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마 33번님! >
영어 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까지 줄줄 읽히는 걸 본 태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대박인데.”
대박이긴 한데, 당장 어디에 써야 할 지는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있다면 절대 손해는 아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태호는 문득, 라간이 보내 준 동영상이 궁금해 클릭해 보았다.
“......”
이내, 키득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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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쉬폰은 최근, 매일매일이 신나고 재미있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특히 즐거워 못 견딜 거 같은 건, 로만제국과의 전쟁이었다.
-형석이형, 살라만다의 언덕 근방에 로만애들 밀집했다는 정보에요.
현재 쉬폰의 ‘어세신즈’ 는 소수정예로 운영된다. WOF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 왔던 재능과 똘끼 충만한 동생 친구들이 리얼포스로 넘어 오며, 함께 움직이는 이는 총 다섯이었다.
쉬폰, 윤형석은 아예 자신의 팀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리얼포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 버린 것이다.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몇군이래?
-대충 3군급인데. 로만 그 새끼 요새 안보이는게 영 수상하긴 해. 어디 간 거지? 방송도 안 켜고. 몇 주 됐지?
-흠.
그건 그랬다.
로만제국은 현재 로만이 모습을 감춘 채, 부길드마스터들의 지휘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한때는 가장 큰 세력이었던 ‘로만제국’ 역시 규모가 점점 더 축소돼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좋은 먹잇감었는데, 벌써 발 빼려고 그러나?’
쉬폰이 입맛을 다셨다.
WOF의 투신이라는 윤형석, 그 이름값으로 띄운 유명세는 점점 더 고공행진 중이었다. 인기의 주된 요인은, ‘머더러 잡는 머더러’ 라는 다크히어로 같은 포지션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정의의 사도 따위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일석이조의 상황이 되는 것일 뿐.
쉬폰은 자신의 메인 퀘스트를 확인했다.
[8급 퀘스트]
[메인 퀘스트]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의뢰Ⅲ]
[: 혼돈의 힘을 깨우려는 타락한 이들을 저지하세요.]
퀘스트를 진행해 가면서, 쉬폰은 깨닫게 되었다.
자신에게 언젠가 나타났었던 그 괴물.
-힘을... 원하느냐...
문득 떠올리면, 아직도 꿈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하고도 기괴했던 그 경험.
놈은 스스로를 ‘판타로스의 사념체’ 라고 소개했었다. 즉, 놈은 자신에게 힘을 원한다고 말한 이들에게 ‘퀘스트’를 부여해 준다는 것까지 추측했다.
그리고 머더러들의 일부가 그 사념체를 만났고, 퀘스트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도 알아냈다.
쉬폰은 그 뒤 부터는, 가장 큰 세력인 로만제국에 첩자를 하나 심었다. 첩자가 물어오는 정보를 듣고, 로만제국의 동선을 끊거나 실행 중인 퀘스트를 끊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효과는 뛰어났다. 메인 퀘스트를 충족시킨 것이 확실한지, 차근차근 메인 퀘스트들을 클리어 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수확은, 전쟁의 여신 아테나 라는 존재에게 큰 신임을 받게 된 것. 그녀는 ‘균형’ 이니 ‘세계의 맹약’ 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했는데, 그 점에 대한 분석이 최근의 관건이었다.
-야 근데 형석아.
첩자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얘들 요새 지들끼리만 정보 공유 하는 것 같아. 나 같은 3~4군 애들한테는 별 쓸모없는 정보들만 주는데? 1군이나 2군 애들 동선은 도통 알 수가 없어. 첩자는 그의 매니저였다.
-그래?
-나 언제까지 첩자 해야해?
-당분간은 더 해 줘. 로만이 어디 갔는지는 알아?
-그건 우리도 몰라. 접속은 해 있는 것 같은데... 귓속말 같은 것도 차단 상태고. 간부들도 모른다고 시치미 떼는 것 같아. 아무래도 첩자 있는 건 눈치 챘나봐.
-흠...
-......술 사라.
-알았어.
쉬폰이 피식 웃으며 정면을 보았다. 최근 언노운이 크레이지도그랑 뱀파이어즈를 썰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놈은 대체.’
어쩐지 그가 싫지 않다. 언젠가 언노운이 이야기했던 대로, 쉬폰 역시 그가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약간, 독특한 느낌이 났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적지만, 그에게는 뭔가 짊어진 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왤까?’
어쩐지 잘 모르겠어서, 가만히 턱을 괸 채 생각해보다가 이내 시선이 저 편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수십 명의 유저들이 철갑을 입은 채 쩔그럭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복장이 우스꽝스러운데다, 뒤로는 웬 찹쌀떡 같은 것들을 달고 있었다. 시커먼 찹쌀떡들이 통! 통! 통! 뛰며 제 주인을 쫓아 가는 형색이었다.
-언노운형 보고 있지!
-언노운형! 우리가 왔어!
그들이 소리쳤다.
“......”
이 곳은 엘 로스의 던전 인근. 쉬폰은 근접한 큼직한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지순례 왔습니다!
저것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성지순례였다. 그들은 후다닥 달려가, 엘 로스의 던전 입구에 도착하더니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섰다.
-자자, 거기 흑마32번! 조금 왼쪽으로! 33번님은 양팔간격 좌우로 나란히 몰라요? 흑마44번님! 거기 뒤에 다른 유저님들 길 막지 말아요!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흑마법사가 열심히 오와 열을 맞추며 지시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그러자 가득 모인 흑마법사들이 저마다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언노운의 매드무비 첫 번째 장면을 따라하는 것 같았다.
“......”
쉬폰은 배를 잡고 웃었다.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던 그는, 흑마법사1번으로 보이는 대장이 외치는 소리에 다시한번 자지라졌다.
-자자! 다음 순례지는 미하 마운틴 근방 잉카 마을입니다? 우리의 신조는 뭐다?
-가오가 살아야 한다!
-간지가 나야 한다!
흑마법사 시리즈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외쳐! UN!
그리고 동시에 스크롤을 찢어 멋지게 사라졌다.
저것이 최근의 명물, 자칭 언노운 팬클럽 UN길드였다. 언노운이 최근 머더러를 썰고 다닌 지역을 성지순례한다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데다, 저런 기행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들의 반응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UN길드는 초보자를 돕는데다, 크게 민폐가 갈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들의 약간 정신이 돌아버린 것 같은 구호도 퍽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
문득.
쉬폰은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느낌을 받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내질렀다. 휘익!
검은 허공을 갈랐다. 날쌔게 검을 피해 낸 것은, 시커먼 갑옷을 입은 채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였다.
“......언노운.”
쉬폰이 깜짝 놀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잘 지냈어?”
바로, 태호였다.
태호는 투구를 벗으며 그에게 씩 웃어 보였다. 적의가 없음을 보이자, 쉬폰 역시 검을 회수했다. 태호는 방금 전 까지 흑마법사 시리즈가 모여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진짜로 저런 걸 하다니, 아무튼 못 말리겠군.”
라간이 보내준 동영상은 바로 저들 무리의 ‘성지순례’ 영상이었던 것.
“......날 어떻게 찾은 거지?”
쉬폰이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정확히는 ‘상급 머더러 헌터’ 로 찾았다. 다만 그 사실을 말 해 주면 그와의 사이는 좋아질래야 좋아 질 수 없는 법.
“다 방법이 있지.”
로 얼버무리기로 했다.
쉬폰은 빤히 태호를 보다,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말했다.
“요즘 잘 나가더라.”
“의외로 그렇네.”
“내게는 어쩐 일? 이젠 나도 조질 생각이냐?”
태호가 작정하고 자신을 타겟으로 삼았다면, 리얼포스를 플레이하는데 크나큰 지장이 생길 것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어린 기색은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라면, 기꺼이 맞서 싸우겠다.”
“제안을 하러 왔다.”
태호는 그의 의심을 일축했다. 쉬폰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제안?”
“그래. 일단 네 메인퀘스트를 내게 보여 줄 수 있겠냐?”
태호의 물음에 쉬폰이 팔짱을 꼈다.
“왜지?”
“우리가 같은 목표를 보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니까.”
“......”
쉬폰은 잠시 태호를 보다가, 반문했다.
“너, 요즘 크레이지 도그 애들 다 조지고 다닌다면서? 거기 부길마 둘이랑 길마 하나가 매일 일퀘 당하듯 뒈져 나간다는데.”
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머더러를 추적하는 스킬을 얻었다는 확신이 들더군. 내 위치도 그렇게 알아낸 것 같고.”
그의 추론은 정확했다.
“내가 거절한다면?”
그의 질문에서, 만약 거절한다면 나 역시 그렇게 타겟으로 삼겠다- 이 말이냐? 라는 의미가 느껴졌다.
태호는 그를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거절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겠지.”
쉬폰은 눈을 깜빡이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자신의 퀘스트를 태호에게 공유해 주었다.
공유 기능은 퀘스트 자체를 공유하는 게 아닌, 정보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공유된 퀘스트]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의뢰Ⅲ]
[: 혼돈의 힘을 깨우려는 타락한 이들을 저지하세요.]
‘예상대로군.’
그에게 퀘스트를 부여한 신은 아테나.
그녀는 다른 대부분의 신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혼돈의 힘을 억제하고 싶어함을 확신했다.
우방으로 만들어야 할 신이 하나 더 늘었다. 태호는 그 부분을 확실히 인지한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조만간 크게 이벤트를 하나 개최할까 한다.”
“이벤트...?”
쉬폰의 반문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벤트 내용은 추후에 알려 줄 테니, 일단은 듣기만 해. 아마, 그 이벤트가 시작되면 잠복해 있던 머더러 새끼들이 총 출동해 훼방을 놓으려 할 거야.”
쉬폰이 말 없이 태호의 말을 들었다.
“그때 날 도와줘. 서로간에 이득이지?”
“......”
쉬폰에게는 딱히 손해 볼 게 없었다.
한동안 즐겁게 투닥거리던 로만제국 놈들이 귀신처럼 숨어 버리고, 크레이지 도그와 뱀파이어즈는 언노운 손에 작살이 나 버렸다.
그런 입장에서 머더러들이 알아서 튀어나와 준다면, 오히려 이득일 수도.
다만, 의구심은 아직 남아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있어, 돈 많이 들 짓.”
태호는 자신의 정보와 자본, 그리고 신들을 이용해 ‘잊혀진 왕국’ 공략을 조금 더 앞당길 생각이었다.
신노스가 조금이라도 힘을 더 회복하기 전, 그대로 박살 내 버려야 한다. 대강의 계획은 머릿속에 슥슥 그려 놓은 상태이고, 중요한 건 포섭할 신들의 숫자였다.
태호가 생각한 목록은 이렇다. 우선, ‘속성의 지배자’ 라고 불리우는 총 여섯 명의 속성계열 신들. 그리고 로키, 아테나.
그들을 이용해 ‘유저를 움직인다’.
어차피 태호를 제외한 유저들에게 있어, 리얼포스의 세계는 그저 게임일 뿐.
돈 되는 게임!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신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메인 퀘스트를 부여하는 식으로.
이미 태호는 어둠의 신, 볼카노스를 움직여 흑마법사들에게 정화의 샘 퀘스트를 내린 바 있었으니 그것을 응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 용건은 이게 끝.”
“......하나, 물어볼 게 있다.”
쉬폰이 물었다.
“너, 로만 어디 있는지 알아?”
로만이라.
태호는 상급 머더러 헌터를 슬쩍 이용해, 리스트에서 로만을 선택한 뒤 위치를 살펴보았다.
‘사용자를 탐지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접속 상태가 아닐 때 뜨는 말이었다. 쉬폰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놈, 접속 중인데도 연락두절이라고 하더군.”
“흐응......”
그렇다면 기묘한데.
뭔가 석연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로만에게 거금을 뜯어낸 적이 있다. 그리고 놈들의 메인 퀘스트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그렇게 한 뒤엔 그쪽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을까?
“한번 알아 보지. 너도 새 정보 있으면, 연락 줘.”
태호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쉬폰은 태호를 빤히 보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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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태호의 친구창에는 ‘쉬폰’ 이라는 아이디가 추가됐다. 리얼포스에 접속한 이래, 세 번째 친구였다.
“내 아이디는 비밀로 해 줘. 되도록 가명으로 살고 싶거든.”
태호의 말에, 쉬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이 놈과 절대 척을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막 돌아서려는 태호에게 그가 물었다.
“너... 혹시 WOF 테스터기의 100% 일체감 보유자냐?”
태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 흑마 33번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