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사표 >
[등급 : 에픽]
[종류 : 방어구(발)]
[이름 : 칠흑의 어둠 밟기]
[볼카노스 님, 당신은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셨군요. 당신의 권능을 장비로 만들어, 하사하셨을 만큼. -초보 학자, 카실론]
[사용제한 : 흑마법사.]
[옵션 : 기본 이동속도가 30% 상승합니다.]
[발동 시 그림자 속에 숨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가속 효과를 발동해, 5초 동안 300%의 이동속도로 이동합니다. 발동되면 시전자에게 가해진 모든 상태이상이 해제되고, 전투상황이 해제됩니다.]
[세트 옵션이 존재합니다.*비활성화*]
[세트옵션 : ???]
“어둠밟기...”
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는 3개 세트 아이템으로 구성된 에픽 세트 장비다. 그것도 흑마법사 고유 에픽으로, 과거에도 등장한 바 있었던 녀석들이었다.
과거와 달랐던 점은, 이 칠흑의 어둠 밟기가 볼카노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는 것 뿐!
과거의 이 녀석은 리얼포스가 서비스된지 대략 7년이 넘은 뒤에야 발견되었다.
이른바 ‘칠흑 세트’ 다.
이는 장갑, 반지, 신발로 구성돼 있으며 3개가 세트효과를 발휘한다. 세트옵션은 ??? 로 미확인이었는데, 일단 모이고 나서야 효과가 개방된다.
과거의 칠흑 세트는 각기 다른 주인의 손에 있었다. 세 주인들이 무수히 많은 시세 공방을 펼쳤으나, 결국 합의가 되지 못 해 모이지 못 하고 멸망의 날을 맞았다.
아무튼. 그래서 이상적인 흑마법사를 논할 때 꼭 들어가는 요소였다.
좋다.
일단 그중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태호는 아이템을 보며 생각했다.
‘에픽 두 개 값을 한다.’
특히, 그림자 속을 이동한다는 옵션 자체가 약간 비현실적일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기본 이동속도와 가속 이동속도의 존재가 돋보였다.
이제 태호는 볼카노스를 보며 물었다.
“당신은 카실론이란 존재를 아시죠?”
[아다마다.]
“그가 네메데스입니까?”
볼카노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아주 오래 전, 수호자들이 멸망한 태고의 전쟁이 끝난 후... 아주 간간히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마지막은... 대격변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구나...]
아련한 눈을 한 볼카노스가 되뇌었다.
[그의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
[언젠가 운명의 굴레가 깨어질 날을 기다려라, 라는 말을 했었지.]
운명의 굴레가 깨어질 날!
-우, 운명의 굴레가 뒤틀렸으니까!
판타로스의 장군, 릴리트가 말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그걸 우리가 알아? 세, 세, 세계의 균형이... 기, 기묘하게 유지가 되고, 파, 파괴도 되고 있는걸! 그, 그, 그래서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나도... 재, 재수없게 권좌에서 튕겨져 나왔을 뿐인데!
‘네메데스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나?’
운명의 굴레는 이미 깨졌다.
바로, 회귀한 자신에 의해!
네메데스를 간접적으로 본 바 있는 태호였다. 아직 볼카노스에게 ‘아우슈리네와 네메데스’ 의 대화를 이야기해도 될지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다.
이 문제는 진심으로 고뇌해야 할 일이었으니 훗날로 미뤄도 늦지 않는다.
우선.
다음 질문들이 남았다. “칠흑 장비들은 나머지 두 개가 대륙에 남아 있겠죠. 위치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 허나... 지금은 바다 건너 먼 곳에 있구나.]
예상대로였다.
과거에도 두 종의 칠흑장비들은 배를 타고 떠나야 하는 신대륙들 중 하나에 존재했다.
태호는 볼카노스에게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마저 받은 뒤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좋은 제물을 찾아 다시 뵙겠습니다.”
.
.
.
.
.
.
태호가 계산을 놓친 것이 단 하나 있었다면, 타이밍이었다.
본래 일주일은 더 뒤에 시작될 줄 알았던 ‘잊혀진 대륙 레이드’ 가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돼 버린 것이다.
대도시의 길드 건물에 유저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노블레스]
[잊혀진 왕국 공격대 추가모집, 탱커 & 힐러 & 버퍼 특급 우대. 한국인 위주이지만, 다국적 유저 모두 차별없이 환영.]
길드 홍보문구들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무라사메]
[고급인력 모집중. 힐러 우대. 소수정예.]
[다이스]
[탄트라]
대형 길드들이 모두 신입 길드원들을 받고 있었다. 하나같이 현 리얼포스에서 이름값을 가진 길드들이었다.
유저들은 여기 저기 잘 재어 보면서, 길드 신청을 넣었다. 길드 선택은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유명한 길드일수록, 공략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재수가 좋으면 한 몫 거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 희망 때문인지, 대형 길드들에 길드원들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노블레스의 길드원들이 벌써 오만 명이 훌쩍 넘어가 버렸다.
사정은 다른 길드들도 마찬가지다. 길드의 규모를 손쉽게 늘리기에, 이번 기회는 정말 천금 같은 기회였다.
이번 기회에 리얼포스의 세계에 길드명을 각인시켜 둔다면, 그건 곧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모두들 바보가 아닌 이상, 리얼포스의 미래를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었다.
이건 더 대박이 날 거다!
그냥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다. 이미 그 파급력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다만, 많은 중하위권 유저들이 노리는 것은 비단 ‘잊혀진 왕국의 클리어’ 까지는 아니었다.
“어디 넣을 거야?”
“난 그냥 템사 파티 들어가려고 하는데?”
유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차피 우리는 중간보스나 보스 얼굴도 못 볼 걸? 봐야 딜이 박히기야 하겠냐? 그건 대형 길드들이 알아서 할 테니, 우린 쫄 잡아서 템사나 하는 거지.”
잊혀진 왕국 레이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잊혀진 왕국 사방에 펼쳐진 ‘죽음의 땅’ 이다. 이 땅은 타락한 몬스터들과 좀비, 구울들이 득시글거리는 땅이다.
땅 초입은 대략 290~300 사이.
중부 부터는 300~330사이.
왕국 성과 가까운 최후반부는 400이 넘는 난이도를 자랑했다. 군데 군데 정예가 속해 있는 것은 물론이니, 그 거대한 땅 자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한 사냥터였다.
이 땅을 뚫고 들어가야, 드디어 성의 입구에 닿는다.
둘째. 바로 성의 입구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레이드 던전.
평균레벨 450대의 잡몹구간과 중간보스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세 명의 중간보스를 무찌르고 성의 최상부 ‘왕좌’ 로 향해야 한다.
셋째. 왕좌에서 기다리는 잊혀진 왕국의 최종보스를 해치운다.
이 세 가지 과정은 아무래도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는 못 했다.
즉.
보통의 경우 ‘왕좌’ 에 도달하는 과정까지 수 개월에 걸친 유저들의 공략들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과거의 리얼포스에서는, ‘잊혀진 왕국’ 이 릴리즈 된 후 6개월이 지나서야 보스가 잡혔다.
보스가 잡히기 전 까지, 유저들의 평균레벨은 쑥쑥 올랐다. 또한 중간보스들이 리스폰되는 왕궁과 죽음의 땅은 유저들의 사냥터가 되었던 것이다.
중간보스들의 리스폰 타임은 하루에 한 번 꼴이었지만, 잡몹들은 그리 오랜 시간의 리스폰 타임을 갖지 않기에 사냥터로 적합했다.
그리고 중간보스들이 리스폰 되면, 각 길드들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였다. 보상으로 나온 아이템을 두고 분쟁하는 일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과거의 흐름은 그러했다. 평균레벨이 자연히 높아지며,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잊혀진 왕국은 클리어된 것.
허나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유저들이 충분히 성장할 시간을 갖추지 못 했다. 태호가 부여한 메인 퀘스트와, 광역 축복으로 땜빵을 했다 쳐도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즉.
이번에는 ‘물량’ 으로 밀어 버린다.
“노블레스가 낫지.”
“요샌 무라사메도 알아 준다던데?”
“PPV 하는 대형길드는 어차피 1~3군 정도만 중간보스 레이드 가지 않을까? 나머진 쫄처리잖아?”
레이드 자체에 의미를 두는 유저도 많지만, 역시 쪼렙 유저들은 대부분 ‘템사’ 에 관심이 있었다.
역시나 그중 인기 있는 것은 ‘골드 파티’ 였다.
혼자라면 절대 잡을 수 없는 고레벨 ‘죽음의 땅, 왕궁’ 의 몬스터들을 파티로 잡아, 떨어진 아이템을 파티 유저들끼리 가격경쟁을 해 비싼 값을 부른 사람이 사간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불한 골드를, 파티장은 파티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골드 파티.
이런 저런 일들로 리얼포스 내부는 시끌벅적했다.
애시당초 PPV 중계권이 생길 리 만무하다. 참여하는 유저들의 수가 족히 수백만에 달하니,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흐름은 개인 방송 중계, 그리고 업체들의 중계 생방송으로 가닥이 잡혔다.
“......빨라.”
[노블레스, 잊혀진 왕국 공격대를 편성하여 금일 오후 7시 출사표 던져.]
[무라사메, 다이스, 탄트라를 비롯한 현 리얼포스의 대형 길드들이 줄지어 출사표... 과연 승자는?]
[전설의 흑마법사, ‘언노운’ 이 건 ‘최종보스 킬’ 12억 상당의 상금!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대형 길드들이 움직이자, 템사에 목마른 유저들도 동시에 움직인다. 그야말로 세상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호는 노펜시아의 높은 성벽에 앉아, 그런 유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인다.’
저 거대한 사람들이 움직인다. 대의를 위해? 아니, 순수히 자본적인 이유를 위해.
그렇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명예와 돈이다. 적어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그 두 가지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쉽다.
“하아...”
수백 만의 유저가 동시에 잊혀진 왕국을 향해 쳐들어간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신나간 공세가 분명했다.
신노스.
태호는 신노스를 떠올렸다.
놈은 기필코 태호의 손으로 죽여야 했다. 다만, 최종보스인 신노스를 잡는 데 도움을 준 파티에는 태호가 약속한 선물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내어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막타는 내 꺼지만.’
유저들에게 약속한 것도 본인이었고, 그 신뢰를 지키지 못 한다면 ‘언노운’ 의 이름값은 금세 무너진다.
즉, 태호는 ‘극적으로’. ‘막타를 먹어도 그게 합리적인 것처럼, 아주 드라마틱하게.’ 먹어 치워야 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저 많은 유저들은, 태호가 불러 모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화시켰다. 과거의 흐름보다, 지금 이 상황은 무려 6개월이나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번 삶에는 희망이 있었다.
신노스를 잡는다.
놈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 넣어, 혼돈의 권좌로 돌아가지 못 하게 만든다.
* * *
수백만!
게임 속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동시에 모여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은, 게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레이드 파티가 출발하는 그 시각, 온 세계의 검색 플랫폼에는 리얼포스, 잊혀진 왕국, 언노운, 레이드 파티, 등이 검색어를 지배해 버렸다.
타타타타탓!
태호의 유령표범이 달렸다. 수백만의 유저들이 이미 죽음의 땅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노블레스 길드의 마르코였다. 네임드 유저들의 개인방송은 이미 수십만을 돌파한 시청자들로 북적거렸다.
[자, 출발합시다! 노블레스 길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마르코의 말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군중의 분위기는 사람을 달뜨게 만든다. 템사에만 생각이 있던 유저들도, 어느새 그 분위기에 동화돼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한다.
이내.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죽음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태호는 천천히 귓속말을 보냈다.
-쉬폰.
-그래.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도와달라고 했던 그 말?
-그래.
태호는 유령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지금이 그 때다.
-......
쉬폰에게 금세 대답이 왔다.
-그러지.
신노스 격살(擊殺) 작전이 시작되었다.
< 출사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