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의 추적자 >
태호는 아젠티움을 벗어나, 야트막한 산 정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까지 볼카노스와 나눈 대화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 * *
[나의 계시를, 모든 추종자들에게 내리라- 이 말인 것이지?]
계시를 내린다.
즉, 흑마법사로 전직한 유저들에게 퀘스트를 부여해 달라는 말이었다.
“예.”
[이유는?]
볼카노스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혼돈의 힘’ 이 언급된 그 순간부터, 볼카노스는 뭔가 감정의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죽음의 땅은 혼돈의 기운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겁니다. 그것을 중화시킨다면, 대륙에 가득 퍼지는 혼돈의 기운을 억제하는 데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태호의 말에 볼카노스가 묘한 얼굴을 했다.
[대단한 일이군. 뜻대로만 된다면, 그 어떤 방법보다 효과적이겠구나. 흐음...]
볼카노스는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있다. 허나,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것까지 걸 가치가 있는가?]
“절 한번 믿어 보시죠. 일이 제대로 성사된다면, 볼카노스 님의 신력은 더욱 빠르게 회복되실 겁니다.”
[......알았다.]
볼카노스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 태호란 존재는 불가사의의 영역에 있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 같지가 않았다.
마치, 신의 영역에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신들조차 어려워하는 일들을 단숨에 척척 해 내는 것이 말이다.
“아, 마지막으로.”
태호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인벤토리 창에서 꺼낸 것은, 구체의 형태를 갖춘 물건이었다. 본래 이것은 로키나, 다른 신들과 교환할 아이템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허나 이쯤 되면 볼카노스 쪽에 거는 것이 가장 괜찮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이건...]
볼카노스가 말을 흐렸다.
그렇다. 바로, 태호가 로만제국의 메인 퀘스트를 완전히 훼방놓으며 얻어 낸 ‘공허의 혼돈’ 이었다. 상하좌우의 퍼즐을 모조리 빼앗아 만든 바 있었다.
“공허의 혼돈이라고 불리더군요. 이 물건에 대해 아십니까?”
[......알다마다.]
볼카노스는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물건은, 혼돈의 주인이 만들어 낸 보구 중 하나. 허나, 다른 보구들과는 다르다. 격이 한 등급 높다고 해야 할까... 사용하는 즉시 강력한 혼돈의 힘의 일부를 부여받을 수 있지. 그것은... 판타로스의 가호 중 하나이니까. 놈의 보구중에서도 가호를 직접 부여하는 것
들은 매우 드물다.]
‘역시나.’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착용 시 귀속이라는 제한은, 보통 리얼포스의 세계에서는 ‘사기급’ 아이템을 뜻한다. 판타로스가 만든 혼돈의 에픽 아이템들보다 상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개수가 많지 않다, 그리고 놀라는 저 반응에서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질러 보자.
“저는 이것을 볼카노스 님께 제물로 바치고자 합니다.”
[......뭐라?]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저는 볼카노스님의 하수인. 이 정도를 바치는 것은 제 신앙심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다만?]
“저는 혼돈의 힘을 격파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볼카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건 제법 난감하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모로 생각을 해 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가진 물건 중 이것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 물건은 없다.]
태호는 물건을 한번 보여 달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멈칫 한 뒤, 눈을 가늘게 떴다. 굳이 물건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술 중엔 있으시단 말이군요?”
[그렇단다.]
볼카노스는 팔짱을 낀 채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과거 혼돈의 주인과 직접 맞붙은 적이 있었지.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기술이 있음이다. 흐음... 나는 네게 이 기술을 하사하겠다.]
“무슨 능력입니까?”
[혼돈의 권좌에서 나타나는 놈의 하수인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힘이다.]
“......”
태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그 힘은 세상 그 누구보다 태호에게 필요한 힘이었다. 말인 즉, 혼돈의 권좌에서 등장한 장군이나 대장군을 감지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 기술이라면 물건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거래에 응할 테냐?]
조금 생각해 봐도, 태호에겐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대륙 각지를 떠도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여태까지는 우연의 일치나, 메인 퀘스트 중의 마주침으로 장군들과 마주쳤다.
허나, 앞으로도 그런 요행이 계속돼 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에픽 아이템?
모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어디서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받아들이죠.”
볼카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호에게 손을 뻗었다.
샤아아악!
시커먼 기운이 태호에게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패시브 스킬 : ‘어둠의 추적자’ 를 획득했습니다.]
이로서 볼카노스에게는 당초에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캐낼 수 있었다.
“아, 혹시 가이아 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가이아라... 그리운 이름이군. 얼굴을 못 본지가 꽤 오래 돼서 말이야.]
볼카노스는 다른 신들과 교류가 거의 없기로 유명했으니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라면 내 마지막 기억에... 크롬혼 마운틴의 정상에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크롬혼 마운틴.
태호는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였어?’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친다면 뒷산 정도의 느낌인 산이었다. 마침 아젠티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태호는 그 외에도 이것 저것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볼카노스는 태호에게 꽤나 깊은 신뢰를 갖게 됐는지, 그다지 거리낌 없이 이것 저것 대답해 주었다.
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판타로스’ 와의 전투에서 힘을 모조리 상실하게 된 이유였다.
[역사는 반복되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무수히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결과만 도출될 뿐이다.]
볼카노스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어조로 읊조렸다.
[배경이 바뀐들, 무슨 소용이리. 진리에 근접한 결과는 참담할 뿐이로니. 무의미한 희생과, 파괴된 세계들을 보며 느낀 것이 없는 윗선에 지친 것이다. 굳이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다음에, 내가 너를 찾겠다.]
볼카노스는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 * * 그리고 이 곳이 크롬혼 마운틴.
허나 이 곳에 이미 가이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볼카노스의 기억은 대격변 이전일 테니, 정확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지도.
약간 맥이 풀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태호는 볼카노스와의 대면을 통해, 두 가지의 패시브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바로, 볼카노스의 가호.
[패시브 스킬 : 볼카노스의 가호]
[설명 : 어둠의 신 볼카노스의 마음에 들어 그의 권능을 하나 부여받았다.]
[모든 어둠 속성 마법의 성능이 2배 상승한다.]
“......”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싶었다. 이는 태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선지자의 해골’ 과 같은 옵션이었다. 아니, 심지어 그보다 더 좋았다.
선지자의 해골에는 패널티가 붙어 있었는데 여긴 패널티조차 없다.
‘아.’
스킬 설명을 읽어 보니, 대강 감이 왔다. 보통은 ‘권능을 아주 조금’ 받았다는 말로 돼 있는 설명이, ‘하나 부여받았다’ 라는 말로 끝나 있다.
‘아예 권능 하나를 부여해준 셈이구나.’
아무래도 자신의 힘을 되돌려주는 보상으로 크게 선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그럼 대체 이게 몇 배야?’
선지자의 해골이 마법성능 두배.
볼카노스의 가호가 마법성능 두배.
어둠의 계약이 30%, 어둠 강화가 30%.
에픽콜렉트는 추가대미지 50%.
게다가 이번에는 중독이 2배로 강해졌다.
‘몇 배수는 그냥 뛰어넘어 버리는구나.’
그야말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일이었다.
태호가 엘 로스의 던전에서 썰어버린 머더러는 총 25명. 하지만 그들은 저레벨이었다.
지금의 태호는, 족히 동레벨급 유저들도 25:1을 썰어 버릴 수 있었다.
우쭐한 기분이 드냐고?
전혀 아니었다.
태호는 다소 심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볼카노스의 말이 마음에 걸려.’
그는 마치, 판타로스와의 싸움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회귀자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려 봐도, 아리송한 추측일 뿐.
‘파괴된 세계들.’
세계‘들’ 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태호는 그렇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볼카노스에게 받은 두 번째 패시브 스킬을 발동시킨 뒤엔, 머뭇거릴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패시브 스킬 : 어둠의 추적자]
[설명 : 어둠의 신 볼카노스의 마음에 들어 그의 권능을 하나 부여받았다.]
[혼돈의 권좌의 기운을 탐지하며, 추적할 수 있다.]
이 역시 볼카노스의 ‘권능’ 이었다.
어둠의 추적자를 발동시키자, 리얼포스의 월드맵이 눈 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맵에, 회색 점들이 보였다.
‘점은 총 세 개.’
그중 하나는 유독 컸다. 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두 개의 점은 새끼손톱만 했는데, 큰 점은 엄지손톱보다 훨씬 크게 표기돼 있었다.
‘이게 신노스구나.’
대장군 신노스!
이것이 대장군과 장군급의 격차라는 말인가?
새삼 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이 됐다.
다른 유저들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태호에게 있어선 최고의 능력이었다.
균형의 수호자로 장군들을 사냥해야 한다. 신노스는 아무래도 뒤로 미루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아직 비벼볼 만 한 단계가 아니야.’
우선은, 새끼손톱만 한 두 놈부터 조질 생각이다. 샤반타와 데샹을 떠올리면, 지금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자, 우선.
태호는 맵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회색 점을 찾았다.
‘노펜시아?’
기묘한 일이다.
회색 점 하나는, 노펜시아에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 .
.
.
.
.
노펜시아.
노펜시아의 밤은 화려하다. 태호는 오색 찬란한 밤거리를 즐기는 유저들 틈에 서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웹사이트를 켜 정보를 확인했다.
[정화의 샘 퀘스트 파티 모집!]
[언노운 매드무비 10번째 정주행중~]
[님들 오늘 어세신즈랑 로만제국이랑 붙는대요. 로만이 생중계하고 난리 났음ㅋㅋㅋ]
“......”
어세신즈랑 로만제국이 붙어? 태호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혼돈의 권좌에서 튀어나온 장군이라면, 이렇게 목 좋은 곳에서 구경만 할 리가 없다. 분명히 해도 뭔가를 했을 지언대, 웹사이트는 평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뭐지?’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며, 다시금 ‘어둠의 추적자’를 발동시켰다.
월드맵의 회색 점과 태호의 위치가 겹쳐서 반짝이고 있었다. 태호는 혹시나 싶어, 맵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을 키우듯 늘리니, 늘어난다.
“......”
그대로 계속해서 확대해 보니 노펜시아의 전체 구조가 두루뭉술하게 드러났다.
‘이 쪽인가?’
태호는 서쪽으로 가닥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북적거리는 도시에는 사람 반 NPC 반이었다.
-5급 레어 팔아요!
-힐러 데려가실분! 저도 정화 퀘 한번 구경이나 해 보고 싶어요!
어느정도 걸었을까?
[권좌의 힘이 반경 50M안에 존재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반경 50미터라.
태호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저기 지나다니는 무수히 많은 유저들과, NPC들이 보였다.
‘움직이질 않는군.’
그렇다면 어딘가에 앉아 있거나, 쉬고 있다는 뜻?
태호는 사방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다가 건물 한 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험가의 쉼터]
“......”
여관이었다.
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 어둠의 추적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