅, 빛.
그중 물의 여신 에테리얼 정도가 등장해 유저들과의 소통을 했지, 그 외에는 이름 한 번 제대로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 쪽도 한번 알아 봐야겠군.’
이런 정도로 생각을 마치던 그 무렵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 근방이 꽤나 부산스러웠다.
이 곳은 던전의 입구에서 조금 진입해 들어 온 동굴 부분. 사방에서 사냥에 여념이 없던 유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어 농성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막아! 힐 주세요! 아 시파, 재수 옴 붙었네!
-크레이지 도그 없어지니까 뱀파이어즈 새끼들이 와서 지랄이야!
태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유저들 너머 저 편에서 들이닥치고 있는 시뻘건 유저들을 주시했다.
‘뱀파이어즈.’
리얼포스의 3대 대형 머더러 길드 중 하나, 뱀파이어즈였다.
< 자격을 갖춘 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