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륙의 주인 >
태호는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진짜 공기를 느꼈다. 피부의 질감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현실이 분명했다.
일체감 100%의 몸으로 게임 속 세상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때론 현실 쪽이 이질감이 들 때가 있다.
“......”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의 거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의 태호는 구릿빛 피부,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지금, 거울 속의 태호는 이전에 생각하던 자신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가장 먼저.
그리 뛰어나지도, 그리 못나지도 않던 평범한 얼굴의 변화다. 이목구비가 매우 또렷해졌으며, 선이 강하고 잘 생겨진 얼굴이 되었다.
피부는 하얗게 변했으며, 양 팔과 다리는 더 늘씬하게 변했다. 온 몸의 상처는 모두 없어졌다. 아- 하고 치아를 본다.
“세상에.”
충치 하나 없는 새로운 치아들이 들어찼다.
무협소설에서나 보던,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했단 말인가?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다.
두 대장군들을 해치운 뒤.
현실로 돌아온 태호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온 몸에서 우둑 우두둑 소리가 나며 뼈가 뒤틀리고, 허물을 벗듯 피부와 치아 손발톱 머리카락까지 우수수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치아와 손,발톱이 빠르게 자라나며 온 몸이 완전히 재정립돼 버렸다.
이제 거울 속의 태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
변화.
변화를 꿈꾸던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막상 변화해 보니, 기묘한 기분이었다.
뛰어난 운동능력은 둘째치고, 몸 속에 에너지가 항상 차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인가?
태호는 거울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치 이건...
“마력을 품은 것 같이...”
거울 속의 자신에게 손을 뻗어 본다. 거울에 손바닥이 닿았다. 차가운 감촉이 들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걸까.
[리얼포스의 상승세가 무섭습니다. 금일부로 동시접속자 6천만명을 돌파했다는 통계가 있는데요...]
연일 뉴스에서는 리얼포스 이야기 뿐이었다. 중국 쪽에서는 이미 리얼포스 길드의 기업화가 진행돼 가고 있었다.
세계는, 태호가 기억하던 세상과는 조금 달라졌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시작됐음을, 태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변화.
태호는 부디 그것이, 올바른 미래로 도출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 * *
홀로 섬을 떠나 이틀을 꼬박 달릴 무렵이었다.
쏴아아아아-!
어느 순간부터는 바다가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와 해류가 기승을 부린다. 이것이 바로, 무대륙의 바다경계선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다른 범선이나 무역선이었다면 진작 침몰하고도 남을 자연재해였다만, 유령선에겐 큰 영향이 없다.
유령선은 그야말로 쾌속으로 질주하며 바다 위를 누볐다.
쏴아아아-!
[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옷!]
쌔애애앵-!
그래도 휘청이는 유령선 위에서 이리 저리 굴러다니던 막시무스가 기어코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촤아아아! [으어어어어어!]
“안돼! 막시! 으하하하하! 아하하하!”
라간이 막시무스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카르릉!
그 험상궂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상어 한 마리가 튀어올라, 막시무스를 냉큼 삼켰다.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치며 놈의 섬뜩한 아가리 속 이빨들이 보였다. 태호는 시큰둥한 얼굴로 놈의 얼굴에 지팡이를 겨눴다.
‘시력상실.’
캬르르릉!
놈은 일순간 시각이 사라진 것에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대다 바다속에 떨어졌다.
[Lv. 440]
[정예]
[메갈로돈]
괴물 상어의 크기는 유령선보다 거대하다. 아마 바다의 변덕에 큰 타격을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괴물일 터.
“으이구.”
태호는 혀를 쯧, 하고 차며 막시무스를 소환 해제했다. 메갈로돈을 잡기란 무척이나 까다롭다. 여차 하면 바닷속으로 도망쳐 버릴 테고, 아이템 수거에도 난항이 따른다.
쏴아아아!
그냥 이대로 직진 직진.
마력을 한껏 머금은 유령선이 쾌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렇게 지옥같은 바다가 끝났다.
바닷바람은 싸늘하고, 사방엔 하얀 해무海霧가 잔뜩 끼었다. 망설이지 않고 쾌속 전진, 전진.
어느 순간. 저 편, 거대한 대륙이 안개 너머 그야말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무 대륙?”
“그래.”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무 대륙은 본대륙의 절반정도의 크기였다.
본대륙은 마법사들과 다양한 직업군들이 골고루 분포된 모험가들의 땅. 허나 무대륙은 다르다.
이 곳은 철저한 전사의 세계였다. 무대륙의 전사들은 용맹하고, 또한 포악하다. 허나 한편으로는 명예와 의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들이 혼돈의 힘에 타락해 본대륙을 침공해 오는 네 번째 확장팩에서는, 그야말로 대륙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무대륙의 땅에 도착했다.
태호는 유령선에서 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효가의 유령선은 그대로 마치 안개처럼 흩어져 작은 모형으로 태호의 손에 돌아왔다.
‘이거 진짜 편하네.’
지상 탈것은 유령표범이 있고, 배는 유령선을 구했다. 이제 태호에게 나는 탈것이 생긴다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해변에는 인적이 없다. 아직 유저들은 이 곳에 닿지 못 했을 것이 뻔했다.
바다의 변덕을 이겨내기엔 아직 본대륙의 기술이 모자라다. 태호처럼 유령선을 소유하지 않는 이상은, 하늘을 날아서 오던가 해야 한다.
실제로 이것 외의 방법은 당연히 존재한다. 바로, 엘린의 공중정원을 이용하면 된다.
엘린의 공중정원은 전 세계를 떠돌기 때문에, 당연히 무 대륙의 하늘도 지나간다. 허나 그 무작위에 걸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이 문제다.
“세상에, 여기가 무대륙?”
“그래.”
라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변을 한참이나 지나쳐 나와 푸른 색감의 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은 그야말로 탁 트인 벌판! 시야가 길어져 저 멀리, 한없이 멀리 있는 것들도 들어온다.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이었다.
이 대륙의 주인은, 카자토스.
아마 이 시점에서는 대륙전쟁이 한창이거나, 거의 카자토스가 대륙의 주인이 될 무렵일 것이다.
그는 본래 호탕하며 의리와 인의가 있는 사내였으며 군주였다만, 혼돈의 힘에 의해 타락하고야 만다.
‘이쯤이면...’
무대륙 남쪽의 ‘태허의 벌판’ 이 분명했다. 태호는 유령표범을 소환해, 라간을 태웠다.
파파파파파팟!
유령표범이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사방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여기 저기에서 기묘한 느낌이 스물스물 새어나오고 있었다. 태호는 그 기묘한 것의 정체를 금세 알 수 있었다.
‘타락이다.’ 여기 저기서 스쳐 지나가면서 보이던 마을이나 부락들엔 죄다 좀비와 구울들이 창궐해 있었다.
[Lv. 420]
[타락한 구울]
심지어 레벨대도 높다. 이는 무 대륙의 평균수준이 워낙 높은데, 그런 놈들이 타락까지 했기 때문일 거다.
‘설마 이거 벌써 카자토스가 타락했나?’
과거, 카자토스의 타락에 대한 설정은 이러하다.
무대륙의 패권을 쥐고 흔들던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의문의 사원을 발견하였고 그 곳에서 혼돈의 유산 하나를 손에 넣게 된다.
유산은 그에게 거대한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결국 패권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허나, 그 대가로 그는 타락해 버리게 된다...
“......”
시점상 맞지 않다. 허나, 여지껏 시점상 맞지 않는 일들은 리얼포스에서 많이 일어난 바 있다.
파파파파팟!
유령표범이 더욱 박차를 가했다. 부리나케 달리던 태호는 병장기들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챙챙챙! 챙!
그 곳으로 향하자, 소수의 전사들이 뭉쳐 좀비와 구울들을 개떼로 상대하고 있었다.
[테무 상장군]
[오르카]
오르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레벨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들의 위치가 NPC라는 뜻이고 오르카라는 이름은 아주 익숙했다.
‘상장군 오르카!’
과거, 네 번째 확장팩에서는 중간보스로 등장했던 녀석이었다. 그 뒤를 이어 부하들로 보이는 전사들이 그야말로 수백이 넘는 좀비와 구울 떼를 상대하고 있다.
‘아직 타락하기 전이라 이거지. 그럼 이 풍경은 대체 뭐야?’
태호는 머리를 잠깐 굴리다가, 일단 그들을 구해 놓기로 했다. 일단 그들과 관계를 좋게 만들어 두는 건 아무리 봐도 손해가 아니다.
‘대규모 범위 중독, 절망, 시력상실.’
태호는 오르카의 무리에게 닿지 않을 범위로 절묘하게 광역기를 조종해 쏟아냈다.
쏴아아아아-!
삽시간에 어그로가 태호에게 쏠렸다. 사방의 몬스터들이 태호를 바라볼 무렵, 이어진 폭사가 놈들의 목숨줄을 단숨에 끊어냈다.
콰지지직!
“어오 씨.”
라간이 기겁했다.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태호는 유령표범을 탄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 당신은 누구시오?”
오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다 건너에서 온 카이저라고 합니다.”
태호의 말에 오르카가 깜짝 놀랐다.
“해신의 분노를 뚫고 왔단 말이시오?”
해신의 분노란, 무 대륙과의 경계선을 말한다. 험상궂은 바람, 해류, 파도, 그리고 섬뜩한 메갈로돈을 비롯한 포식자들. 그것들을 뚫고 왔다는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상황...”
문득 태호의 시선에 라간의 얼굴이 닿았다. 라간은 어쩐지 기묘한 시선으로 태호와 오르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아, 아니... 형님 지금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스킬 같은 건가?”
“응?”
라간이 당황한 듯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태호의 개인 메신저로 보내주었다.
-아 카툼 크록 후락타.
-하! 카툼 후락!
해신의 분노를 뚫고 왔냐? 그렇다, 정도의 대화인데 전혀 다른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문득, 태호는 떠올렸다.
그렇다.
생각 해 보니, 과거 이들은 본대륙과 언어체계가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본대륙의 NPC마법사 하나를 통해 통역하곤 했었던 것이다.
헌데.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무대륙의 언어로 그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
이거.
아, 설마.
태호는 문득 그 때를 떠올렸다. 장군들을 잡고 난 뒤, 어느 순간 외국어들이 술술 읽히기 시작하던 무렵을.
그랬구나.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다. 어쩌면 이제, 태호는 리얼포스의 그 어떤 신대륙과 이종족을 만나도 그들의 언어를 알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
태호는 눈을 깜빡이며 오르카를 보았다. 문득, 오르카의 시선에 살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아니다. 그 뒤를 향해.
“조심하십시오.”
뒤를 돌아 보니, 저 편 끝에서부터 새카맣게 몬스터들이 밀려 오고 있었다.
좀비와 구울, 그리고 타락한 무대륙 특유의 몬스터들 떼거지다. 놈들은 빠른 속도로 이 곳으로 달려와 금세 사방을 둘러쌌다.
‘일단 여기부터 싹 쓸고 안전지역으로 이동해야겠다.’
태호가 막 다짐할 무렵이었다.
[어떤 패악한 놈들이 감히 신성한 이 땅을 침범하려 하느냐!]
저 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며,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
콰자자자작! 우지직! 우직!
삽시간에 몬스터 한복판에 대 학살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몬스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길이 생겨나 버린 것이다. 그 길에서 저벅 저벅 걸어오고 있는 것은, 족히 3미터에 육박하는 키를 가진 육중한 사내였다.
양 손에는 거대한 양손검을 하나씩 들었다. 울끈불끈한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온 몸에는 피칠갑을 했다.
꿀꺽!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카자토스!’
저것이 바로 무 대륙의 주인, 카자토스다.
< 무대륙의 주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