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들 해 주시라고요. >
말 그대로 머더러 천지!
안타라스 슬램은 리얼포스의 대도시 중, 유일하게 머더러 패널티가 없는 곳이었다.
태호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이는 놈에게 닿았다. 란마는 어쩐지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아이템을 모조리 처분하는 듯 경매장과 창고를 왔다갔다 하던 놈은, 한참 동안 사방을 경계하다가 지상탈 것 하나를 소환해 달리기 시작했다.
막 안타라스 슬램을 벗어난 놈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태호는 멀찍이서 그를 지켜보다, 천천히 다가섰다.
“아.”
란마는 태호를 보더니 어쩐지 반기는 얼굴을 했다.
“......?”
“야, 오늘도 나 죽일 거냐?”
태호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죽여라.”
무슨 꿍꿍이지?
태호가 팔짱을 낀 채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입을 열었다.
“요, 요즘 이상해.”
“이상하다?”
“그래. 자, 자꾸 눈만 감으면 이상한 목소리 들리고... 아, 악몽 꾸고... 젠장. 캐, 캐릭터도 안 지워지고.”
캐릭터가 지워지지 않는 건 당연한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리얼포스는 원래 에픽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으면 캐릭터 삭제가 불가능하다.
“자세히 말 해 봐.”
란마는 천천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 * *
란마, 김영준은 올해 스물 다섯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사회생활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게임에서 푸는 정말 평범하디 평범한 청년 .
리얼포스라는 가상현실 게임이 등장한 후, 그는 그 게임에 금세 매료되었다. 다름아닌, PK라는 시스템의 존재 때문이었다.
PK가 존재하는 게임은 물론 엄청나게 많았지만, 이렇게 PK에 대한 보너스가 많은 게임은 또 처음이었다. 그는 금세 리얼포스에 푹 빠져들어, PK의 재미를 느꼈다.
게임이 오픈한 이래, 꾸준히 PK를 하다 보니 동료들이 생겼다. 그는, 그들과 함께 모여 길드를 만들었다. 크레이지 도그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길드였다.
그리고 어느날.
게임을 접속해 평소처럼 PK를 즐기던 어느 순간, 기괴한 괴물을 만나게 되었다.
마치, 게임이되 게임이 아닌 것 같은 그런 괴물.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판타로스 님의... 사념체...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괴물은, 김영준에게 이상한 제안을 했다. 힘을 원하느냐? 라는 뜬금없으면서도 삼류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만 한 제안이었다.
나쁠 것 없다, 라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어쩐지 혹하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어, 그렇노라 대답했다.
그러자 그에게는 독특한 메인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메인 퀘스트를 따라 여러 마을을 불지르고, 타락시키고, 유저를 학살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꽤 재미있지만 다소 이제 질린다고 생각할 무렵, 메인 퀘스트의 보상이 주어졌다.
에픽 아이템!
1000명의 영혼을 바쳐야 개방된다는 기묘한 에픽 아이템을 얻게 된 것이다. 에픽이라는 등급은 리얼포스에 존재하는 최종등급! 솔직히 무척이나 기뻤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리얼포스에 대한 집착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본디 대학 4학년의 학생이었고, 방학 기간에도 계절학기나 학원 등의 스케줄이 제법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헌데 그 에픽 아이템을 획득하고 메인 퀘스트를 더 진행하던 어느 순간부터는, 도저히 리얼포스를 끊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마치, 금단증상처럼 접속해 있지 않으면 가슴이 뛰고 불안했다. 현실에서도 눈 앞에 항상 리얼포스가 아른거렸고, 꿈을 꿔도 리얼포스에 대한 꿈을 꾸었다.
밥도 먹기가 싫고, 잠도 자기가 싫고, 현실의 모든 생활을 하기가 싫을 정도로 그 세계가 그리웠다.
-오라... 나의... 종이여...
눈을 감고 있으면, 환영처럼 예전에 만났던 그 괴물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에게... 오라...
엄청나게 달콤한 유혹처럼, 그는 리얼포스를 갈구하게 되었다. 메인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그 에픽 아이템을 마치 평생의 보물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왜일까? 이유는 그 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리얼포스에 접속해 PK가 하고 싶었다. 유저를 찌를 때의 그 손맛과, 비명소리가 너무나도 그리웠을 뿐.
언노운이라는 놈에게 계속해서 죽어나가도, 접속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이야기를 듣고 난 태호는 미간을 긁적였다. 태호는 대강 흐름을 알 듯 했다. 혼돈의 유산을 보유한 유저들은 비슷한 상황을 겪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너희 길마는 멀쩡하던데?”
“기, 길마도 마찬가지다. 멀쩡한 척 하는 거겠지.”
“흐음... 공론화 시킬 생각은 안 해 봤어?”
“왜 안 했겠어?”
란마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거 해 봐야 누가 알아나 주냐? 물증이 있어 심증이 있어? 환청이 나한테만 들리지 다른 사람한테도 들려?”
그건 일리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입증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태호가 추측하기에도 메인 퀘스트를 부여받은 머더러로서 에픽을 획득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이미 전 세계는 리얼포스의 광풍에 휩싸여 있다. 고작 몇 명의, 그것도 인식 최하위권의 머더러들의 발언으로는 아무 힘을 얻기가 힘들다.
“게다가...”
란마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내 메인 퀘스트랑 우리 길드원들 거랑은 달라. 정확히는... 간부진들 거랑 부하들 거랑 다르다는 게 맞겠지.”
“다르다고?”
“그래. 진행하는 과정은 엇비슷한데... 보상이 달라. 걔들 거엔 에픽이 없어. 간부진들 퀘스트는... 보, 보여줄게.”
란마가 군말 없이 자신의 퀘스트 창을 태호에게 공유해 주었다.
[공유된 퀘스트]
[혼돈의 주인, 사념체의 의뢰Ⅴ]
[: 혼돈의 유산을 이용하여 리얼포스의 대륙에 존재하는 유적지와 마을, 몬스터를 타락시켜라. 그 과정을 거쳐 유산을 온전히 일깨워라.]
태호는 그 퀘스트를 따로 스크린샷해 찍어 두었다.
“너, 너는 알아? 이 증세가 뭔지?”
“......”
“벼, 병원에 갔더니 게임 중독이라더군. 빌어먹을, 그,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태호는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희 부길마 중에, 그거 에픽 떨군 놈 있잖아. 그놈은 어떤데?”
“멜랑꼴리? 걔는... 그거 떨구고 나서 악몽도 안 꾸고 환청도 안 들리게 됐다고 했다.”
“......”
“바로 캐삭하고 접었지. 더, 더 의아한건...”
란마는 어쩐지 공포스러운 얼굴이 됐다.
“그 놈... 캐삭하고 마치 꿈이라도 꾼 듯 한 것처럼 말하더라고. 환청도, 악몽도, 그냥 꿈처럼 잊혀진 것처럼.”
“......”
보통 일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너... 멜랑꼴리꺼 에픽 주워먹고도 멀쩡한 거냐? 넌 괜찮아?”
란마의 물음에 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문이었다.
‘나는 괜찮은데?’
여지껏 혼돈의 유산들을 여럿 손에 넣었고, 지금도 이미 하나는 가지고 있지만 멀쩡했다.
‘나는 다르구나.’
아무래도 수호자의 힘 때문인 듯 하다. 태호는 그에게 물었다.
“너, 로만 어디 있는지 알아?”
“로만... 나도 몰라.”
이것 저것 추궁해 보았는데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죽인다? 다음에 접속하면 이쯤에서 대기하고 있어, 바로 찾아 올 테니까.”
“알았어. 주, 죽여 빨리.”
쾅!
강화된 중독과 폭사가 이어지며 란마가 죽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떨구지 않았다.
[보유중인 스킬 ‘상급 머더러 헌터’ 가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그리고 고대하던 머더러 헌터 스킬의 업그레이드 소식이 들려왔다.
[패시브 : 최상급 머더러 헌터]
[머더러를 상대로 할 때 경험치 획득량 150% 증가.]
[최고 단계의 업그레이드입니다.]
[업그레이드 최종단계]
[초급 : 머더러들의 ‘리벤지 퀘스트’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현재 비활성화) 또한, 자신이 살해한 ‘머더러’중 단1명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중급 : 머더러들과 일정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귓속말 및 파티 대화 등’ 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습니다.]
[상급 : 머더러들을 살해할 시, 머더러가 보유한 ‘가장 등급이 높은 아이템’ 이 높은 확률(현재10%)로 드랍됩니다.] [최상급 : 머더러가 보유한 현재 아이템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머더러 헌터는 이제 최종단계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가 바뀌었지만, 우선 ‘대화 엿듣기’ 가 비약적으로 좋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래는 근접해야만 하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져도 되는 듯 하다.
또한, ‘가장 등급 높은 아이템 떨굴 확률’ 이 3%에서 10%로 상승했다.
마지막으로...
‘보유한 아이템 목록도 볼 수 있어?’
이 정도면 정말 획기적이었다. 태호는 이제 머더러를 쳐다보기만 해도 놈이 가진 대다수의 밑천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란마가 사라지고.
태호는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판타로스의 사념체가 부여한 메인 퀘스트라.’
이것에 대한 영상을 만들어 선택에 대한 금지를 요구해야 할까?
아니다.
태호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재수없으면 최악수로 치닫을 수도 있다.
타인이 느끼기에, 리얼포스는 어차피 게임이다. ‘언노운’ 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은, 공론화라기 보단 흥미를 자극하기 쉽다.
재수없으면 머더러가 더 늘어난다.
‘간부진과 길드원들의 보상이 다르다...’
쉬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아마 쉬폰에게도 사념체가 나타났던 것은 분명했고, 쉬폰은 그것을 거절했을 것이다.
‘새삼 대단한 녀석이야.’
그렇다면.
없어진 로만과, 뱀파이어즈의 세 간부진은 아무래도 혼돈의 유산을 온전히 깨워내 버렸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럴 확률이 무척 높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
-...카이저.
귓속말이 왔다.
상대는 쉬폰이었다.
-왜?
-...로만 발견했다.
쉬폰의 목소리에 기묘함이 가득했다. 태호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서? 그보다, 무슨 일인데?
-...놈에게 패배했다. 위치는, 죽음의 땅... 중부.
-뭐?
죽은 직후 귓속말을 보낸 것인지, 쉬폰은 그대로 접속 종료가 돼 버렸다.
태호는 다급히 웹사이트를 켰다. 그리고, 생방송 중인 ‘로만TV’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킥, 키키키킥! 크하하하! 병신 같은 새끼! 꼴 좋다!]
로만은 생방송 중이었다.
방송 시작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15분 전.
고작15분 전이었지만 시청자수는 벌써 10만명을 진작에 돌파하고 있었다.
[로만 오랜만이네, 근데 저거 쉬폰 아님?]
[와, 로만이 쉬폰을 잡았네?]
[현질 얼마나 한거야?]
채팅창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만은 자신의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쉬폰을 보며 시청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형님들... 오랜만입니다? 킥, 키키킥! 오늘부로 쉬폰이 제 앞에 무릎 꿇었군요.]
로만의 상태가 영 이상해 보였다.
태호는 자신의 ‘최상급 머더러 헌터’를 사용해, 로만을 추적해 보았다.
‘사용자를 탐지할 수 없습니다.’
사방의 풍경은 죽음의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만은, 저 편.
잊혀진 왕국의 성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기대들 해 주시라고요.] 파싯!
방송이 종료됐다.
< 기대들 해 주시라고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