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백의 시계탑 >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이제는 세 번째 보는 양팔저울이 불쑥! 튀어나와, 좌우로 흔들리다가 평행을 되찾았다.
[장군(3/25)]
[앞으로 ‘2’ 의 균형 파괴자를 사냥하면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태호의 눈 앞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어쩐지 무덤덤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던 태호는 이어지는 메시지들을 바라보았다.
[균형 파괴자들을 일정량 이상 사냥하면, 현재 권좌에서 빠져나온 대장군들의 혼돈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단서같은 것이 주어졌다.
즉, 장군급을 사냥하면 현재 나와 있는 대장군이 가진 혼돈의 힘이 억제된다는 뜻.
마음에 든다. 점점 더 리얼포스를 플레이할수록 희망이 커지고 있었다.
과거, 이런 힘을 쥔 수호자들과 천계의 신들의 공세를 막아낸 판타로스가 새삼 소름끼쳤다. 놈과 놈의 대장군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자랑했으리라.
막상 회귀를 한 시점에서도 사실 눈 앞은 막막할 따름이었다. 솔직히 판타로스는 괴물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 태호를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의 합공 정도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막상 회귀 후 ‘에픽’을 대량으로 모아 완성형 흑마법사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가능성조차 없을 거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져.’
이는 좋은 징조였다.
어떻게 한다?
어둠의 추적자를 다시 발동시켜, 확인한다. 대장군인 큰 점은 신노스, 장군인 작은 점은 키탄카다. 둘 다 태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두 점이 한 곳에 뭉쳐 있었다. 릴리트에게 물어 보았을 때를 떠올려 본다.
-원랜 있었지! 하, 하지만 지금은 없어! 그, 그, 그 외에도 많은 힘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 하고 있어. 그래서 나도 여기서 힘을 비축하려는 거고!
즉.
놈들은 생각보다 일찍 혼돈의 권좌에서 튕겨져 나와, 많은 기능들을 소실한 상태. 치려면 하루라도 빨리 치는 쪽이 좋다.
다만, 당장은 힘들 듯 했다. 키탄카가 신노스와 함께 있는 한 지금 쳐들어 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자살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놈들은 현재 태호가 놈들의 위치를 알고, 그 곳으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상태. 그러니 한번 실패한다면, 더욱 똘똘 뭉쳐 각개격파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략법은 일단 조금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가지 플랜이 세워지고 있었다.
개중 가장 합리적인 것은, 유저들을 이용하는 것. 태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이런 저런 변수들을 고려하며 계획을 세워 나갔다.
* * *
“흠.”
현실로 돌아온 태호는 몸의 컨디션이 더욱 좋아졌음을 깨달았다.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이 된 것은, 시력이었다.
“......”
태호의 시력은 애초에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쁜 편도 아니었지만. 가상현실 세계에 시력 보정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현실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괴리감이 시력이었던 것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세상에.”
시력이 아주 좋아졌다. 마치 가상현실에서 온전한 시력 보정을 받은 것처럼!
머리는 18시간의 가상현실 플레이를 즐겼음에도 매우 맑고 깨끗했으며, 육체의 피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흐음...”
태호는 그 자리에 앉아, 육체적으로 미묘한 변화들이 생길 때 마다 게임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의외로 간단히 알 수 있었다.
‘장군들을 해치웠을 때군.’
즉.
놈들을 사냥한 다음에는 현실의 신체에 미묘한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악영향이라기보단, 지극히 좋은 쪽이었다.
태호는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이미 어떤 일이 벌어져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자신에게만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죽어라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거냐.”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며 일어섰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이란 것은 하루 6시간 정도.
의도가 어찌됐든, 지금 당장은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태호는 충분히 열심히 해 왔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뭔가를 해 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로 인한 충분한 보상들이 성취감과 고양감을 동시에 부여해주고 있었다. 집을 나선 태호는 간만에 느끼는 아침의 햇살을 만끽했다.
세상은 어느덧 12월 중순.
사방에는 크리스마스 캐롤 송이 울려 퍼지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막상 밖을 나섰지만,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과거의 태호에겐 리얼포스의 세계가 현실이나 다름없었다. 가상현실의 부와 명예는, 현실의 부와 명예로 이어졌다. 자연히 카이저가 강해질수록, 태호의 몸은 부실해져 갔다.
덕분에 나중에는 제법 잔병치레로 고생을 한 적도 있었다. 태호는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간만에 달려 볼까.
천천히 거리에서 달리기 시작한 태호는, 자신의 육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을 새삼 느꼈다. 인적 많은 거리를 나선 태호는 점점 더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체력이 아주 좋다. 달리기 속도는, 평소보다 두 배를 내도 전혀 지침이 없었다.
과거, 파괴되었던 세상은 평온하게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한강공원을 넘어 여의도, 63빌딩이 저 멀리에 보일 무렵이었다.
태호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선 곳은, 아주 낯익고 처참한 기억을 남긴 곳이었다.
“후...”
이 곳에서, 태호는 판타로스에게 죽었다. 지나칠정도로 평범하고, 잔디가 무성히 깔린 이 곳. 동료들이 죽었으며, 지구는 멸망에 근접해 있었다.
판타로스는 아주 많이 강했다. 저 멀리 보이는 육삼빌딩이 놈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브레스에, 여의도가 한방에 날아갔다.
그리고... 태호는 여신의 도움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아?”
태호는 그 곳에 서 있는 시계탑을 보곤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
본래 이 곳에는 시계탑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곳에는 순백의 시계탑 하나가 서 있었던 것이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다. 약 3미터 정도의 높이, 그리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시계탑이었다.
째깍-
째깍-
태호는 그 곳에서, 익숙한 시곗바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들은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여신!’
그 이름 모를 여신.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시계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화아아악!
일순간,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 세상이 바뀌더니 영상 하나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직- 지지직-
질 나쁜 필름 영화의 시작처럼, 세상에 노이즈가 가득했다가 일순간 두 사람이 나타났다.
사방은 각종 시계들이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째깍- 째깍- 울려 퍼지는 소리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기분 좋은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 곳은 거대한 건물의 내부였다. 그 안에, 화사한 외모를 가진 여자와 한 남자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그 권능을 사용해 버리겠다고?
남자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흐음... 난 그렇게 추천하진 않는데. 이번 차원도 별 가망은 없어. 운명의 흐름대로 돼 버릴 거라고.
-아뇨. 더 이상은 무의미한 희생을 늘리고 싶지 않아요. 그것을 지켜 볼 수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남자를 보며 덧붙였다.
-제가 지켜 본 이들 중, 가장 뛰어났던 인간이 있어요.
-그에게 걸어 보시겠다?
-제겐 그가 남은 희망이에요. 더 이상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며 세계의 맹약으로 만들어진 그 세상을 퍼트리는 것은... 죄악이에요. 그들이 무슨 죄가 있죠?
-우리라고 죄가 있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남자는 대체적으로 냉소에 차 있었고, 여자는 인간친화적이라는 것이 확 와닿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하지만 태호는 그 대화과정에서 익숙한 단어의 나열을 찾을 수 있었다.
‘......’
-아우슈리네. 그 권능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일족의 마지막 힘을 사용하는 것. 너는 아마 많은 힘을 소실하고, 긴 회복기를 거쳐야 하겠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얘기야?
-......
그녀는 가만히 남자를 보다, 방긋 웃었다.
-네.
-그래, 그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남자는 고개를 까닥였다. 어쩐지 씁쓸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천천히 뇌까렸다.
-이 지독한 짓거리, 나도 신물이 나. 천계의 윗선들은 이미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가만히 놔 두면, 끝없는 희생의 반복일 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요.
손을 뻗자, 허공에 큰 원이 만들어졌다. 태호는 그 원 속으로 보이는 세상을 보며 경악했다.
‘지구!’
서울의 한복판, 판타로스와 마지막 항전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태호는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두 눈을 부릅떴다. 단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다시 만나자고.
남자가 씁쓸하게 중얼거리고, 장면이 바뀐다. 판타로스에게 태호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태호를 품에 끌어안고 회귀시키고 있었다. 태호가 사라진 뒤, 그녀는 지상에 내려앉았다.
[크르르... 기어코... 권능을... 사용했는가...]
판타로스의 끔찍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이제 이 지구는 끝장이었다. 마지막 인간들마저 소멸해 버렸으니까.
그녀는 자리에 서서, 가만히 판타로스를 바라 볼 뿐이었다.
[수호자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 아우슈리네여...]
그가 문득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을 수 없는... 공포가...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라...]
이내 세상이 뒤바뀌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파괴되었던 땅과 사람들이 돌아오고, 판타로스가 튀어나왔던 장면이 정 반대로 이어져 갔다.
지나치게 빠른 되감기를 보는 느낌. 그 한가운데에 선 태호는, 어느새 현 시점까지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하나의 빛을 남긴 뒤 사라졌다. 그리고 빛은, 시계탑이 되었다.
화아악!
태호는 시계탑에서 한 걸음 물러 서, 현실의 공기를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맙소사.”
태호는 자신이 본 기억들이, 아우슈리네라고 불리던 ‘여신’ 이 남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로, 자신에게 남기는 일종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태호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리얼포스는 지구에만 있었던 게 아니구나!’
그들은 각 차원을 돌아다니며, 리얼포스란 가상현실을 제공했었던 것이다. 목적? 그것은 분명히, 최후의 보스인 판타로스를 해치우게 만들기 위함.
굳이 그들이 직접 하지 않는 이유는?
‘세계의 맹약 때문이야.’
맹약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리얼포스 내에서 신들은 유저들에게 간접적 도움을 줄 뿐이다. 절대 직접 나서는 일이 없다. 애초에 그들이 지상에 만들어낼 수 있는, 맹약에 위반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할 뿐!
그리고 리얼포스의 세계는, 그 ‘맹약’ 으로 만들어진 독특하고도 독립된 세계이다.
대화를 대강 유추해 보았을 때, 여지껏 들었던 다른 이들의 말까지 종합하자면 이런 결론이 나왔다.
‘리얼포스는 최종확장팩, 멸망한 세계를 기점으로 판타로스가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그렇게 멸망한 세계는 실패한 것이다. 판타로스는 추측상, 어떤 것을 해결해 내야만 리얼포스의 세계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파괴하더라도, 판타로스는 강제로 리얼포스로 돌아가게 되고 놈들은 그 리얼포스라는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다시 서비스한다.’
태호는 여러 가지 기억들을 정리해 머리에 차곡차곡 쌓으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시팔, 이러니까 게임사가 정체불명이지.’
적어도 인간의 힘을 벗어난 리얼포스라는 게임이 서비스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가.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았지만 정보의 고갈은 해소가 돼 가고 있었다.
‘아우슈리네.’
태호는 그 이름을 머리에 새겼다. 게임 상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보아야 할 것은 그 이름이었다. 막연한 이미지가 아닌, 정확한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은 큰 성과다.
그리고.
태호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그는 대체 누구지?’
다시금 시계탑을 올려다 본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 마냥, 그것을 투과하여 걷는 이들도 있었다.
“하아...”
태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드러 누워 버렸다.
< 순백의 시계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