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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67화 (67/194)

< 안타깝지만 별 수 없다. >

랑칸 고적지는 돌로 만들어진 사원 같았다. 사원은 현재 여기저기 반파된 상태이다. 주먹만 한 돌멩이들이 하얀 빛을 뿜어내며 뭔가를 봉인하고 있었다.

태호는 그 봉인석 한가운데에서 회색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검붉은 검 한 자루를 쳐다보았다.

저것은 안 봐도 뻔하게 혼돈의 유산 중 하나일 것이다. 놈들은 봉인석을 해제하기 위해 독자적인 메인퀘스트가 부여한 방법을 사용한 듯 했다.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회색 에너지가 바로 그 증거였다.

‘체크.’

어쩌면, 이 멜랑꼴리란 놈도 혼돈의 유산 중 하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시식!

이내, 사방의 봉인석들이 제 기능을 멈추었다. 태호는 그 안으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가, 붉은 검을 쥐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비(양손검)]

[이름 : 피의 울부짖음]

[나의 힘 앞에 복종하라.]

[옵션 : ???]

[개방까지 필요한 생명과 영혼 : 0/1000]

판타로스의 에픽은 대충 이런 느낌인 모양. 개방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과 영혼이란 것을 바쳐야 하며, 이것은 그야말로 머더러들이 살육행위를 자행하는 원인일 것이다.

‘어차피 걔들한텐 그저 게임일 테니까.’

머더러들이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민폐행위를 끼치는 양아치 쓰레기들이라도, 일말의 변명 여지는 충분하다.

이 세상은 어차피 가상현실. 그리고 머더러는 리얼포스란 게임에서 시스템적으로 허용한 컨텐츠 중 하나.

어쩌면, 누군가에게 있어 태호는 지나칠 정도로 정의 컨셉을 잡은 관심종자일 수 있었다.

“......”

그 순간 태호가 느낀 것은, 어쩐지 압도적인 고독함이었다.

자신의 행위는 이미 남들에겐 이해받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게임!

그렇다. 이 세상은, 지구의 인간들에게는 게임이라는 것으로 일축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 게임을 목숨걸고 하는 사람들? 많다. 하지만, 태호처럼 모든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혼자였다.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있어도 태호같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 하고, 또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

심지어 과거의 동료였던 라간도, 또 그 밖의 동료들도 태호에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테지.

어쩐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해 봐야 별 수 없는 일이었다.

* * *

언노운이 크레이지 도그를 하룻밤 사이에 싹 다 조져 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유튜브에는 언노운이 활약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가고 있었다.

사실, 머더러는 만인의 적이었다. 리얼포스는 전례 없이 머더러들에게 특혜를 준 것이 맞았다.

[머더러 새끼들 조지는 우리의 언노운 성님.]

[언노운 형님, 정화의 샘에서 30대 1을 탈탈 터시다.]

팬사이트에는 점점 언노운의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었는데, 그 중 열혈 팬클럽은 역시나 ‘UN’ 이었다.

U(unknow)N 이라는 뜻인데, 그들은 언노운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그야말로 광적으로 추종하는 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UN에 가입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우선, 당연히 흑마법사여야 한다. 그 다음에, 통일된 복장을 입어야 했다.

복장은 상점에서 판매하는 기본 판금 갑옷 세트다. 왜 그러냐면, 언노운. 즉 태호의 복장은 어둠 기사단 세트인데, 그것과 가장 유사한 외형이 바로 판금 갑옷 세트였기 때문이다.

“......”

태호는 팬사이트에 형성돼 가는 팬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우선. 이번 활약상으론 얻은 것이 제법 많았다.

첫째로는, 혼돈의 유산을 하나 얻었다. 이것은 꽤 큰 수확이었다.

둘째로는, 머더러들을 죽일 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업그레이드 된 머더러 헌터는, 이제 죽인 머더러에게 낮은 확률로 최고 등급의 아이템을 떨구게 만든다. 게다가, 죽인 머더러들 중 하나를 추적할 수도 있게 해 주었다.

더 놀라운 점?

그건 바로.

[쉬폰 : 현재 위치]

기존에 죽인 머더러들까지 쭉 목록이 만들어져 있었기에, 언제든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가 24시간의 텀을 두고 추적할 수 있다면, 머더러 헌터는 실시간이었다.

‘단 한 명.’

그렇다. 머더러 헌터는 위업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패시브 스킬. 때문에, 오직 태호만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기 옵션이 붙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 태호는 쉬폰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북대륙쪽에 찍혀 깜빡이는 것을 본 뒤, 팬사이트를 뒤적이다 기사 몇 개를 발견했다.

최근 온라인에는 쉬폰이 이끄는 ‘어세신즈’ 와 ‘로만제국’ 의 전쟁이 핫이슈 중 하나였다.

어세신즈는 소수의 멤버로 운영되는데, 로만제국과 전면전을 선포하며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하고 있는 듯 했다.

[북대륙 격전 결과 : 어세신즈의 승리]

덕분에 신이 난 것은 팬사이트다. 매일같이 어세신즈의 승전보와, 언노운의 활약으로 도배가 되고 있었으니까.

‘일단 로만 제국은 쉬폰한테 맡겨 둘까.’

놈에게도 메인 퀘스트라는 동기가 있기에 머더러들을 썰고 다니는 듯 했으니, 일단은 놔 둘 생각이었다.

자.

우선은 향후 등장할 던전과, 에픽들을 추려 볼 시간이었다.

‘일단은 어둠 기사단 세트가 심볼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어둠 기사단 세트는 일단 유니크 등급. 세트 옵션으로 여러 가지 유용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엄밀히 따져 각 부위들을 에픽으로 맞추는 것만큼 효율이 좋다는 얘긴 아니었다.

‘흐름상, 곧 엘린의 공중정원이 발견될 거야.’

엘린의 공중정원은 잊혀진 왕국이 릴리즈된 이후, 한두달 뒤 리얼포스의 창공을 지나가는 거대한 공중던전이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섬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곳에서 에픽 두 종이 떨어졌다.

‘엘린의 장갑, 그리고 찬란한 은총의 팔찌.’

각각 장갑, 그리고 착용귀속의 팔찌다.

그 다음엔 ‘바넷사의 해저기지’ 인데, 이는 아마 곧 발견될 듯 싶다. 그 곳에선 상의와 하의가 각각 떨어졌다.

이러한 던전들은 ‘레이드 던전’ 이라는 이름으로 특수취급된다. 그 곳에서 등장하는 최종보스들은 레이드 보스로서, 아직 태호조차 솔로 플레이는 불가한 수준으로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최소 30인 이상의 플레이어들이 합심하여야 했고, 대미지로만 잡는 보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 패턴에 신중하게 움직이며, 고정된 패턴을 딱딱 기계처럼 맞춰야 했다.

‘우선은 처음으로 열리는 레이드 던전에서 현재 수준을 가늠해 보는 것으로 하자고.’

태호 역시 레이드 보스에게 얼만큼 대미지를 넣을 수 있을지, 제법 기대가 됐다.

일단은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솔직히 조금 더 강해지고, 각종 패턴을 파훼할 수단만 찾으면 레이드 솔로플레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태호는 천천히 ‘머더러 헌터’를 재차 사용했다.

[살해한 머더러 목록]

목록을 찬찬히 보며, 머더러들을 찾다 한 곳에서 멈췄다. 태호는 이내 씩 웃었다.

‘이 놈들로 해 볼까.’

다음 목표는 뱀파이어즈였다. 얼마 전, 엘 로스의 던전에서 패죽였던 놈들의 사망 패널티가 풀려 다시 접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언노운, 뱀파이어즈 척살!]

[뱀파이어즈 부길마 ‘간즈’ 심경발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약 일 주일 뒤.

세상에 하얀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이브.

[Unknown, MV Ⅱ]

언노운의 두 번째 매드무비가 공개되었다. 이번에는 크레이지 도그를 제대로 조져 버리는 영상의 편집본인 것이다.

첫 시작은, 하얀 눈 덮힌 설원이었다.

새카만 갑옷을 갖추어 입은 태호가 저벅 저벅 함박눈 내리는 설원을 말 없이 걸어갔다.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자신의 발자국만이 보였다.

태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눈 쏟아지는 찬란한 하늘이 클로즈업 되며, 고개를 내리니 그 곳에 아르카네가 있었다.

아르카네는 산타 모자를 쓰고 태호를 빤히 올려다 보고 있다. 한 손에 든 빨간 사과가 인상적이다. 문득, 아르카네가 방긋 웃으며 물어보는 것이다.

[조질 거야?]

태호는 그대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에 손을 뻗는다. 설원 위에 유령 표범이 소환되었다. 그 곳에 올라탄 채 태호는 달리며 저 편으로 사라져 가고, 그 뒷모습이 영상에 계속해서 보여진다. 아르카네는 그런 태호에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두 번째 매드무비가 시

작되었다. 중요한 대화내용이나, 상황설명은 적절히 편집해 날려 버린 뒤 전투와 크레이지도그의 부길마 길마의 죽기 직전 대사 등이 강조된 두 번째 매드무비.

업로드 되자마자 대히트를 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흠.”

태호는 속속 올라가는 조회수를 지켜보았다. 새로고침을 할 때 마다 100 이상씩 올라가는 조회수는,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유튜브보다 훨씬 빨랐다.

[팔로워 : 3360000]

팔로워는 이제 336만, 게다가 첫 번째 매드무비의 동영상은 이미 조회수 천만을 돌파했다.

유튜브의 수익은 광고에 대한 수익이다. 조회수가 늘어날수록, 영상 초반에 삽입된 5초 짜리 스킵불가 광고들이 가져오는 수익이 늘어나고 있었다.

태호는 자신의 수익내역을 확인했다.

첫 번째 매드무비는 현재 대략 1300만원 정도의 수익을 내고 있다.

1월 초에 들어오게 될 수익이다. 이 중, 수수료를 제하면 대략 700만원 정도다. 이 수익에서 30%를 편집자인 김택환에게 줘야 하고, 태호에게 돌아올 돈은 대략 500만원 안팎.

적은 돈은 절대로 아니나, 큰 감흥이 생기는 금액또한 아니었다. 물론, 영상 하나로 벌어들이는 수익인지라 상당히 큰 액수인 것은 사실이었다.

* * *

태호는 지난 시간 동안 머더러들을 쫒아다니며 아주 집요하게 죽여대고 있었다.

개 중, 가장 수난을 당하는 것은 역시나 ‘크레이지 도그’ 의 길드마스터 나잘과 부길마 란마, 멜랑꼴리였다.

“야이 시팔새끼야! 또 왔냐! 또!”

나잘이 지겹다는 듯 빼액 소리지르고 있었다. 이 미친 정신병자가 부활해서 재접속할 때 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쫓아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게 뭐야 이 개새끼야! 야! 야 차라리 죽여! 시팔 더러워서 안 해!”

태호는 가만히 나잘을 지켜보다가, 망설임 없이 죽여버렸다.

“꾸억!”

그리고 드랍된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꽝인 듯 했다.

‘역시 3%라 그런지 확률이 낮긴 하네.’

태호는 새로이 얻은 ‘피의 울부짖음’을 가지고 여러 실험을 거친 바 있었다.

우선, 판타로스의 유물들은 각종 대도시의 창고에 보관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NPC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 했다.

마찬가지로, 경매장에도 올라가지 않는다.

그 뿐인가?

‘교환’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교환을 하려고 하면,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방 전에는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즉.

혼돈의 유산들은 온전히 유저가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착용귀속이라면?’

그 때는 약간 문제가 복잡해진다. 착용귀속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시스템을 초월하는 행위.

그러니까 일단은 실험 중이었다. 이 놈을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혼돈의 유산이 떨어진다.

만약, 죽여도 죽여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단 간단하면서도 끔찍한 생각을 하는 태호였다.

‘이미 아이템을 개방해 팔거나 넘겨 버렸다?’

그 추측도 일리는 있으나, 확률은 낮다. 이유는 놈들은 유산들로 진행하는 메인 퀘스트의 성공을 눈 앞에 두고, 태호의 훼방으로 성사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잘 잡았고.’

태호는 그 다음, 벌판을 달려가던 부길마 ‘란마’ 도 죽였다.

“아이 씨벌... 악마 같은 새끼!”

그 다음엔, 남쪽 수림으로 들어가려던 또 다른 부길마 ‘멜랑꼴리’ 도.

“야이! 억!”

그 뒤에 오늘의 일일 퀘스트를 마친 것처럼 뿌듯함을 느끼며, 메모장을 켜 작성해 나갔다.

[나잘 ? 6다이 무득.]

[란마 ? 6다이 무득.]

[멜랑꼴리 ? 6다이 무득.]

미안하지만 놈들이 뭔가를 떨굴 때 까지 절대 멈춰 줄 생각이 없었다. 세 놈 다 혼돈의 유산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만약에 세 놈 다 착용시 귀속 아이템을 이미 써 버린 상태라면? 혹은, 이미 개방 해서 넘겨 버렸다면?  그럼 안타깝지만 별 수 없다. 태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 까지 놈들을 죽여 버리기로 작정했으니까.

< 안타깝지만 별 수 없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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