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보는 또라이 >
덥다.
가상현실에서는 현실처럼 덥다는 체감보다는 ‘착각’을 한다. 말 그대로 그건 착각일 뿐인데, 일체감 100%인 태호는 훨씬 더 그 착각이 리얼한 편이었다.
“독특하네.”
땅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불지옥이다.
치이이익-!
마력이 감소돼 가며 사방의 열기가 막아지고 있는데, 의외로 그 소모가 어마어마하진 않았다. 리젠되는 마력량을 고려해 본다면 거의 계속해서 유지가 될 듯 싶었다.
화산섬의 봉우리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던 태호는 결국 그 정상 부근에 멈춰 섰다.
저 안쪽에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보였다. 저 안으로 떨어지면 아무리 태호라도 큰 답 없이 죽을 것이다.
“흠.”
아닌가.
어쩌면 데스나이트의 심장으로 버틸 수 있으려나.
태호는 그 용암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지형은 분명히 쓸모가 있을 듯 하여, 곰곰이 생각에 잠겨 근방을 쭉 둘러보았다.
‘이건가?’
그리고 그 한켠에 놓여진 큼직한 제단 하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제물이다.
-그는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다만... 너를 시험할 확률이 높다.
에테리얼의 말을 떠올리며 태호가 제단 앞에 섰다.
화아아악-!
문득.
사방에 불꽃이 팍! 하고 튀어오르며 제단 근처로 모여들더니,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불꽃은 점점 더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어 갔고, 이윽고 한 남자가 되었다.
“......”
생김새는 마치 불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머리카락은 치솟는 불길처럼 일렁거렸고, 두 눈은 용암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양 팔과 다리에서는 쉼 없이 뜨거운 열기가 샘솟았다. 바로 저게, 불의 신 아그니다.
[크하하하하! 뭐냐, 뭐야! 인간이냐! 어떻게 여기에 왔지?]
아그니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에테리얼 님께 물의 방어막을 받았습니다.”
[에테리얼! 걔는 아무튼 인간에게 약해서 탈이라니까. 아무튼, 이 곳을 찾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그는 거친 목소리의 사내였다. 그리고 기묘할 정도로 위압감이 들기도 했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만나뵙게 돼 영광입니다.”
[영광? 큭, 크크크크큭!]
그가 광소를 흘렸다. 이내 꿰뚫는 듯 한 얼굴로 물었다.
[여지껏 만나 온 놈들에게도 그런 말을 했냐? 그래서 그렇게 가호를 치덕치덕 두르고 다니는 거냐?]
“......”
심사가 배배 꼬여 있는 듯 하니, 언행을 조심하기로 했다. 어줍잖게 아첨하는 것은 독 같다.
[뭐, 상관없다. 네놈이 나와 대화를 하려면, 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기꺼이 신력을 이용해, 네 앞에 나타나 주었기 때문이다. 알겠냐?]
“......예.”
그의 시험. 태호는 부디 평범한 것들이길 기원하며 물었다.
“뭡니까?”
[저 아래, 들끓는 용암이 보이는가?]
“......”
보인다.
저거에 떨어지면 죽겠다고 생각했었다. [뛰어 봐라.]
“......”
태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을 벅벅 긁던 태호가 재차 물었다.
“그냥 뛰면 됩니까?”
[그래. 뛰면 된다.]
하아.
일체감 100%인 지금, 정말 별로 하고싶지 않았지만 별 수 없는 노릇.
태호는 별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린 다음, 용암구덩이 속으로 힘껏 달려들었다.
펑-!
마치 진흙에 달려든 것 마냥, 태호의 몸이 용암에 빠졌다.
치이이이이이이익-!
그 순간 어마어마한 열기가 태호를 덮쳐왔다. 물의 방어막이 열기를 막아내긴 했다만, 마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마력이 잠시 후 고갈되고 나서는 태호의 망토가 전신을 휘감았다.
[순수의 강철 망토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완전상쇄되었습니다.]
순수의 강철 망토가 만들어 낸 보호막도 사라질 무렵. 태호는 전신이 뜨끈해진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사라져 가는 생명력을 바라보았다.
‘자연재해에 당하면 장군급도 금세 골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목숨 정도는 버릴 수 있다. 어차피 이제 아그니만 잘 구슬러 일만 해결하면 일차적 목표는 달성이었다.
“......”
생명력이 일정범위 이하로 내려가지를 않는다. 태호는 문득 그런 자신이 웃겨 킬킬킬 웃었다.
이유는, 데스나이트의 심장 때문이었다. 이 전무후무한 개사기 아이템은 태호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생명력이 깎일 때 마다 모조리 회복시켜 버리니, 마치 용암 속에서 수영이라도 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태호는 그대로 제법 느긋하게 저 위로 외쳤다.
“거 언제까지 있어야 합니까?”
[크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내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오너라!]
쿠-웅!
용암이 터지며 마치 분수마냥 태호의 몸이 위로 튕겨져 나왔다. 태호는 그 반발력으로 봉우리 위에 안착해, 전신에 지글거리며 남아 있는 용암들을 털어냈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여러 년놈들에게 이것 저것 잘도 구해 주워 입었군.]
“과찬이십니다.”
[큭, 크큭. 그래. 이야기를 나눠는 주마.]
아그니는 태호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팔짱을 낀 채 그렇게 말했다.
태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신력을 이용한 약속을 내려 주십시오.”
[뭐라? 왜?]
“현재 울크랜드에 대장군 신노스가 있습니다. 저는 속성의 지배자들의 추종자들을 이용해, 놈을 초전박살 낼 생각입니다.”
콰아아앙-!
용암이 한번 더 터졌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용암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잿가루를 날렸다.
[신노스라.]
아그니가 씨익 웃었다.
[운명의 굴레가 뒤틀려버린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신노스가 대륙에 벌써 튀어나왔단 말이냐? 으하하하하!]
“그렇습니다.” [그놈, 그렇다면 균형의 힘을 감당할 시간도 없겠구나. 쥐죽은 듯 있어야 하겠어.]
균형의 힘을 감당한다?
태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것을 감당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네가 만나온 신들은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상황이 극히 제한적이다. 왜인지 아느냐?]
그건 균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신이 마음대로 리얼포스의 땅에 힘을 쓰는 것은 불가하다. 잘은 모르나, 이유나 대가 없이 힘을 쓴 뒤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있는 것 같았다.
“균형에 위배돼서?”
[놈들 역시 마찬가지. 다만, 놈들은 그 균형의 힘을 어느정도 무시하는 특성을 타고났지. 혼돈이란 원래 그런 것! 허나 지금의 신노스라면 그것도 힘에 겨울 터!]
아그니가 히죽거리며 웃자, 사방에 용암이 마구 폭발하며 튄다. 마치 그는 이 활화산 그 자체 같았다.
‘그래서 그 놈이 생각보다 조용했구나?’
태호는 약간의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신노스가 당장 튀어나와, 대도시들을 초토화 시키지 못 하는 이유가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 재앙이 벌어졌을 텐데 말이다.
굳이 머더러들을 이용해 뭔가를 하는 것도 솔직히 의문이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일말의 해소도 되는 편이었다.
‘균형의 힘을 견디는 것.’
그것은 엄밀히 따져, 균형파괴자들이 후폭풍을 견디기 용이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혼돈의 힘 자체가 그런 성질이기 때문!
[네놈은 지금, 그 신노스를 해치울 생각이다 이 말이냐?]
“예.”
[큭, 크크크큭. 이건 간만에 보는 또라이군. 간도 크다, 신들을 이용해 추종자들을 움직이다니? 그런 발상은 또 처음이군.]
아그니는 점점 더 태호가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이유를 추측컨대, 아무래도 태호가 하는 짓들이 상식에서 한참이나 어긋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장 태호도 과거엔 리얼포스 부동의 랭킹1위였지만, 이런 발상은 하지 못 했다.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바쳐야 할 제물, 그리고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은 일개 유저가 할 발상은 아니었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내 신노스와는 여러 악연이 있지. 그 개새끼를 꼭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 한 것이 여지껏 한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거래가 남았군요.”
태호는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신노스의 목숨! 너는 그것의 목숨줄을 반.드.시. 끊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 뿐! 그것으로 균형은 맞춰지노라!]
“그러죠.”
[으하하하하하! 약속을 내리겠다!]
파아악!
세상이 불길에 뒤덮히는 듯 하더니, 태호의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9급 퀘스트]
[메인 퀘스트]
[대장군 신노스 격살(擊殺)!]
이내,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태호의 코 앞에 도달해 있었다. 숨결 하나 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허나, 그를 격살하지 못 한다면 나는 네게 큰 저주를 내리리라......! 그것이 균형의 대가다.]
“바라던 바군요.”
태호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역시나 마음에 드는지, 아그니는 껄껄거리며 한참을 웃다가 소리쳤다.
[자, 그럼 꺼져라, 또라이여!]
파악!
어느새 그가 사라지고, 화산섬에는 태호만 남아 있었다.
“휴.”
아그니는 태호를 보고 또라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아그니는 더한 또라이였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쉬웠다. 아그니는 큰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여기는 신노스 척살의 가치는 에픽 아이템 이상일 지도 모르겠다. 그의 신력은 매우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굳이 다른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번 교섭에서 여러 정보들을 입수했기에, 태호는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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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마법사의 새로운 메인 퀘스트 등장!]
[이 역시 ‘잊혀진 왕국 클리어!’ 의도된 메인 퀘스트인가?!]
팬사이트에는 연일 화제였다.
[대부분의 직업군들에게 부여되는 ‘신규 메인 퀘스트’ 의 보상은, 막대한 경험치로 알려져... 클리어 하는 것이 무조건 레벨업에는 이득!]
[노블레스 길드, 레어 던전 공략 성공!]
[PPV 수익만 억대로 알려져...]
이 시기의 리얼포스는 격변의 시기였다.
여기 저기에서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유저들이 등장하고, 길드들이 출범했다.
[일본의 레이드 전문길드, ‘무라사메’ 잊혀진 왕국 레이드에 출사표 던져...]
각지의 길드들이 잊혀진 왕국 공략에 발벗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에테리얼 마법서, 물 마법사의 새로운 희망! 입수방법에 대한 스무 가지 추측들.]
세계는 능동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태호가 던진 단서들이 하나 둘 흘러흘러, 리얼포스의 미래가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의도한 대로 맞아 떨어지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남은 것은 시간이었다.
유저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적당히 성장해, 잊혀진 왕국을 공략해 나갈 시간.
막 생각을 정리할 무렵이었다.
쿠우우우웅-
증오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 맑은 하늘을 만끽하던 태호는 문득 하늘을 시커멓게 가리는 거대한 비행체를 보며 씨익 웃었다.
비행체의 크기는 그야말로 한 개의 지역을 떼어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하늘은 시커멓게, 그야말로 빛 한 점 안들어올 정도로 꽉 찼다.
저 비행체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엘린의 공중정원!”
하늘에 떠 있는 섬, 리얼포스 최초로 등장할 ‘레이드’ 등급 던전!
그것이 대륙의 하늘을 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 간만에 보는 또라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