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97화 (97/194)

< 이기거나 죽어라 >

카자토스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는 모여 있는 몬스터들에게 거센 고함을 내질렀다.

[너희는 모두 죽는다!]

곧, 그의 두 개 양손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엉 스엉, 그야말로 몬스터들이 무 썰 듯 썰려나간다.

태호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태호는 이미 신노스와 케노스를 모두 겪어 보았다. 등장했던 두 대장군은 본신 힘의 1/10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충분히 압도적으로 강했다.

네 번째 확장팩, 무 대륙의 강자들에서 등장했던 최종보스 카자토스의 위엄에 비견해 보자면 현재 카자토스의 모습이 그보다 떨어지는 듯 하다.

허나 이 쯤이면, 1/10 신노스보다는 훨씬 강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2/10의 신노스와 맞먹을 지도, 혹은 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일 지도.

‘다행이군.’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맞붙는다면, 절대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 지금의 태호는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에게서라도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혹은, 최대한 비겁하게 장시간 싸워 치명타를 먹여 볼 시도도 해봄직 하다.

허나 카자토스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촤차차차착-!

카자토스는 무대륙의 무신(武神)이라고 보면 된다. 그 명성에 걸맞게, 사방의 몬스터들이 무자비하게 도륙당해 나간다. 이윽고, 사방에 피보라가 몰아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카자토스는 두 개의 양손검에 묻은 피를 홱, 털어낸 뒤 태호에게 저벅 저벅 걸어왔다.

두 눈 가득, 경계심이 어려 있다.

“뭐냐, 너는.”

“아, 저는-”

태호가 막 입을 열 때, 지켜보던 오르카가 대답했다.

“대장군, 이 사람은 저희를 구해 주었습니다.”

“뭐라?”

“나파의 편은 아닌 듯 싶습니다.”

“확신하지 말라.”

카자토스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태호를 보았다. 태호는 지금 들려온 대화들을 토대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카자토스가 타락하는 시나리오가 바뀌었다. 이미 이쪽 땅엔 타락이 만연해 있으니... 아무래도 과거와는 이야기가 바뀐 것 같은데.’

카자토스는 무 대륙의 패권을 두고, ‘나파’ 와 긴 시간동안 분쟁을 이어왔다. 그리고 나파가 카자토스를 무자비하게 압살해 올 무렵, 혼돈의 유산을 손에 넣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시나리오는 나파가 타락해 버린 거야.’

누구에게?

어쩐지 자연히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갑자기 대륙에서 사라지고, 잊혀진 왕국 공략 때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더니 다시 꽁꽁 숨어 버린 놈들 말이다.

‘로만을 비롯한 세 찌꺼기들?’

혹은.

‘운명이 뒤틀린 여파로, 나파가 혼돈의 유산을 발견했다- 정도의 가설.’

일단 이 정도까지다. 카자토스는 요모 조모 태호를 뜯어보다 물었다.

“마법사인가?”

“예.”

“그렇다면 그대도 이방인이겠군.”

“그렇습니다.”

“흐음... 듣기론 나파에게 해신의 분노를 이겨내고 온 이방인들이 있다고 들었건만.”

“아, 그렇습니까?”

의외로,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태호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확신할 수 있었다.

‘로만을 비롯한 세 놈이 주축이겠군.’

하지만 카자토스는 금세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들였다.

“허나 네게서는 패악한 혼돈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부하를 구해 준 것엔 고맙단 말을 해야겠군.”

철컹!

두 개의 대검이 카자토스의 등 뒤에 걸렸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태호도 까치발을 한 뒤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이방인이 이 땅에 와 있다고 하셨죠?”

“그렇다.”

“아무래도 제가 찾는 놈들과 같은 놈들인 듯 합니다.”

“뭐라?”

카자토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지?”

“혼돈의 힘으로 이 땅의 생명체들을 타락시키고 있는 중일 겁니다. 아마 당신의 숙적인 나파 역시 타락이 진행돼 버렸을지 모르겠군요.”

태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힘이 있다. 카자토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답했다.

“네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으나, 기묘하게도 네겐 신들의 가호들이 느껴진다. 나는 천상의 존재들을 신뢰하진 않으나... 혼돈의 힘과 그들이 공존할 수 없다는 건 알지.”

카자토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네 의도는 무엇인가?” “......”

태호는 잠깐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볼카노스 님의 제사장입니다.”

“볼카...노스?”

“어둠을 관장하는 신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혼돈의 힘을 사전에 말살하기 위해 그분의 힘을 받아 떠돌고 있죠.”

[말재간이 발동 중입니다.]

카자토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군.”

‘통한다?’

너무 쉽게 통하는 것이 어쩐지 기묘했다. 태호가 의구심을 가질 무렵, 그가 재차 말했다.

“대격변 이전, 혼돈과 싸웠던 그의 제사장이라면... 일리는 있다. 증거를 보인다면 믿어 주마.”

태호는 군말 없이 그의 팔을 잡은 채 볼카노스를 소환했다.

[나를 불렀느냐?]

사방이 어둠에 뒤덮히고, 볼카노스가 나타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카자토스는 볼카노스를 직접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얼굴을 모르더라도, 그가 볼카노스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외쳤다.

“어둠의 신 볼카노스여! 그대의 제사장이 혼돈의 힘을 찾아 무 대륙에 왔소.”

[너는... 혹시 테무 일족인가?]

“그렇소! 위대한 테무 일족, 대장군 카자토스요!”

테무 일족.

카자토스의 가문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군. 무 대륙의 강자여, 눈 앞의 인간은 나의 제사장이니 험히 대하지 말라.]

“그렇군. 약속하겠소.”

[고맙군.]

카자토스는 이로서 태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태호는 약간 더 혼란스러워진 기분이었다.

‘혼돈의 힘을 알고 있어. 신들의 존재, 그리고 볼카노스에 대해서도.’

즉.

그는 본디 혼돈을 경계하는 이였을지언대, 어떤 과정으로 타락하게 된 걸까?

볼카노스는 태호를 보면서도 말했다.

[나의 제사장 카이저여, 테무 일족은 본디 신에 한없이 가까웠던 자들... 이들은 천계의 비밀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신에 가까웠다?

문득, 과거 로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인간이었던 까마득한 옛날... 그것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강렬히 남아서였나보지.

그 역시 과거엔 인간이었다고 했다.

“......”

아무튼 그런 비밀 설정은 태호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호의 과거에는 그저 ‘타락한 무 대륙의 전사들’ 정도였던 것이다.

[뒤틀리기 시작한 운명이, 많은 흐름을 바꾸어 놓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볼카노스는 태호를 빤히 보다가, 빙긋 웃으며 사라졌다.

궁금증을 뒤로 한 채, 다시 원래대로의 세상으로 돌아온 카자토스가 몸을 돌렸다.

“움직이지.”

“아, 예.”

카자토스가 힘차게 휘파람을 불자, 어디선가 거대한 말 한 마리가 달려와 섰다.

카자토스가 막 말에 올라타자, 테무상장군 오르카가 그에게 말했다.

“대장군... 이들은 어찌할까요?”

'그들' 이란, 맨 처음 태호가 말살했던 좀비와 구울 떼였다.

“......”

카자토스는 착찹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이내 그가 말을 달렸다.

얼빠진 채 눈을 꿈뻑이던 라간이 잽싸게 태호의 옆에 붙었다.

“형님, 뭔데? 어떻게 된 건데?”

태호 역시 유령표범을 소환해 라간과 함께 탑승한 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달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산기슭에 만들어져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

.

.

.

.

.

상황은 대충 태호의 예상대로였다.

현 상황은, 카자토스의 숙적이었던 나파가 타락했다. 본디 무 대륙은 2/5 가량이 테무 일족의 땅이었으며 나머지는 기타 여러 부족이 나누어 살아가고 있었다.

헌데, 변방 부족의 부족장인 나파가 나머지 부족들을 통합해 세력을 키워 나가며 마찰이 잦아지고 결국 무 대륙 패권을 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 상황에서 밀린 카자토스가 타락한 뒤 승리하지만, 지금은 나파의 타락이었다.

확실히 열세임은 분명했다.

태호는 요새 속의 병력들을 살펴 보았다. 언뜻 보아도 병력은 이제 수백 정도밖엔 남지 않았으며, 그들도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반면에.’

혼돈의 힘 특성상, 적들은 훨씬 강해졌으며 필요하다면 좀비나 구울 등으로 전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쪽도 타락해 적이 돼 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구나.’

태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아까, 오르카와 싸운 이들은 타락한 아군인 모양이다.

상황이 이러니, 온 사방엔 패색의 기운만 그득하다.

“어차피 모레, 마지막 항전이 있을 예정이다.”

카자토스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파의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과거에는 설정상으로만 알았지,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도 미지수.

카자토스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과거에는 내게 미치지 못했다. 허나, 이제는 생사결을 나눠야 하겠지.”

그렇다면, 거의 동급. 동급 대 동급의 싸움이라.

‘재앙이겠군.’

1/10정도만 힘을 회복했던 신노스도 수백만명의 유저를 상대로 압살하는 위력을 뽐냈다.

수백만이라는 숫자가 어차피 개미 같이 의미 없는 숫자 부풀리기이긴 하나, 현재 유저들의 수준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헌데 카자토스와 나파의 싸움은 대체 얼마나 거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인가?

‘네 번째 확장팩이 시작되기 전의 흐름.’

그렇다.

정확히 '네 번째 확장팩이 시작되는 이유' 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태호는 그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서 있고, 한편으론 궁금했다.

이 흐름에서 카자토스가 승리하면, 확장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는 타락하지 않았으며, 자연히 본대륙 침공을 해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운명은 더욱 더 뒤틀리는가?

태호와 라간은 지금 대장군의 방에서 두 명의 상장군과 함께 서 있었다.

“우리 위대한 테무 일족은, 내일 모두 죽거나 승리할 것이다.”

카자토스의 목소리에 태호의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상장군이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복창했다.

그들이 나가고, 이제 카자토스의 시선이 태호와 라간에게 닿았다.

“그대들은 전투에서 나를 도울 수 있겠나?”

본디 라간은 무 대륙의 한 지역에서 에픽을 먹기 위한 퀘스트를 할 생각이었다.

태호가 카자토스에게 물었다.

“이 친구는 남동쪽 살폰 정글에 볼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곳은 이미 혼돈의 힘에 잠식당했다. 가 보아야 헛수고다.”

그렇다면 라간이 해야 할 퀘스트 대상인 바바로 부족 역시 타락했을 터.

태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북서쪽 탈론의 숲은 어떻습니까?”

“그 곳은 아직 멀쩡한 것으로 안다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까?

태호가 에픽 콜렉트의 개방조건을 위해 방문해야 할 곳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사실, 멀쩡하지 않더라도 특수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유적’ 은 발견되지 않을 테니 크게 상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부근이 적의 근거지라도 된다면, 귀찮아질 것을 우려했을 뿐이다.

카자토스가 태호와 라간을 번갈아 보다 입을 열었다.

“모레 전투에서, 그대들 역시 이기거나 죽어라.”

그 순간.

[퀘스트 발생!]

[9급 퀘스트]

[메인 퀘스트]

[무 대륙의 패자]

메인 퀘스트가 떠올랐다.

카자토스가 말을 이었다. “만약 이긴다면, 후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 이기거나 죽어라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