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아의 수호 >
태호는 오늘의 일일퀘스트를 마친 뒤, 목을 좌우로 꺾었다. 방금 전, 크레이지도그의 길드마스터 나잘이 저주를 퍼부으며 죽었다.
‘흠, 오늘도 꽝인가.’
막상 놈들을 잡아 조지는 데에는 딱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급 머더러 헌터’ 는 실시간으로 상대를 추적할 수 있기에, 길마와 두 부길마를 잡아 족치는 데에는 단 30분 정도가 걸릴 뿐이다.
아무튼 오늘도 일일퀘스트 완료.
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메모장을 작성해 나갔다.
[나잘 ? 10다이 무득]
[란마 ? 10다이 무득]
[멜랑꼴리 ? 10다이 무득]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아무래도 리얼포스의 세계는 가상현실 게임. 즉, 꼬우면 접으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만약 놈들이 접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아니, 딱히 복잡할 것도 없나?’
태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무렵이었다.
-형님.
라간에게 귓속말이 온 것이다.
-어.
-바쁘쇼?
-그냥저냥. 어쩐 일?
-아, 다름아니라. 형님 저번에 그 가이아인가 하는 여신 찾는다고 했지?
-응. 너 엔트는 깨웠냐?
라간은 현재 요정의 숲의 ‘고대의 엔트’를 깨우는 메인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다.
-옛서. 그건 깨웠고 형님이 말한 히든피스도 찾았어. 아, 이거 유니큰데 형님 드릴까? 땅 마법서야.
태호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건 너 가지고. 어차피 네가 노력해서 얻은 건데 굳이 나눠 주려고 안 해도 돼.
-하하하! 암튼, 엔트 깨워서 이런저런 대화 나눴더니 메인 퀘가 갱신됐어. 나도 가이아한테 가는 거야. 그래서 연락 드렸고.
-아.
태호는 눈을 깜빡였다.
태호는 얼마 전, 우리아를 찾은 적이 있었다. 가이아의 신전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더니, 안그래도 자신도 찾고 있다고 말 했었던 것.
그렇다고 해서 물의 여신 에테리얼에게 물어 보기엔, 그녀를 소환하기 위한 조건이 ‘에픽 한 개’ 이기에 부담돼 미루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 ‘찾는’ 과정 자체가 라간에게 부여한 메인퀘스트였던 모양이다.
-잘됐네. 어딘데?
-여기서 가까워. 중북부, 에... 그러니까 요정의 숲 북부의 옥시 골짜기. 이쪽으로 오면 될 듯?
옥시 골짜기.
태호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 곳에는 큰 볼 일이 없어, 맵에 있다는 것만 알지 제대로 가 본 적은 한두 번 뿐이었다.
그런 곳에 있었나?
* * *
옥시 골짜기.
크게 별볼일 없고, 출몰하는 몬스터도 없다. 있어 봐야 산짐승 뿐이며, 허름한 마을 한 채 가 있을 뿐인 지역. 유저의 발길이 거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간만에 다시 본 라간은 어쩐지 고민에 빠져 있는 얼굴이었다. 큰 돌 위에 앉아 턱을 괸 채, 특유의 쾌활하거나 넉살 좋은 면모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 형님.”
라간이 태호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태호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친한 척을 한 뒤 물었다. “왜 이렇게 기운 빠져 있어?”
“응? 아아, 별 건 아니고.”
라간은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태호에게 물었다.
“형님은 스폰서 필요 없어?”
“응?”
갑자기 스폰서 이야기를 꺼낸 라간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어제 아버지가 갑자기 그러시더라고.”
“......”
“스폰서 제의 받으라고.”
“......아버지가?”
“흠... 형님한테만 말 해 주는 건데, 우리 집이 사실은 조금 사는 편이걸랑. 아무튼 그게 고민이야.”
아마, 태호의 기억에 의하면 라간의 집안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주류회사였다. 태호도 뒤늦게야 알고 새삼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 자금력이란 것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아무튼.
과거에도 라간은 결국 스폰서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라간에게 결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야 그룹에서 내놓은 막내아들이지만, 리얼포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점에서는 그 위상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것이다.
“형님은 스폰서 필요 없어?”
“흠... 난 아직. 다만, 리얼포스가 더 대박이 난다면 아마 집안 내에서도 꽤 인정 받기 쉬울 지도?”
“흠?”
라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호를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라간에게 있어 태호는 꽤 기묘한 존재였는데, 마치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하단 느낌을 가끔 받기 때문이었다.
“뭐, 그럴라나. 아참. 하나 더.”
“뭔데?”
“그... 형님 기억 하나? 거기 라이언 앞마당 친구들.”
“아, 그 친구들. 기억 하지.”
“흠... 이건 좀 그럴 수도 있으니 부담되면 거절해줘.”
라간이 조금 망설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서. 같이 길드라도 하나 만들어서, 함께 키워 주고 싶거든. 분명히 도움이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맞는 말이다.
그들은 가만히 놔 두면, 향후 용병길드를 만들어 머더러 길드를 막아내기 위한 ‘레이드 파티’ 의 호위병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증오의 피라미드를 내가 쓸 수 있게 해 준다면, 그 사람들 키워 주기도 쉬울 거고 말야.”
증오의 피라미드.
태호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이었다.
라간의 제안은 절대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일리가 있었고, 태호가 시간을 내서 할 수 없었을 뿐 생각해 둔 적도 많은 일이었다.
“그건 괜찮은 생각이군. 네 뜻대로 해.”
태호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오, 진짜? 진짜로?”
라간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아주 좋아져, 금세 환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잘 키워 볼게. 알았지? 믿을 만 한 사람들 몇 몇을 알고 있거든. 그리고 거기서 나온 아이템은 반띵해서 형님한테 줄게. 오케이?”
“그러든가. 길드 같은 거 만들면 알려 줘.”
“예스! 알았어!”
기분이 한껏 들뜬 라간을 보며 태호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인간에 대한 부분에서는 라간이 태호보다 조금 위였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재벌가에서 치열한 경쟁과 견제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법도 잘 안다.
아무래도 이렇게 된 거, 길드 같은 부분은 라간에게 맡겨 볼까? 란 생각을 하며 태호는 걸음을 옮겼다.
* * *
옥시 골짜기, 깊숙한 곳.
사방에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자라, 들어서자 ‘숲의 가호’ 가 발동되었다.
라간과 태호는 숲의 가호를 잠시 발동해제시킨 뒤, 그 깊숙한 곳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 사방에는 쓰러진 나무들과 수북히 덮힌 흙더미와 낙엽 등으로 철저히 가려져 있어, 작정하고 이 근방을 뒤지지 않으면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러니 과거에는 못 찾았군.’
그리고 제단이라기엔 너무 조약하다. 즉,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황급히 이전을 한 것처럼 보였다.
“어디보자, 잠깐만. 메인 퀘스트 완료...”
라간이 메인 퀘스트를 한참 살피다가, 새로운 메인 퀘스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형님. 이거, 가이아 불러야 하는데 방법이 안 나와 있네.”
메인 퀘스트가 불친절한 모양이다.
태호는 가이아의 제단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 창에 존재하는 ‘엘 로스의 가면’을 꺼냈다.
“내가 해 보지.”
가면을 제단에 올려 놓자, 사방에 구구궁- 하며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내.
하얀 빛과 함께, 제단 위에 여신이 강림했다.
여신의 생김새는 에테리얼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이 가득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으며, 길게 늘어진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가면을 바친 이가 누구인가?]
그녀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대답했다.
“접니다.”
[가면에 깃든 의지가 느껴지노라. 그대는 정당한 방법으로 이 가면을 취한 자격을 갖춘 이... 나는 그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여야겠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친숙함이었다. 태호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볼카노스님에게 여러 가호와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러한가? 어디...]
그녀가 태호를 스캔하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태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세상에... 이리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 이가 있었다니?]
“또한 혼돈의 존재들과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가이아 님께, 혼돈의 존재와 싸우기 위한 힘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태호가 선택한 것은, 직설이었다.
태호가 봐 온 결과, 신들은 어차피 자기가 생각한 것 한도에서만 뭔가를 준다. 그것은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고, 그 이상의 것은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볼카노스의 아이 중, 그의 사랑을 이토록 받은 이를 본 적이 없건만... 너는 볼카노스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겠구나?]
그녀의 말에 태호는 어쩐지 머쓱해짐을 느꼈다.
[그와는 오랜 인연이 있다. 우리들, 속성의 지배자들은 거의 항상 뜻이 같았지. 그는 정의롭고, 의연하며 또한 생명의 존귀함을 아는 이였다.]
속성의 지배자라. 아무래도 여섯 속성의 신들을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볼카노스에 대한 평가가 좋은 듯 하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문했다.
[...너는 이 가면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아는가?]
“모릅니다. 제물로 바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만 압니다.”
[이는 약속이니라.]
그녀는 어쩐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덧붙였다.
[향후, 나의 후손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겠다는 약속 말이다. 일종의 증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태호는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가상현실의 세계. 판타로스가 죽지 않는 이상, 무한히 반복될 세계다. 그런데 그 후손들을 위한 증표를 남겨 두었다?’
이는 그녀의 성향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는... 아주 먼 옛날, 내가 직접 그들에게 지시했던 것이지. 그렇기에 표면적인 가치 보다, 균형의 힘이 더욱 큰 물건이다.]
그녀의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조금 더 옛날, 어쩌면 리얼포스가 만들어질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태호의 추측일 뿐이지만.
균형의 힘이 더 큰 물건이라 함은, 에픽이지만 그보다 높은 가치를 가졌다는 말 같았다.
아무래도 신들이 가치를 느끼는 물건들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로키는 고작 과일일 뿐인 용과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 시절로 가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단다. 어쩌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그 말을 마친 뒤, 그녀는 태호에게 손을 뻗었다.
[네게는 이미 볼카노스의 가호가 도사리고 있다. 전혀 다른 속성인 나의 가호는 크게 의미가 있진 않을 터, 혼돈의 힘과 싸우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
태호가 생각한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네게 이것을 주마.]
그녀는 가면을 품에 넣은 뒤, 땅을 향해 양 손을 뻗으며 힘을 끌어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착(캐릭터에 장착귀속됨)]
[이름 : 가이아의 수호]
[나는 그녀가 좋아요. 왜냐면, 그녀에게는 엄마의 냄새가 나거든요. 하하하! -초보 학자, 카실론]
[모든 상태이상이 적의 레벨을 가리지 않은 채 온전히 적용됩니다.]
[옵션 : 사용자의 반경 15미터에, 강렬한 지진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모든 땅 속성의 존재들과의 관계가 ‘확고한 신뢰’ 가 됩니다.]
“......세상에.”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태호는 가이아에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어쩐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에너지인 ‘신력’ 이 모자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태호는 그녀에게 덤덤히 말했다. “신력이 모자라시군요. 저와 제 동료에게 신력을 사용한 약속을 내려 주시면, 당신의 신력을 복구할 수 있게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라간이 지극히 감탄한 얼굴로 태호의 거래를 지켜보고 있었다.
< 가이아의 수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