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을 세워 봅시다 >
수백만이 달려드는 것을 보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리얼포스의 땅이 워낙 광활해, 형세는 마치 대륙 중앙의 1/3 정도를 점령하고 있는 죽음의 땅과 잊혀진 왕국을 유저들이 빙 둘러싸고 압박해 가는 식이었다.
잊혀진 왕국, 울크랜드의 크기는 일개 지역 하나의 크기와 맞먹는다. 그리고 그 드넓은 땅이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 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벽은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여.’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을 보는 것처럼 견고히 서 있다. 하나의 지역 크기만큼의 성! 기존의 운명이었다면 6개월에 걸쳐 차근 차근 공략돼 갔을 성을, 단숨에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태호는 ‘속임수’를 사용한 채 유저들 사이에 파묻혀 달렸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죽음의 땅에 도사리고 있던 몬스터들이 우루루 나타나 유저들과 격돌을 시작했다.
수백만에 가려져 초라한 숫자였지만, 수만 마리가 전 지역에서 솟구쳤다.
쏴아아아아아아-!
마법이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온 사방에서 각종 속성 마법들이 날아들고, 화살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들끼리 대미지가 가해지는 경우가 없는 이유는, 사전에 협약된 것들 때문이었다.
우선, 한 파티의 최대인원은 50명. 그 파티 최대인원을 구성한 다음, 파티장들이 파티 설정에서 ‘PK기능 OFF’를 설정해 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스킬이 난무해도 피해를 주지 않게 된다. 다만, 병장기들이 맞부딪히거나 서로에게 적중하면 튕겨나가게 되는 단점이 있지만 아무튼 무고한 피해는 사라졌다.
쏴아아아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유저들에게, 아무리 레벨 높은 잡몹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그야말로 병정 개미다!
대미지는 눈곱만큼 들어오더라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무지막지하게 날아오는 공격들은 결국 큰 대미지를 누적시킨다.
여기 저기서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아이템들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고급 레어, 재료, 스킬북 등이 온 사방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니 유저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주워!”
“주워라!”
거기서도 싸움이 일어났다. 확대해 보면 작은 분쟁거리들이 아주 많았다. 서로간에 시비가 붙기도 하고, 아이템이나 골드 분배를 놓고 싸우기도 했다.
허나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개미와 먹잇감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사방의 ‘죽음의 땅’ 이 마구잡이로 공략당해 들어갔다.
“......!”
하하하!
태호는 씩 웃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저들의 결집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신노스까지 단숨에 격퇴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 그 무렵이었다.
문득.
문득, 불현 듯이 스쳐간 것은 기묘한 불안감이었다.
‘뭐지?’
뭔가, 이상한 기분.
‘뭘까?’
일이 너무 쉽게 진행돼 가기 때문에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인가? 아니면, 뭔가를 빼놓고 있나?
태호가 곰곰이 생각할 무렵, 유저들이 그 넓은 죽음의 땅을 절반 가량 초토화시켰다.
쿠구궁- 쿵-!
거대한 잊혀진 왕국의 성벽에 회색 기운이 머무르며 견고하게 사방을 강화시켰다. 성벽의 표면에는 섬뜩하고 거대한 회색 가시들이 튀어나오고, 그 위로 무수히 많은 잊혀진 왕국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성전이고 뭐고 없다. 유저들은 일단 부딪혀, 성벽이고 성문이고 마법을 쏟아내고 있었다.
태호는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 보며 되뇌었다.
‘균형.’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쿵- 쿠구구궁-!
날아드는 마법과 공격에 견고해 보이는 성벽에도 금이 간다.
콰르르르르!
성벽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들어가자아아!” 함성과 함께 유저들이 그 곳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콰르르르-!
콰르르-!
여기 저기서도 성벽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 천지에서 사냥과 비명소리, 환호성, 함성이 공존해 들려왔다. 아무래도 준비가 덜 된 유저들은 스치기만 해도 죽어나갔기에, 수백만에 달하던 규모는 매우 빠르게 줄어 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성벽들을 모조리 부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어느새 사방의 성벽들이 대부분 부서지고 그 안으로 유저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잊혀진 왕국!
그 내부는 그야말로 죽음의 도시였다. 하늘은 맑건만, 울크랜드의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과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땅은 새카맣게 죽었으며, 존재하는 것은 흉측스러운 울크랜드의 병사들과 기괴한 건축물들이었다.
[잊혀진 왕국 ‘울크랜드’ 에 진입하셨습니다.]
[사망자는 24시간 동안 이 곳에 재진입할 수 없습니다.]
메시지가 이어졌다.
와아아아아-!
내부에서도 난리 난리가 났다. 태호는 그 쯤에서 무리에서 벗어나, 유령표범을 소환한 뒤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왕궁이 보였다.
태호는 표범을 달리게 하며,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둠 기사단 세트가 빛을 발하고, 유저들의 최선두로 달려가 온 사방에 중독을 뿌리기 시작했다.
“언노운이다!”
“언노운이 왔다!”
유저들이 소리쳤다. 태호는 쏜살같이 거대한 그 땅 내부를 선두로 달리며, 온 사방에 중독을 난사했다.
“언노운이 우리와 함께한다!”
사기가 대폭 오르며 유저들이 사방의 몬스터들을 공격할 무렵이었다.
막 달리려던 그 무렵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일순, 하늘에서 회색 빛 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유저들의 사이로 내리꽂혔다.
콰지지직!
그 순간, 레벨이 낮은 유저들은 그 파동만으로도 죄다 터져 나갔다.
[큭, 크크크크큭!]
그리고. 온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섬뜩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꽂혔다.
[빌어먹을 인간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치 쇠가 긁히는 듯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신노스였다.
신노스는 체장 10미터 정도의 크기에, 전신은 인간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온 몸은 회색 비늘에 뒤덮혀 있었고 두 귀는 뾰족하게 좌우로 튀어나와 있었다.
놈의 머리 위에 선명한 글자가 새겨졌다.
[혼돈의 대장군]
[신노스]
레벨이나 기타 표기는 없다. 그저 선명한 붉은 빛으로 그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
“신노스다아아!”
“조져라아아아아!”
“와아아아!”
사방의 유저들이 놈에게 공격을 쏟아 붓는다.
신노스를 보는 태호의 눈 앞에 양팔저울 하나가 떠올랐다. [균형을 파괴하는 자]
양팔저울이 끼익 끼익 흔들거리다가, 우측으로 꺾였다.
‘신노스...!’
저 빌어먹을 면상을 보는 것이 섬뜩하다. 신노스는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를 한몸에 받으면서도 어쩐지 태연했다.
[이번 회차는 아주 즐겁군... 아하하하하! 운명의 굴레는 이미 뒤틀렸으니, 다시는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지어다!]
어찌 보면 체념 같기도 했다. 체념한다고 해도 그럴 만 했다. 수백만이라는 숫자 앞에서, 어떤 전투도 크게 의미를 갖기가 힘들 테니까.
헌데.
기묘하게도 신노스가 웃고 있었다.
[킥, 키키키키킥...]
신노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허나 운명이란 재미난 것...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다는 것은... 뜻밖의 기회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 굴레를 더욱 뒤틀어 준 덕에... 뜻밖에도 호재가 생겨났노니.]
쿠구구궁-!
문득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태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 저 편을 보았다.
쩌어어억-!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회색으로 물든 세계였다.
회색 세계에는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다. 기괴한 건축물들, 그리고 그들이 군집해 사는 듯 한 마을과 도시 같은 것들이 매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것이 혼돈의 권좌!’
태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 세계에 회색 빛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그림자 같은 거대한 형체들이 비추었다.
그들 중 하나가 그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설마...’
태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오라, 나의 형제여...]
신노스가 킬킬거리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뒤틀린 운명을 안고... 권좌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추락하라, 나의 형제여!]
쿠구궁-! 쾅!
갈라진 하늘에서 또 다른 회색 물체들이 마치 비처럼 떨어져 내려, 지상에 작렬했다.
콰지지직!
이윽고,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놈은 신노스와 거의 흡사하게 생긴 존재였다.
허나 풍기는 기운이 사뭇 다르다. 전신을 덮고 있는 비늘은 섬뜩한 붉은 색이었으며, 두 눈은 노란빛으로 요사스럽게 빛났다.
뒤 이어 수많은 혼돈의 괴물들과 장군급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몸을 일으켰다.
태호는 그 붉은 비늘의 정체를 아주 알 알고 있다.
‘케노스!’
케노스다.
환각의 케노스가 지금 지상에 나타나 버린 것이다.
여섯 번째 확장팩 ‘환각의 케노스’에서 등장해야 할 녀석이, 지금 나타났다.
왜?
태호는 문득 깨달았다.
‘너무 운명을 빠르게 앞당겨서 그렇다...?’
운명이 뒤틀렸다는 것에 대한 것은 너무나도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유저들의 운명을 움직였기 때문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일단 정신을 다잡은 태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이 쪽은 쪽수로 치면 어마어마한 쪽수다. 수백만이 달려들었고, 이미 수십만은 진작 죽어 나갔다. 물론 이중에서도 실질적인 전투에 도움이 되는 인원은 10%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물량은 어마어마하다.
이 기회에 두 놈을 다 잡아 조지면 그것이 최고다.
문제는, 지금 나타난 케노스나 장군급들이 얼마나 힘을 회복한 상태인지가 관건이었다.
여섯 번째 확장팩에 등장했어야 할 놈들이 나타났으니, 분명히 신노스보다는 조금 더 힘을 회복한 상태일 것이다.
머릿속에 복잡한 계산들이 오고갔으나, 중요한 건 지금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는 점.
그리고.
‘케노스는 매우 까다롭다.’
꿀꺽!
다른 건 몰라도, 무조건 케노스를 틀어 막아야 했다. 케노스의 특이점은 두 개.
광역 환술, 약자멸시!
신노스는 그래도 정직한 보스였다.
태호가 애초에 물량전으로 끌고 가기 위한 포석을 세운 것은, 신노스는 그래도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완전히 다르게, 케노스는 일정 레벨 이상이 되지 않으면 단 1의 생명력도 깎을 수 없다. 즉, 신노스는 물량으로 조질 계획을 세우기 쉬웠지만 케노스는 그것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다는 뜻.
‘케노스를 못 막으면 어차피 전멸이다.’
수적으로 수천만명. 아니 수억명이 몰려와도, 약자멸시라는 단순한 네 글자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케노스 공략의 핵심이었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을 뒤적여, 마력 확성기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연금술사 클래스가 제조해 판매하는 이 아이템을 이용해, 목소리를 비약적으로 키울 수 있다.
[지금, 4차 승급 이상의 플레이어 분들은 저를 따라 오십시오.]
“언노운이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지금 저 붉은 비늘을 잡지 못 하면, 우린 곧 전멸합니다. 4차 승급 이상의 파티는 저를 따라...]
태호는 이 모든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이 대사를 읊으면서도, 최대한 오글거리면서 호응 받을 수 있는 대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전설을 세워 봅시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태호의 몫이다. 한물 간 홍콩 영화 주인공의 대사처럼 읊조린 태호가, 멋지게 돌아서서 케노스에게 달려갔다.
< 전설을 세워 봅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