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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74화 (74/194)

< 싫으면 마십시오 >

“속성의 지배자라 불리던 다른 신님들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음.]

가이아가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속성의 지배자들인 우리는 서로와 그나마 교류가 있는 편이지. 정확히 말 하자면, 우리를 제외한 다른 신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말이 어울릴 듯 하구나.]

말인즉, 신계에서도 그들은 왕따 같은 존재라는 것 같다.

“왜입니까?”

그 말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옳지 않음에 맞섰기 때문이지.]

그 미소는 씁쓸해 보였다. 이내,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과거의 전투에서 패퇴했단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큰 힘을 내지 못 하는 것이지.]

“지상에는 이미 각 속성 마법사들이 있을 텐데요?”

[그것은 세계에 우리의 신력으로 남겨 둔 유산일 지어니. 우리가 힘을 잃어도 그 힘은 그대로일 것이다.]

즉, 일단 각 속성계열 마법사들은 신이 힘을 모조리 잃어도 그 성능을 발휘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볼카노스도 모든 힘을 잃었지만, 흑마법은 알아서 발달해 내려왔다. 비전 마법서가 없어도 구전으로 흑마법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불, 바람, 그리고 빛의 신님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의 신, 아그니는 화산섬에 제단이 있다. 또한 바람의 신 라르는 폭풍지대에, 빛의 신 돌로라는 성스러운 대지에 있었노라. 이는 과거의 기억일 지어니... 지금의 현 위치로서 맞지 않을 수 있지.]

태호는 그녀나 볼카노스가 하는 말에서 하나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같은 천계에 살고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하거나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닌가?

볼카노스도 가이아의 ‘과거 제단’ 위치만 기억하고 있을 뿐, 현 제단의 위치를 알지는 못 했던 것이 기묘한 일이다.

‘마치 천계에서도 서로 만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왜?

태호가 머리를 잠깐 굴리다, 물었다.

“지금 당신은 천계에서도 유배 당하셨군요.”

[......]

가이아는 태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당신 뿐 아니라 속성의 지배자라 불리는 신들 모두가 유배 당해 있는 거군요. 그래서, 당신들은 서로 만나서 정보를 나누거나 하기가 힘든 거에요. 맞습니까?”

[......그렇다.]

가이아의 말이 태호에게 확신을 주었다.

“대격변 이전, 당신들은 판타로스에게 덤볐죠. 그 과정에서 볼카노스 님은 힘을 모조리 다 잃었고요. 맞습니까?”

태호는 기억이 점점 더 조립돼 가는 것을 느꼈다.

“실질적으로 대격변이란 것은... 속성의 지배자들, 당신들과 혼돈의 힘의 사념체와 잔당들의 싸움이었군요.”

이유는, 태고적 전쟁 이후에는 판타로스의 본체는 권좌로 돌아가 잠든 시점이니까.

그렇다면 이상했다.

이미 이 세상은 태고 전쟁 이후 시점부터는 무한반복되는 중이다. 그들 왜 굳이 나서서 전쟁을 벌였던 걸까?

태호는 가이아의 그 따사로우면서도 슬픈 눈빛을 보며, 불현 듯 깨달아 버렸다.

-무의미한 희생일 뿐이에요.

문득, 아우슈리네라는 여자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

태호는 이제 이해했다.

추측컨대, 리얼포스라는 이 세계는 본래 실존하던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그 세계를 바탕으로 세계의 맹약들이 모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착해빠진 신들은 자신의 백성들이 같은 굴레를 돌며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즉.

천계의 높은 신들은 이미 판타로스를 패퇴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여러 차원을 무한히 돌며, 그를 가둬두는 것에 만족했다.

허나 그 명을 거역하고 공격해 들어가 ‘세계의 맹약’을 깨어 버린 신들에게 징계를 내린 것. ‘진짜 적은 천계의 높은 신들일 수도 있다.’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이 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신계에서는 고작 중위급 밖엔 안 된단다. 인간 세계랑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로키의 말이 떠올랐다.

추측은, 확신처럼 점점 신빙성을 띄어 가고 있었다.

“제 부탁을 들어 주셨다면, 가이아 님의 힘은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음.]

땅속성 마법사들은 불마법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대미지를 자랑했다. 결국 땅마법사는 불마법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선택률 높은 직업군이 될 것이다.

우선 땅마법사들에게 메인퀘스트를 부여했으니, 유행을 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가이아가 부여한 메인 퀘스트는 결국, 미래를 앞당기는 일환인 셈.

“다음에 뵙죠.”

[......기다리고 있으마.]

가이아가 사라졌다. 사라질 때 까지 그녀는 어쩐지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응당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세계는 이미 멸망을 향한 직행열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태호가 ‘메인 퀘스트’를 부여해서 뭔가를 해결해 나가려는 시도도 큰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다. 어차피 놈들은 혼돈의 권좌로 들어가, 다시 돌아옴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영원한 죽음을 선사해 줄 생각이니까.’

신들은 현재 수호자의 권능을 보유한 태호라는 인간에 대해 알지 못 하고 있었다. 상관 없다.

오히려 태호는 그것을 조금 더 철저하게 숨길 생각이었다.

왜냐고?

‘천계의 윗선들.’

그 흑막이 밝혀지기 전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호는 몸을 돌렸다.

* * *

그 다음에 찾은 것은 물의 여신 에테리얼이었다.

우선, 잊혀진 왕국에서 급부상하는 것은 냉기법사다. 물 마법사가 ‘에테리얼 마법서’를 이용해 대세로 떠오르는 것은 이미 예견돼 있던 일.

이 에테리얼 마법서는 이미 태호의 손에 들어와 있으니, 이것을 대량으로 증식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이것은 ‘워터 애로우’를 한번에 여러 개 소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 스킬 등급이 오르면 수십 발 이상의 화살도 만들어 낸다. 보통은 ‘메즈’ 기술밖에 없던 물마법사의 혁명과도 같은 아이템이었던 것.

그 다음엔, 다름아닌 불의 신 ‘아그니’ 때문이었다. 가이아는 아그니가 화산섬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과거의 화산섬은 유저들이 접근할 수 없던 지옥도였다.

그 곳은 활화산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하며, 사방을 지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첫째고 생물 자체가 아무것도 살지 않기 때문이 둘째다.

‘일리가 있어.’

태호의 기억 속엔, 불의 신은 리얼포스의 역사에 등장했던 바가 없다. 화산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엇다.

그러니까 상극의 속성인 물의 신에게 화산섬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볼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꼬셔야 해.’

에테리얼의 마음을 동하게 해야 한다. 그녀는 혼돈의 유산을 아주 선호한다. 그러니까, 그녀를 불러낼 때는 얼마 전 획득한 ‘피의 울부짖음’을 제물로 바치자.

본래 이것은 볼카노스에게 바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니, 볼카노스에게는 이미 얻어낼 수단이 충분히 늘어난 상태.

‘어차피 흑마법사는 더 늘어날 테고.’

지금 이 시각에도 늘어나는 것이 흑마법사다. 그러니까, 볼카노스는 그걸로 메우고 에테리얼을 포섭하자.

‘계산 완료.’

이곳은 신비의 니바 숲.

이 숲의 한가운데 큰 호수앞, 에픽 아이템을 교환해 주는 ‘은거기인’ 이 살고 있다.

태호는 유령표범을 멈춘 뒤 호수 앞의 허름한 나무판자 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은거기인이 저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누구시오?”

은거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태호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래 뜨곤,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태호도 인사를 한 뒤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강 상황 설명을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호의 생각에 동조했다.

“현명한 생각이시군요. 에테리얼 님의 추종자들에게 신력을 이용한 약속을 내리는 것이라...”

은거기인은 제법 감탄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태호의 손을 꼭 쥐었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혼돈의 주인의 사념체에게 저주를 받아 본 몸! 대륙이 불길하게 들끓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과거 그는 사념체의 저주를 받아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마 태호를 만나지 못 했더라면, 그는 어쩌면 ‘판타로스의 장군 중 하나’ 로 변했을 지도 모른다. 태호와 은거기인이 에테리얼의 제단으로 향했다.

태호는 그에게 ‘피의 울부짖음’을 내밀었다. 이는 크레이지도그의 부길마 멜랑꼴리를 조져서 얻은 것. 놈들이 알면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이다.

화아악!

제단에 빛이 강림하며, 에테리얼이 서 있었다.

[다시금 혼돈의 유산을 제물로 바쳤구나?]

“예.”

태호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원...]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신력을 이용한 약속 하나를 내려 주십시오.”

[응?]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녀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일리가 있다. 흐음... 이 정도 물건이라면 충분히 상응하는 가치로군.]

‘역시.’

태호는 고개를 다시금 끄덕였다.

이 신력이라는 것이 적용되는 범위에는, 그 목적또한 중요한 듯 싶었다. 만약 ‘혼돈의 힘 억제’ 라는 명분이 없다면, 에픽 아이템 하나에 유저 범위군에 메인 퀘스트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저는 부여된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수행한 만큼의 가치를 획득한다. 바로, 경험치였다.

태호도 겪어 본 바, 메인퀘스트가 주는 경험치는 타 서브 퀘스트의 경험치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메인퀘스트로 인해 리얼포스의 세상이 바뀌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npc들의 서브 퀘스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

“그리고, 여쭤 볼 게 있습니다.”

[무엇을?]

“에테리얼 마법서의 제조법입니다.”

[제조법이라?]

그녀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태호는 그녀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제조법을 알려 주시면, 당신의 추종자들이 현재의 열 배는 늘어날 겁니다. 신력이 매우 빠르게 회복됨은 당연한 일이겠죠.”

[말재간이 발동중입니다.]

“지금의 물 마법사들은 솔직히 크게 인기있는 직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미지가 약해 오직 파티플레이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테리얼 마법서가 보급되면 많이 완화될 겁니다.”

태호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화아악!

그녀가 태호에게 에테리얼 마법서의 제조법을 하사했다.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 같은 것인데, 제조식은 아주 단순했다.

‘물의 기운의 정수30개, 망가진 잡동사니 1000개, 마력의 결정체 50개.’

마력의 결정체는 잊혀진 왕국이 등장한 이후 새로이 생겨난 던전들 중 일부에서 떨궈지는 재료 아이템.

이는 동시에 ‘야타카라스’ 의 성장 재료이기도 했다. 문제는 물 기운의 정수인데, 그건 대충 구하는 루트를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화산섬에 들어갈까 합니다. 이와 같은 제안을 불의 신 아그니 님께도 하려고 하니까요. 방법을 아십니까?”

[아그니!]

그녀가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녀석에게 말인가!]

“예.”

[흐음... 확실히 예전 아그니의 제단이 있던 곳은 화산섬이 맞긴 하다만...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지는 모르겠구나. 나 역시 확실하지 않다.] "일단은 가 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불의 기운을 억제하는 나의 가호가 필요할 지어다. 무엇을 바치겠느냐?]

여기서 다시 문제로군.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약속을 해 주십시오."

[...약속?]

"당신의 추종자들이 늘어나, 신력을 회복하게 된다면 제게 가호를 내려 주시는 걸로."

[흐음...]

"싫으면 마십시오. 저는 다른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에테리얼 마법서를 만들어 배포해야 하는데, 시간과 노력과 돈이 많이 들 겁니다. 저는 현재 볼카노스님과 가이아 님의 총애를 동시에 받고 있으니, 그분들께 다른 방법을 알아 볼랍니다."

[......!]

배짱을 튕겨 보았다.

어차피 제조법도 알았고, 그녀는 쉽사리 태호에게 저주를 내리지 못 할 것이다. 일단은 볼카노스의 총애를 받으며, 가이아의 총애까지 동시에 받고 있는 몸이니까.

[너는, 확실히 재미있는 인간이다.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왜인지 아느냐?]

"......"

에테리얼은 빙긋 웃었다.

[네 마음이 고맙기 때문이다. 네 목적이 어찌 되었든, 혼돈의 힘과 기꺼이 싸워 주려는 네 마음이 고마워서. 세계의 맹약과 균형의 힘 때문에 네게 많은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없는 것이 미안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신력을 이용하여 너와 약속하마. 다만, 조심하는 것이 좋다. 아그니는... 굉장히 괴팍한 녀석이거든.]

괴팍하다?

< 싫으면 마십시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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