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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71화 (71/194)

< 내가 다 먹어 치웠다. >

키탄카는 태호를 보며, 천천히 물었다.

[무엇을 알고 싶지?]

“너희, 저 안에서 뭐 했어?”

태호의 손가락이 저 편, 울크랜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륙 중앙에 솟아오른 거대한 성, 그 안에 꽁 틀어박혀 뭘 하고 있었냐는 말이었다.

[......]

키탄카는 묵묵히 태호를 보다, 대답했다.

[앙헬 바로스와 그 수하들의 힘을 흡수하고 있었다.]

앙헬 바로스.

그는, 잊혀진 왕국의 최종보스로 나타날 예정이었던 놈이었다. 그는 잊혀진 왕국의 왕으로서,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는 레이드 보스다.

“힘을 흡수한다라...”

태호는 말 끝을 흐렸다.

대강 이런 전개를 예상하긴 했다만, 못내 마음이 쓰렸다. 왕국 안에서 힘을 흡수해 강해져 가는 과정을 틀어 막을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

“너도?”

[당연하다.]

샤반타와 데샹은 본래 제1확장팩에 등장해야 했던 녀석들.

즉, 놈들은 등장할 시기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1/3정도의 힘을 축적한 채 나타났다.

허나 다른 녀석들은 그렇지 않다. 즉, 등장해야 할 ‘운명’에서 어긋나는 시간차가 클수록 놈들의 전력은 약화된다는 이론이 딱 맞아 떨어진다.

놈들은 본래 제7확장팩에 등장해야 했으나, 지금은 제1확장팩이 등장할 시기.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약해져 있으니 힘을 복구할 수단으로 앙헬 바로스와 수하의 힘 흡수를 선택한 것.

태호는 대강 흐름을 이해했다.

“운명의 굴레가 뒤틀렸기 때문이군.”

[......]

키탄카가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운명은 이미 뒤틀렸다. 잊혀진 왕국의 최종보스로 나와야 했던 ‘앙헬 바로스’ 는 ‘대장군 신노스’ 에게 힘을 흡수당했다.

즉.

실질적으로 이번 확장팩의 보스는 ‘신노스’ 다. 이는 향후의 확장팩들도 비슷한 형세를 띌 지도 모르는 일. 태호는 빤히 그를 보다가 재차 물었다.

“지금 신노스의 힘은 어느 정도나 회복됐냐?”

[대략 십분의 일 정도.]

-지금의 신노스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보, 본신의 힘보다... 1/10 정도밖에 안 되시지.

릴리트는 그렇게 말 했었다. 그렇다면, 다시 1/10을 회복했다는 말이다.

“놈은 지금 어디 있는데?”

[북쪽으로 향하셨다.]

“왜?”

키탄카는 태호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혼돈의 주인께서 남기신... 위대한 유산 중 하나를 찾으러 가셨지.]

“......”

[왜 내가 순순히 대답해 주는지 아는가?]

“왜?”

태호는 미동 없이 그를 보며 물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너희 인간들의 힘으론, 그 분을 막을 수 없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

맞는 말이었다. 통상적으로, 놈이 힘을 절반 가량만 회복해도 지금의 유저들로는 답이 없다.

과거 신노스는 999레벨의 만렙 유저들이 수백 명 동원돼 복잡하고 까다로운 패턴 파훼와, 최적화된 대미지 딜링. 그리고 세계 최고수준의 탱커와 힐러진이 붙어 꼬박 반나절을 공략해야 쓰러지던 정신나간 최종보스였다.

지금 수준의 유저들은 레벨이 높아 봐야 200. 이 정도 수준에서는, 신노스가 힘의 절반만 회복해도 답 자체가 없다.

[비록 네놈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은 인정하나, 그 분에 미치기엔 어림도 없다.]

키탄카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신노스 님은 지금 북쪽 끝, 리치의 힘을 흡수하러 가셨도다. 하하하하! 어리석고 또 어리석던, 그 머저리 리치 놈의 힘까지 흡수하시면, 네놈이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

태호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미안하지만 그거라면, 게임 시작하고 며칠 안 돼서 이미 막았다.

[곧, 공포에 순응해 타락해 버린... 리치의 수하들까지 휘하에 넣으실 예정이다! 이미 그분께서는 놈들의 위치를 모조리 파악하셨다. 남은 것은 시간 문제! 하하하! 네가 나를 붙잡고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그분께서는 파죽지세로 힘을 늘리실 터!]

“......”

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얘들, 생각보다 느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 넌 지금, 어딜 가는 중이었는데?”

[공포에 순응한 데스나이트들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다.]

위치를 파악한 ‘영광의 기사’ 들을 잡으러 나선 모양이었다. 행보가 타당해 보이긴 했다.

헌데.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다.

‘대장군들은 천계의 신들처럼 리얼포스의 진실을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리얼포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회귀자인 나처럼 등장하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얻어야 할 걸 빨리 얻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태호는 그 의문에 대한 자체적인 추측을 했다.

‘리얼포스는 새로 오픈할 때 마다, 지형이나 상황 등이 바뀐다?’

여러 가지 가정을 한 뒤, 나아가자면.

‘새 차원에서 새로이 리얼포스를 오픈하는 그 시점, 고대부터 시작된 리얼포스의 이야기는 이전 차원의 이야기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다들 인간적 사고를 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어떤 차원에서 서비스됐던 리얼포스의 세계에서는 ‘서피드 쿤’ 이 리치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럼...’

태호는 문득 그 생각의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회귀자로서 특권을 누리는 것은, 혼돈의 권좌에서 튀어나온 놈들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건데?’

즉.

혼돈의 권좌에서 튀어나오는 대장군들은 리얼포스를 여러 번 겪어 보았지만, 적어도 이번 회차의 리얼포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 할 확률이 높다.

반면, 태호는 앞으로의 리얼포스를 대부분 다 꿰고 있다. 태호는 회귀해서 같은 세계를 다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유리한 싸움이었다.

태호는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리얼포스 속에서 이야기가 재시작되는 시점은, 아무래도 태고적 전쟁이 끝난 후부터. 적어도 대격변 이전.’

이 정도로 머릿속의 정보를 정리했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너는... 권좌에서 나와서 뭘 했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추종자들을 한데 모아, 신노스님과 나의 힘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아주 놀지는 않았다만, 그 뿐이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트는 왜 뒷전이고?”

[크흐흐흐. 그 년은 케노스 님의 부하. 우리가 챙겨야 할 의무는 없다.]

‘심지어 콩가루 집안이군.’

릴리트는 얼마 전 여관에서 죽은 몽마였다. 놈은 여섯 번째 확장팩, ‘환각의 케노스’ 에 등장하는데 웃긴 것은 케노스와 신노스가 형제라는 점이다.

형제끼리 우애가 좋을법도 한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신노스와 케노스는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지.”

[......그렇다.]

슬쩍 떠봤는데 맞나보다.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재미있어지겠군.’

태호는 머릿속에 체크항목을 하나 더 늘렸다.

‘혼돈의 대장군들은...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잘만 하면 이용할 구실들이 몇 개 보였다. 태호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여태까지 고생했다. 잘 가라.”

주먹을 내밀어 놈의 명치를 후려쳤다.

[컥!]

워낙 힘스텟이 낮은 태호지만, 놈의 생명력은 1. 그 주먹질 한 방에 놈이 억! 하고 쓰러졌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놈의 머리 위에 빙글빙글도는 시곗바늘이 더욱 가속화되어 놈의 전신을 노화시켜 가고 있었다.

[크으으.... 네놈... 시, 신노스 님이... 네놈을...]

태호는 놈의 앞에서, 막시무스를 소환해 보였다. 소환된 막시무스는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는지 잠깐 당황하다가, 바스라져 가는 키탄카를 보았다.

[억! 저, 저놈은 데, 데스나이트가 분명한데...]

태호는 대답하는 대신 슬쩍 웃어 주었다.

[이, 이, 이런 제기랄...]

파시시식!

놈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태호는 놈의 그 반응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데스나이트를 본인이 기억하고 있군.’

태호의 예상대로, 리얼포스의 세계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시작점은 ‘태고 전쟁 이후, 대격변 이전’ 이 분명해 보였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장군(4/25)]

[앞으로 ‘1’ 의 균형 파괴자를 사냥하면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이젠 이 메시지도 제법 익숙했다.

키탄카는 신노스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이 가히 신앙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놈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노스는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균형 파괴자, ‘키탄카’를 처치하여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대장군 ‘신노스’ 의 혼돈의 힘이 억제되었습니다.]

이어진 메시지는 흥미로웠다.

‘키탄카가 신노스의 부하니까, 놈을 해치웠을 때 영향을 미치는구나.’

화아악!

그 순간. 태호의 사방이 까맣게 변하며, 동영상 같은 것이 재생돼 가기 시작했다.

쌔애애애앵-!

사방은 눈보라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새하얀 빙하지대, 그 위에 서 있는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인영이었다. 그는 약 3미터 정도의 장신을 가지고 있었고, 전신은 새카만 비늘에 뒤덮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인간과 생김새는 같았다. 다만, 비늘에 뒤덮힌 기괴한 형상일 뿐.

‘신노스!’

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영상을 주목했다.

빙하지대를 걸어가던 그는 문득 멈춰 섰다. 그의 몸에서, 회색 기운이 일렁이더니 사방으로 산화돼 가기 시작한 것이다.

-......키탄카가 당했다?

신노스는 이를 우득, 갈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직 이 세계의 모험가들의 수준으로는 키탄카를 쉽게 죽일 수 없을 텐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사방의 풍경은 태호에게도 꽤나 익숙한 곳이었다.

‘리치를 만나러 가는군.’

미안하지만 그 곳에 리치는 없다. 리치만 없는 게 아니다. 네가 찾으려던 데스나이트와, 그 친구들도 다 없다. 내가 다 먹어 치웠거든... 이라고 태호는 생각했다.

샤아악!

영상은 끝나고, 태호는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

.

. .

.

.

현실로 돌아온 태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신체 변화를 느꼈다. 일단 가장 크게 체감이 되는 건, 눈높이였다.

“워... 대체 뭐야 이거.”

소파에서 일어선 태호는 자신의 눈높이가 한 뼘 이상 높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키가 컸다.

“시부럴... 키가 컸네?”

그 뿐 아니라, 전신에 힘이 넘쳤다. 화장실로 달려가 반신거울을 보니, 상반신에 잡혀 있는 근육이 보였다.

운동을 하지 않는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노가다판에서 일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잔근육이 눈에 보일 정도로 운동에 신경 써 본 적은 없었다.

‘장군을 잡아서 그렇구나.’

이 추측 역시 이젠 확신이 되었다. 장군을 잡아 낼 때 마다, 태호의 현실은 바뀌어 간다. 정확히는, 태호의 몸이 바뀌어 간다.

이게 끝인가?

키가 조금 큰 거?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키가 큰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태호도 평소에 키가 한 10센티 정도만 더 컸으면 좋았겠다, 란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 정도가 끝이라면 조금 아쉬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배가 불렀나.”

아무튼.

이번 전투는 얻은 것이 많았다. 심증 뿐이지만, 나름 일리 있는 추론을 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하나, 신노스였다.

신노스의 힘을 약화시켰다곤 하나, 여전히 상대하기엔 무리다. 그건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놈을 잡으려면, 유저들을 동원해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태호가 소파에 다시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개인 메신저에 도착해 있는 메시지들이 보였다.

[라간]

[: 형님, 이거 봐봐. 웃겨.]

스마트폰의 영문을 슥 읽던 태호는 문득, 거기서 멈칫! 했다.

“엥?”

영문을 읽었건만, 한글마냥 곧바로 이해가 됐다. 마치 한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어어?”

혹시나 싶어, 영어 신문기사를 검색해 아무거나 클릭 해 보았다.

[...최근 뉴올리언스의 연말 축제에서는...또한 재즈와 분위기 있는 밤을 즐기기 위한...]

“읽힌다.”

영어가 그대로 읽혔다.

“오...”

태호는 이마를 짚었다. 혹시나 싶어 이것 저것 다른 언어들도 보았다.

‘다 보이잖아.’

< 내가 다 먹어 치웠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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