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랑은 안 논다! >
[오오.]
땅의 여신 가이아는 태호가 다시 돌아온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땅 기운의 정수 100개’를 바친 태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새로 얻어 온 정수를 바칩니다.”
[고맙구나.]
가이아가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뒤, 신력을 회복하고는 안정된 얼굴이 됐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여러 모로 고민을 하였다. 네게 도움이 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에 대한 부분이었지.]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게 이것을 내리겠다.]
그녀가 내민 것은 신발 한 켤래였다.
[등급 : 에픽]
[종류 : 방어구(발)]
[이름 : 대지의 걸음]
[가이아 님, 이 신발은 제겐 너무 큽니다.-초보 학자, 카실론]
[옵션 : 기본 이동속도가 30%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가속 효과를 얻어, 10초 간 이동속도가 150% 증가합니다.]
[가속 효과가 발동되면 시전자에게 가해진 모든 상태이상이 해제되고, 전투상황이 해제됩니다.]
‘흠.’
대지의 걸음이라는 것은 태호가 과거 가지고 있었던 장비였다. 이것이 본래 가이아의 물건이었을 테지만, 태호는 이 장비를 과거 강민에게 구매했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단다.]
가이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신력이 모자라더라도, 사실 정수 100개에 에픽을 교환해주는 것은 가성비가 맞지 않았다.
신들에게 큰 손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것은, 가이아가 태호를 느끼는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리라.
‘의외의 수확이군.’
대지의 걸음은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특히 PVP시에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자랑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탈것을 탄 상태에서도 발동되니까.’
게다가 상태이상 공격을 받으면 탈것이 자동으로 소환해제가 되는데, 그 상황에서도 훌륭한 성능을 발휘할 터다.
‘일단 킵.’
제물로 바치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킵해 두기로 했다.
“다음에 정수를 또 모아 바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마.]
가이아를 뒤로 한 채 돌아섰다.
어차피 땅 마법사는 2차 확장팩이 시작됨과 동시에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현재의 마법사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단연코 불마법이었다.
물마법은 태호의 언론플레이로 조만간 흥행할 것이 뻔했으니 논외로 치고, 흑마법은 이미 주류의 반열에 올라섰다.
바람마법은 늘 꾸준히 인기가 있다. 바람이란 매력적인 속성으로서, 굳이 더 살려 줄 필요가 당장은 없다.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은 백마법, 즉 힐러 계열이다.
힐러 계열의 인기가 없는 이유는 성능이 나쁘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힐러와 탱커를 선택하는 유저가 언제나 적기 때문이었다.
이는 레이드 던전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어차피 힐러와 탱커가 귀족계열에 속하게 되는 건, 모든 RPG 게임의 미래였다.
‘일단은 물마법 정도까진가.’
언론플레이로 직업군을 띄우는 것도 근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직업군에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활용법이 바뀔 방법이 있지도 않다.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일어날 무렵이었다.
[경매장에 등록한 아이템이 판매되었습니다.]
[경매장에 등록한 아이템이 판매되었습니다.]
에테리얼 마법서 두 개가 팔렸다. 물 마법사들은 최근 며칠 사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에테리얼 마법서는 당분간은 태호 본인이 직접 만들어 팔고, 그 다음에는 제조법을 공유할 것이다.
제조법이 공유된 아이템은 모든 이들이 그 제조법을 이용해 만들 수 있게 바뀐다.
즉.
에테리얼 마법서는 금세 대중에게 풀릴 것이다.
지금 당장 물 마법사들에게는 두 가지 희망이 생긴 셈이다.
태호가 에테리얼에게 부탁해 부여한 ‘메인 퀘스트’ 가 첫째.
공격기술을 서포트해주는 ‘에테리얼 마법서’ 의 존재가 둘째.
* * *
가이아를 떠난 태호는 곧바로 에테리얼을 찾았다.
니바 숲에 기거하는 은거기인이 태호를 보자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문제는, 에테리얼을 소환할 때 건네야 할 에픽이었다. 가성비가 그렇게 좋은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제물에 대해 고민하던 그 무렵이었다.
“오, 다시 오셨군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에테리얼 님께서 남기신 전언이 있었습니다.”
“전언이요?”
“다시 당신이 이 곳을 찾을 때,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오호.”
그래도 융통성이 있는 신이다.
그렇게 다시 조우한 에테리얼은 어쩐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네 말대로군. 최근 나의 추종자들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힘들구나.]
“그럼...”
태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녀가 먼저 말했다.
[너와 한 약속을 지키마.]
그녀는 흔쾌히 태호에게 부여했던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해 주었다.
[퀘스트 완료]
[물의 여신, 에테리얼의 의뢰]
[경험치 획득]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호의 레벨은 이제 296이다.
300레벨이 되면 슬슬 5차전직 시기였다. 아마, 흑마법사의 탑에서는 전직을 빌미로 이런 저런 것들을 시킬 터. 아마 그것은 흑마법사의 비전 마법서 발굴이 될 확률이 높았다.
[자. 네게 나의 가호 하나를 내려 주겠노라.]
에테리얼은 군말 없이 태호에게 가호를 내려주었다.
[패시브 스킬 : ‘물의 방어막’를 획득했습니다.]
[패시브 : 물의 방어막]
[설명 : 물의 여신 에테리얼의 마음에 들어, 그의 권능을 아주 조금 부여받았다.]
[마력에 비례한 물의 방어막을 얻는다.]
태호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맙다.]
“그럼, 저는 불의 신께 가 보겠습니다.”
에테리얼과 헤어진 뒤, 태호는 불의 신 아그니에 대해 그녀가 이야기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조심하는 것이 좋다. 아그니는... 굉장히 괴팍한 녀석이거든.
-어떤 면에서 괴팍하다는 겁니까?
-그는 지극히 기분파이다. 그는 지극히 패도적이고, 도무지 종 잡을 수가 없다. 너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단다.
그녀의 말에서, 태호는 아그니가 제법 불 속성에 잘 맞는 신이라는 생각을 했다.
허나 그렇다고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불 마법사는 현 리얼포스의 마법사들 중, 가장 인구분포가 많다.
뛰어난 대미지 딜링 외엔 모든 것이 모자라다. 하지만 불 마법은 장점이 모든 단점을 덮는 존재였다. 화끈한 한 방! 그것의 로망이 살아 있었으니까.
다만 그 외의 모든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생존기, 광역기를 비롯해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한 채 대미지 딜링에 몰빵한 존재가 불마법사들이다. * * *
화산섬.
북동 바다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외로운 지옥도. 아무리 태호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겪었다지만, 솔직히 화산섬은 엄두가 안 나던 것이 현실이었다.
“가 볼까.”
태호는 북동 해변가에서 배를 한척 빌려, 바다 위에 띄웠다.
하늘은 맑음!
태양이 따사롭게 내리쬐지만, 쌀쌀한 공기를 막을 수는 없다. 현재 리얼포스는 1월달, 현실과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북쪽 빙하지대의 한기를 고스란히 받는 지역이었다.
태호는 배를 띄운 뒤, 어둠 기사단 넷을 소환했다.
“자, 너희는 지금부터 혼신의 힘을 다 해 노를 젓는다.”
[분부대로.]
녀석들이 하나씩 노를 잡고 힘차게 저어 갔다.
태호는 그런 배 한켠에 앉아, 인벤토리 창에 남은 ‘마력의 결정체’를 확인했다.
이번에 에테리얼 마법서는 각 각 1만골드에 올려 두었다. 두 개를 올려 놓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팔린 것을 보니, 가격은 조금씩 더 올려도 될 듯 싶다.
즉. 수수료를 떼면 대충 18000골드 정도를 번 셈이었다.
현금가치로 치면 1억 2~3천 정도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어쩐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 하는 자신이 어색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남은 개수를 확인했다.
마력의 결정체는 이제 70개 남았다.
이것을 모으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니, 태호는 남은 것을 ‘야타카라스’ 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샤아악!
태호는 우선 아르카네를 소환했다.
[바다다!]
아르카네는 바다가 좋은지 태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바다 왔어? 놀러 왔어?]
“응 뭐 비슷하지.”
태호는 빙긋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르카네는 태호가 좋은지 가만히 올려다 보며 방글방글 웃다가, 물 속을 가리켰다.
[물고기 잡아? 조질 거야?]
“그러렴.”
태호는 아르카네에게 욕을 가르치면 안되겠다고 다짐하며, 언젠가는 저 조진다는 말도 꼭 교정해 줘야겠다 생각했다.
아무튼.
화아악!
뒤이어, 야타카라스가 소환되었다.
[빼애액!]
놈은 소환되자 마자 굉음을 지르며 사방 팔방을 퍼덕거리며 날아다녔다.
[이런 젠장 속았다악! 빌어먹을 인간에게 속았다악!]
“......”
[나를 아공간에 가두어 두고, 한 번도 부르지 않는다악!]
태호는 재차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야. 근데 여태까지는 너 나오면 금방 죽었을 상황들이라서.”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태호도 반쯤 잊어먹고 있었다.
[......까악! 거짓말하지 마라악!]
눈치가 제법 빠른 놈이었다.
[안되겠다악! 계약은 파기다악! 너랑은 안 논다악!]
“그래? 싫음 마라.”
태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마력의 결정체를 놈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야타의 두 눈동자가 결정체를 따라 왔다 갔다 움직이더니, 목소리가 바뀌었다. [나는 나의 주인님이 좋다악.]
“......”
[좋은 분이시다악. 나쁜 야타! 나쁜 야타!]
야타가 자학하는 시늉을 하자, 태호는 피식 웃어 버리며 결정체를 하나씩 주기 시작했다.
[Lv.30]
[정예]
[까마귀 왕, 야타카라스]
하나 둘 셋 넷 먹이기 시작하자, 녀석의 레벨이 1 올랐다.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네.’
[까악! 맛있다악! 까아악!]
[맛있어? 사과 맛이야?]
물고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르카네가 눈을 반짝이며 태호의 팔을 잡았다.
[나도 줘.]
태호는 소녀에게도 하나 내민 뒤, 야타카라스에게 나머지를 모조리 먹였다.
[Lv.40]
야타의 레벨이 40까지 올랐다.
‘100은 넘겨야 등에 올라탈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나는 탈것을 얻게 된다면, 태호의 행동반경은 훨씬 더 넓어질 터.
‘할 게 진짜 많네.’
[맛없어...]
아르카네는 마력의 결정체를 요모 조모 쳐다보면서 핥아 보기도 하고, 깨물어 보기도 하다 흥미를 잃은 듯 슬픈 얼굴을 했다.
그렇게 간만에 떠들썩한 분위기로 나아가던 배가 멈춰 선 것은 하늘이 어두침침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주군.]
어둠의 기사 하나가 입을 연 것이다.
태호는 하늘을 흘끔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
아니다. 저것은, 화산재와 연기가 만들어낸 하늘이다. 시커먼 하늘에서 하얀 눈 같은 것이 내렸는데, 화산재가 확실했다.
“이 쯤이군.”
저 편.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섬 하나가 보였다. 높다란 봉우리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새어 오르며, 간혹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봉우리 한켠에서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리며 긴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화산섬이군.”
화산섬에 도착했다.
* * *
배를 근처에 가져다 대고, 곧바로 소환을 해제했다.
[뜨거!]
아르카네가 깜짝 놀라기에, 소환수들 역시 바로 집어 넣었다. 재수 없게 아르카네가 용암불에 소환해제 당해 강제귀환이라도 당하게 되면, 소녀의 아버지를 또 만나게 될 거다.
[물의 방어막이 발동 중입니다.]
뜨거운 것을 직감했는지, 패시브 스킬 ‘물의 방어막’ 이 자동발동되었다.
화산섬은 생명체라는 것이 살수 없는 곳. 태호의 전신에 물로 만들어진 방어막이 생겨나, 치이익- 하며 열기를 상쇄했다.
쿵- 쿠쿠쿵- 섬은 불안전해 보였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봉우리 쪽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아무래도.’
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 편을 올려다 보았다.
‘저쪽에 있을라나?’
저 높은 봉우리. 저 부근에 불의 신 아그니의 제단이 있을 확률이 높다.
< 너랑은 안 논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