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66화 (66/194)

< 이젠 은신도 써? >

화려한 도시를 천천히 걸어 돌아오는 태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정보의 고갈에서 갈증을 느꼈을 때 보다, 어마어마한 것들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조금 더 큰 느낌이다.

하지만 태호는 그 정보들을 정리한 뒤, 당장 중요한 몇 가지를 추려냈다.

‘신들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겠어.’

그것은 예전부터 해 오던 생각이었다. 신들이 내미는 조건들은, 대부분 본인 편의를 위한 것들이었다. 즉, 리얼포스는 신들에게 ‘반복되는 세계’ 이면서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었다.

비밀들을 알아내는 것은, 지금 당장은 무리다. 다만, 신들을 철저히 이용해야겠다는 다짐이 새삼 들었다.

‘하지만.’

그 신들 중에도, 묘할 정도로 인간에게 친화적인 신들이 존재한다. 그간 만나 본 중엔, 볼카노스와 로키 정도이다.

그들에게는 약간의 신뢰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지 아직 태호는 모른다.

하지만 명확한 점.

공허의 혼돈을 볼카노스에게 제물로 바친 뒤, 신노스는 그것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 했다. 즉, 그것은 신노스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볼카노스가 중얼거렸던 수수께끼의 말이 여신과 남자의 대화와 거의 흡사했다.

‘우선은, 잠정적 아군은 볼카노스와 로키 정도... 그 중에서도 볼카노스.’

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도착했다. 그토록 긴 거리를 달리고 신체를 가혹하게 움직였는데도, 피곤함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샤워를 한 뒤, 자신의 소파에 편히 앉아 가만히 집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아무리 피곤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 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

.

.

.

.

키탄카는 계속해서 신노스와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 위치는.’

태호는 그 위치를 살펴 보았다. 놈들이 함께 반짝이고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대륙 정 중앙, 잊혀진 왕국 ‘울크랜드’ 가 솟아오른 곳이었다.

‘여기 쳐박혀 있으면 곤란한데.’

그곳으로 쳐들어 가는 메인 퀘스트가 물론 있다. 바로, ‘잊혀진 왕국, 심연의 궁전’ 이었다. 이는 막시무스가 펫이 되며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자 했던 퀘스트였다.

허나 지금 당장은 시기상조다. 들어가는건 미친 짓이었다.

별 수 없이 머더러를 조져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머더러는 이 시점에도 메인 퀘스트를 위해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머더러를 찾는 법은 간단하다.

태호는 씩 웃으며 팬사이트의 ‘사건사고 게시판’ 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머더러의 악행을 고발하고, 서로 욕하고 싸우는 난장판이 매일 벌어지고 있었다.

[하, 흑마 형님들! 정화의 샘에 크레이지독 새끼들 돌아왔음! 도와주실분들 빨리 와 주세요!]

개 중, 이번 흑마법사들의 ‘메인 퀘스트’ 일과의 하나인 정화의 샘에 머더러들이 등장했다는 게시글이 있었다.

태호는 망설임 없이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현재 태호는 군자의 지팡이의 스택을 쌓기 위해서라도, 머더러 사냥이 필요했다.

[사용자가 사냥한 몬스터 1당 1의 마법 공격력이 상승합니다.(500/500)]

[사용자가 사냥한 인간 1당 1의 마법 공격력이 상승합니다.(140/500)]

군자의 지팡이 스택은 현재 이런 상황이었다.

기본 마법 공격력을 1000 올려 주고, 사용자 1레벨당 10의 마법 공격력을 추가로 올려 준다. 그러니, 현재 군자의 지팡이가 가져오는 기본 마법 공격력은 4240.

살인적인 마법 공격력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더 올라갈 것이다.

* * *

[망 잘 보고 있지?]

[오케이! 이쪽 이상 무!]

정화의 샘을 덮친 크레이지도그의 머더러들이 길드채팅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있었다.

[이쪽 샘 오는 길목은 거기 뿐이니까, 진짜 잘 지켜야 한다? 언노운 그 개새끼 코빼기라도 보이면 일단 내빼자고!]

크레이지 도그, 부길드마스터 란마의 말에 길드원들이 하나씩 대답했다.

[네! 아 그나저나 부길마님, 로만제국 애들 메인퀘 아작나서 멘탈 터졌다던데 우린 괜찮겠죠?] [몰라 시팔, 언노운 개새끼한테 걸리지만 않으면 돼. 거긴 로만 병신새끼가 대놓고 방송으로 다 보여주는데 진작에 당했어도 싸지.]

[그새끼 그거 핵 같은거 쓰는걸까요?]

[중동 부호일지도 모르지. 요새 대기업 스폰 붙은 랭커들 돈 쓰는거 봐라, 수십 억은 기본이랜다. 못 봤냐? 얼마 전에 쉬폰이 에픽템 살 테니까 연락달라고 광고도 찍었잖냐.]

안그래도 리얼포스의 팬사이트에 메인광고 베너에 달린 쉬폰의 ‘에픽 삽니다’ 가 화제였다. 진짜 사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의 스폰서인 산성그룹의 새 스마트폰 광고였다.

슬슬 리얼포스의 세계에는 전에는 없던 광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현실에서 보이는 광고가 게임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랭커들은 하나 둘 대형 스폰서를 잡았다.

[우리 그럼 여기 빨리 정리하고 모데사로 뜹시다. 솔직히 쫄려요, 언노운 그 새끼 우리 30명 다 썰고 유유히 사라지던거 보는데 오금이 다 저리더라고요.]

길드원 한 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길마, 란마는 혀를 쯧 하고 찼다. 대체 에픽을 얼마나 쳐 두르고 있길래 그렇게 강한 건진 몰라도, 눈 앞의 흑마법사들은 그야말로 먹기 좋은 밥이었다.

[이 새끼들은 이렇게 약해 빠졌는데 말야.]

아닌게 아니라, 흑마법사들의 마법은 뭔가가 기묘했다.

대미지는 제법 나오는 편이나 도트 대미지라 도트 힐링에 금세 상쇄돼 버리고, 상태이상기는 죄다 애매하게 시간이 짧고 디버프 능력이 떨어졌다.

-에이 씨팔! 개새끼들아!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흑마법사 유저들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죽어가는 유저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자, 저 바깥쪽 애들 다 정리했으니까 정화의 샘 중심부에 모여있는 애들 썰고 빨리 튑시다~!]

길드원들이 우수수 달려가던 그 무렵이었다. 그들은 머리 위로 뭔가가 날아온다는 생각을 하며 흘끗 고개를 들었다.

허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라는 찰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놈들은 묵직한 뭔가에 깔아뭉개졌다.

[억!]

[어억!]

샤아악!

그들을 짓밟은 투명한 존재가 일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 표범에 탄, 태호였다.

태호는 깔아뭉갠 머더러들에게 하나씩 ‘강화된 중독’ 을 돌리며, 유령 표범을 탄 채 종횡무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시팔 저거 언노운이잖아! 저새끼 오면 얘기 하라고 했잖아!]

부길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망을 보던 길드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빽 소리쳤다.

[아니 시팔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뭐 어쩌라고요?]

[안 보여? 저 미친 새끼가 이젠 은신도 써?]

[아 젠장! 나 해골떳다! 님들 장착템 잡템으로 빨리 바꿔 껴요! 어차피 저거 싸워서 절대 못 이겨요!]

[저 미친놈 중독 거는 거 같은데 딜이 너무 쎄요!]

[아니 저새끼 더 세진 것 같은데?]

쾅! 콰콰광! 쾅!

머더러들이 일순간 모조리 다 터져 나가고, 삽시간에 크레이지 도그가 또 한번 정리됐다.

태호는 어느새 유령 표범에 올라탄 채 부길마 란마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이이...”

란마가 부글부글 끓는다는 얼굴로 태호를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개새끼! 너 대체 무슨 짓거리야? 왜 하는 것마다 훼방 놓고 지랄이냐고?”

“......”

태호는 아무 대답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살아남은 애들 다 모데사로 튀어! 거기서 길마 파티랑 합류해서 그쪽 퀘 깨! 에라이!]

부길마의 길드채팅이 태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바로 태호가 보유한 ‘머더러 헌터’ 패시브스킬의 효과였다. 태호는 지금 머더러들이 나누는 귓속말, 파티말, 길드말까지 모조리 엿들을 수 있었다.

쾅! 그런 부길마까지 완벽하게 처리한 뒤, 슥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많은 놈들을 해치우자, 레벨이 1 올랐다. 이쪽은 길드의 2군도 아니라 3군쯤 되는 진영인 모양이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살아남은 흑마법사 유저들이 멍하니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환호하는 것을 보며, 태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유령표범을 탄 채 곧바로 사라졌다.

“와 언노운 형님 쩔어!”

“진짜 멋있다!”

흑마법사들이 모여 열띤 얼굴로 환호하고 있었다.

* * *

잠시 후, 모데사 마을.

이 곳은 서북부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 위로는 초원의 오크족들이 즐비하게 서식하고 있었다.

딱히 크게 주목할 것은 없는 마을이었으나, 이 곳에 크레이지도그 길드원들이 모인 것은 다름아닌 메인퀘스트 때문이었다.

크레이지도그의 길드마스터, 나잘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었다.

“이, 이... 이 씹새끼가 어떻게 여기도 왔어?”

길드원들이 죄다 터져 나가고, 남은 건 나잘 하나뿐이었다. 바로, 귀신처럼 나타난 태호 때문이었다.

“너, 너... 운영자냐? 아니면 뭐야?”

태호는 아무 말 없이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놈에게는 ‘강화된 중독’ 이 걸려 있었다. 중독은 생명력을 1까지 줄줄 새게 만들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모데사쪽도 전멸이다. 거기 괜찮아?]

그 무렵. 놈이 은밀하게 귓속말을 보내는 것이 들려왔다.

“죽이라고 개새끼야! 죽여!”

앞에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이쪽 순조로운데요? 거기도 언노운인가요?]

답장이 들려왔다.

[하... 좆됐는데 이거, 애들 장비도 다 떨구고 이제 밑천 바닥나게 생겼어.]

[일단 메인퀘 깨서 우리라도 먹튀합시다. 저랑 란마, 그리고 길마님 셋만 먹고 튀어도 솔직히 한밑천 했잖아요. 굳이 아래애들까지 챙겨 줄 필요 없어요.]

[일단 나 사망패널티 끝나면 그쪽으로 간다. 위치 그대로지?]

[랑칸 고적지 그대로에요. 시간이 좀 걸릴 듯 합니다.]

또 다른 부길드마스터와의 대화인 듯 했다. 태호는 이제 알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놈을 처치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 곳에서도 1레벨이 올랐다. 이제 태호의 레벨은 262다.

이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니, 오크족들을 타락시키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태호는 사방에 가득한 오크들이 뿜어내는 회색빛 오오라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놈, 길드마스터가 가지고 있는 혼돈의 유산이 문제인 듯 했다.

* * *

“어...”

크레이지도그의 마지막 부길드마스터, 멜랑꼴리는 가만히 태호를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에라이 시팔...”

쾅!

‘아이디 한번 기괴하네.’

태호는 놈까지 마지막으로 해치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곳에도 주둔하던 서른 놈 가까이가 사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보유중인 스킬 ‘머더러 헌터’ 가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중급 머더러 헌터가 1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말이었다. 하긴, 태호는 군자의 지팡이 옵션을 살펴보았다.

[사용자가 사냥한 인간 1당 1의 마법 공격력이 상승합니다.(266/500)]

군자의 지팡이가 126의 스택을 쌓았다.

오늘 126명의 머더러를 썰어냈다는 말과 같았다.

아마, 실질적으로 전선에 투입된 크레이지도그는 모조리 다 태호의 손에 골로 간 셈이었다.

[패시브 : 상급 머더러 헌터]

[머더러를 상대로 할 때 경험치 획득량 100% 증가.]

[머더러를 잡을 때 마다 스킬의 경험치가 상승하며, 일정량을 충족시키면 스킬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업그레이드 3단계]

[초급 :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현재 비활성화) 또한, 자신이 살해한 ‘머더러’중 단1명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중급 : 머더러들과 근접해 있을 시, ‘귓속말 및 파티 대화 등’ 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습니다.]

[상급 : 머더러들을 살해할 시, 머더러가 보유한 ‘가장 등급이 높은 아이템’ 이 낮은  확률(현재3%)로 드랍됩니다.]

“......”

태호는 그 부분 중, ‘머더러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라는 부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또한, 상급의 추가 옵션도 매력적이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안타깝게도 눈 앞의 이 녀석, 나잘과는 오래 두고 봐야 할 듯 싶다.

고개를 돌려 본다.

이 곳은 랑칸 고적지.

태호는 이 곳을 한번 와 본적 있기에,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찾아 올 수는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 이젠 은신도 써?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