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64화 (64/194)

< 당연히 뻥이지.(수정) >

여관으로 들어온 태호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노펜시아의 여관은 아주 많은데, 이 곳은 그 중에서도 작은 편이었다. 어둠의 추적자에 의하면 놈은 이 곳에 있었다.

3층 여관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던 태호는 문득 자신이 꽃밭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사방을 둘러보니, 넓고 푸르른 들판 위에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흐응...”

태호는 그 들판의 야트막한 언덕, 큰 나무 밑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대충 어떤 종류의 놈인지 알 것 같아서, 태호는 나무 밑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맴- 맴- 맴-

어느 순간.

태호의 옆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태호를 바라보다가, 방긋 아주 아름답게 웃으며 물었다.

“차 한잔 할래요?”

“......”

태호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고풍스러운 찻잔에 주전자를 따라 내밀었다. 태호는 찻잔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복장이 야시시해져 있었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가슴으로 손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촉감이 제법 리얼해, 태호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마음 편히 먹고... 잠깐만 몸을 내게 맡겨요...”

그녀가 몽롱한 목소리로 태호에게 속삭이던 그 무렵이었다.

콱!

태호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녀석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섯 대장군 중 하나, 환각의 케노스의 부하인 릴리트였다. 케노스는 환각을 제외하고도 전투력이 막강한 편이었으나, 릴리트는 딱 환각능력의 일부만을 가진 장군이었다.

그렇다.

몽마, 서큐버스라고도 불리는 종류다.

이 환각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매우 강력하고, 또 NPC나 유저들을 홀려 힘을 키워가는 류라고 보면 편할 것이다.

‘이년도 나왔군. 순서가 아주 뒤죽박죽이야.’

여섯 번째 확장팩, 환각의 케노스에 등장했어야 할 릴리트가 벌써 나와 있다.

“엑!”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뜰 무렵, 태호가 천천히 일어났다. 릴리트의 환각에서 깨어나려면, 이 환각진을 깨야 한다. 태호는 아름다운 릴리트의 명치를 걷어 찬 뒤, 눈을 감았다.

뒤로 두 걸음, 앞으로 한 걸음,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 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인벤토리 창에서 단검을 꺼내, 양쪽 엄지 손가락을 쿡! 찔렀다.

환각 속에선 마치 현실처럼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핏물로, 양쪽 바닥에 작은 십자가를 그었다.

화아악!

어느새.

사방은 평범한 여관2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경악한 얼굴의 릴리트가 서 있었다.

“어, 어,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환각진의 파훼법을 아는 것에 놀란 듯, 이를 딱딱 맞부딪히고 있었다.

태호 역시 그런 릴리트를 보며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너... 왜 할머니가 됐냐?”

그녀는 지금 족히 백 세는 돼 보일 법 한 노인이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자, 릴리트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이, 이런 젠장!”

릴리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신체능력이 비정상적으로 낮아 보였다.

전성기 때의 릴리트는 20대의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유의 강력한 환각 능력으로, 유저들의 이목을 빼앗으며 요사스러움과 색기를 뿜어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태호는 직감적으로 ‘혼돈의 권좌’ 라고 불리우는 것에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릴리트는 후다닥 여관을 내려가려다, 태호에게 목덜미를 딱 붙잡혔다.

“이익!”

반항하려 했지만 신체능력 자체가 거의 NPC 수준이었다. 태호는 릴리트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계단을 올라와 2층의 방 하나에 들어갔다.

콰당!

릴리트가 바닥에 쳐박혀 꿈지럭거리다 일어섰다. 막 달려들려 할 때, 태호는 지팡이를 릴리트의 미간에 겨누었다.

‘중독.’

지금의 태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중독 대미지의 향상이 있었다. 중독을 걸자, 그녀는 꽤액! 소리질렀다.

“끄아아아악!”

생명력이 무시무시하게 소진돼 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머리 위에 해골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내 말을 듣지 않을 시, 너는 바로 죽는다.”

“주, 주, 죽여라! 죽여! 하하하!”

릴리트가 신랄하게 웃으며 오히려 형세가 역전된 것 마냥 의기양양해졌다.

“어차피 혼돈의 권좌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 “흐응, 그렇긴 하지.”

태호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릴리트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듯 몸을 흠칫! 하고 떨었다.

“어? 이, 이, 이상하다.”

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릴리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며 이를 딱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시곗바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속도는, 현실의 초침이 돌아가는 속도와 비슷했지만 그 자체가 그녀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 이건... 수, 수호자의 힘인데?”

“그래. 수호자의 힘이다. 그게 뭔지 알지?”

“어, 어어...... 이런 제기랄!”

그녀가 빼액 소리질렀다.

“빌어처먹을! 수호자들은 다 뒈졌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지?”

태호는 싸늘한 눈으로 지팡이를 그녀의 미간에 꾹 누르며 읊조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이 대답한다. 거짓을 고할 시, 너는 혼돈의 권좌로 절대 돌아가지도 못 할 거야.”

“......”

“영원한 죽음을 맞고 싶다면,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사, 사, 사, 살려줘! 살려줘!”

“한번만 더 목청 키우면 곧바로 보내 주마.”

“흡!”

릴리트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효과는 직빵이군.’

영원한 죽음.

태호는 판타로스의 수하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잠잠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돈의 권좌에 이상이 생겼군. 너희들이 왜 지금 시기에 튀어나와 있는 거지?”

릴리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우, 운명의 굴레가 뒤틀렸으니까!”

운명의 굴레라.

“왜?”

“그, 그걸 우리가 알아? 세, 세, 세계의 균형이... 기, 기묘하게 유지가 되고, 파, 파괴도 되고 있는걸! 그, 그, 그래서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나도... 재, 재수없게 권좌에서 튕겨져 나왔을 뿐인데!”

“흐응.”

요컨대.

운명의 굴레란 것이 뒤틀린 여파로, 기존에 등장할 타이밍이 있었던 놈들이 더 빠르게 등장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놈들은 태호의 예상대로, 그 때문에 본래 등장해야 했을 때 보다 압도적으로 약했다.

눈 앞의 릴리트만 봐도 그렇다. 본래의 그녀는 최종보스급은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일개 레이드 보스급은 됐다.

허나 지금. 거의 맥을 못 추는 수준으로 격하된 수준이었던 것이다.

“지금 권좌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놈들은 총 몇 놈이지?”

“나, 나 혼자다!”

태호가 씩 웃었다.

“명을 재촉하는군. 신노스가 나와있는걸 이미 알고 있어.”

“......”

“그리고 샤반타와 데샹도. 걔들은 내 손에 이미 골로 갔으니까, 너도 걔들 따라 가야겠다 이제.”

태호는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션을 취했다. 그러자, 그녀가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말할게! 거짓말 안 할게!”

“마지막 기회다. 나는 대부분의 사실을 알고 있고, 사실확인 차 묻는 거야. 개소릴 한번만 더 지껄이면 바로 죽는다.”

“응! 응! 신노스 님, 그리고 키탄카가 나와 있어! 네, 네 말 대로 샤반타와 데샹도 먼저 튕겨나왔다가 소멸했지!”

“대격변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천계와 우리의 싸움이 있었지!”

“판타로스는 잠들어 있었잖아?”

“응! 깨어나시기 직전이었지... 완전히 깨어나시기 전에, 천계에서 치러 왔거든.”

결국 대격변은 천계와 혼돈의 권좌와의 싸움으로 일어난 대재앙이었던 것이다.

태호는 다른 것을 물었다.

“태고적에는?”

“그땐 나도 태어나기 전이라 그냥 신노스 님께 들어서만 알아. 태고적에 수호자들이 우리 동지들을 엄청나게... 많이 죽여서... 결국 다섯 대장군님들과 판타로스님만 살아 남으셨다고...”

결국 태고적의 전쟁으로 수호자들은 맥이 끊겼고, 판타로스는 혼돈의 권좌로 숨어들어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는 말이다.

“......”

“그 뒤로 대격변 전까지는 천계랑 우리도 지상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대. 서로 피해가 엄청 막심해서. 나는...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났지.”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혼돈의 권좌에서 앞으로도 계속 네 친구들이 튀어 나오겠지?”

“......”

릴리트는 겁 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나도 몰라. 나, 나도 나오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니까.”

즉, 리얼포스의 지상에 불시착했다는 말이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회귀한 자신 때문에? 혹은, 자신을 회귀시켜 준 그 여자 때문에?

“신노스는 지금 뭘 찾아다니는거야?”

태호의 물음에, 그녀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말했다. “......파, 판타로스님이 남기신... 호, 혼돈의 유산들을... 수집하시려고... 하는데...?”

“힘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렇구나? 원래 나와야 할 때가 아닌데 나와져 버렸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그 외에 이것 저것 물어보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이 약간 미심쩍었다.

그 이질감. 정체는 바로, ‘프로그래밍 된’ 대답 같다는 말이었다. 마치 책을 보고 정보를 머릿속에 주입해 놓은 것 같은 대답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치 ‘대격변이 여러 번 이어져 왔다’ 라는 이야기를 했던 증오의 기사 디트로히의 말. 그리고 우리아나, 볼카노스의 말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배기는 신노스구나.’

태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놈들은 일종의 일개미다.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시사항이 새겨진 일개미들. 진실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장군급이 돼야 그 당시의 정보를 알 수 있으리라.

“지금의 신노스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보, 본신의 힘보다... 1/10 정도밖에 안 되시지.”

“입수한 유산은 몇 개나 되는데?”

“아직... 없어.”

없다?

“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를 찾고 계신데... 난항을 겪고 있으니까...?”

태호는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공허의 혼돈을 찾는구나?”

히끅!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이.

“어, 어떻게 알아?”

“그건 어차피 모험가가 착용해 버리면 그만인데, 찾아서 뭐 하려고 그런대?”

“아, 아무리 모험가의 손에 들어가도 혼돈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그런 식이구나.

태호는 머더러들이 가진 메인퀘스트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다. 놈들은 메인퀘스트의 흐름으로, 판타로스의 유산들을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향후 깨어날 대장군들의 힘이 될 것이다.

물론 공허의 혼돈을 찾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건 태호가 이미 볼카노스에게 제물로 바쳐 버렸다.

과거에는 없었던 판타로스의 메인퀘스트가 왜 생겼는지 알았다.

변화!

운명의 굴레라 불리우는 그것의 변동으로, 지상에 준비가 안 된 권좌의 힘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던 것!

그나저나, 지금의 신노스가 본신의 힘의 1/10 정도라면, 비벼볼 만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태호가 이제 씩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 사, 살려 줄 거지?”

태호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중독을 재차 건 뒤, 폭사를 읊조렸다.

쾅!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시곗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이, 이, 이런 개자식! 살려준다고 했잖아!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

그녀가 악귀라도 들린 듯 발광하며 비명을 질렀다. 태호는 그런 그녀가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시곗바늘과 함께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뻥이지.”

미안하지만 혼돈의 힘에게 베풀 자비는 쌀 한 톨 만큼도 없다.

< 당연히 뻥이지.(수정)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