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보 학자 카실론 >
후한 보상이라.
태호는 가만히 서서 빤히, 카자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눈을 하고 있었다. 태호는 그런 눈빛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과거, 판타로스와의 최종결전을 앞두었을 때. 아마, 자신도 저런 눈을 했을 것이다.
“그러죠. 다만.”
태호가 덧붙였다.
“저는 그럼 지금 당장, 북서쪽 탈론의 숲에 다녀오겠습니다.”
카자토스가 물었다.
“그 곳은 원시 식물들이 가득한 곳. 무엇 때문에?”
“개인적인 볼일입니다.”
“그렇게 하라.”
카자토스가 군말 없이 승낙했다.
태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 라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라간.
-어.
-내가 앞서 말했던 에픽은 물 건너 간 것 같다. 근데, 카자토스가 있다면 배울 게 있을 거야.
태호가 속닥거리며 말을 전해 주자, 라간이 눈을 반짝였다. 이윽고, 태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간이 말을 하면 좋겠지만, 녀석은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위대한 무신 카자토스 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저 친구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저는 마법사이지만, 저 친구는 전사입니다. 결전의 날을 대비하고 싶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카자토스는 가만히 라간을 보다, 태호에게 물었다.
“방패와 단창을 사용하는군. 테무 일족의 검술은 인간으로선 익힐 수 없다. 허나, 단창 정도라면... 오르카!”
“예, 대장군.”
상장군 오르카가 몸을 일으켰다.
“그대는 지금부터 저 이방인에게 단창술과 방어술을 가르쳐 주게.”
“알겠습니다.”
태호는 그 말을 라간에게 전달해 주었다.
-오. 이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냥 찍어 본 거다. 대륙의 테무일족이라면, 분명히 이런 식으로 뭔가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의외로 일리가 있어.’
태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카자토스.
어쩌면, 이 인물은 훗날까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과거, 확장팩 보스로 등장할 녀석들은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강자들이었다. 당대 최강의 유저들이 수백은 모여서 장기간,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해서 모은 데이터로 쓰러트려야 했던 보스들이다.
‘그렇지.’
생각 해 보면 그렇다.
‘확장팩 보스로 등장할 존재를 아군으로 만든다는 거.’
이는 그 어떤 동료보다 든든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상황도, 시기도 아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잘 배워 둬.
상위 존재에게 배움이라는 것으로 익힐 수 있는 스킬도 분명히 있다. 라간은 씩 웃으며 태호에게 한쪽 눈을 깜빡여 보였다.
-라져 댓.
* * *
타타타타타탁!
유령표범이 무 대륙을 질주해 나갔다. 과거, 무 대륙이 유저들에게 개방되었을 때는 4번째 확장팩이 공략된 이후였다.
이 곳의 평균레벨은 400~600 사이.
레벨의 갭이 큰 것은 지역별로 등장하는 수준차이가 심해서다. 그리고, 이 곳의 던전들부터는 정예가 그야말로 쏟아진다.
말 그대로, 소수 정예!
무 대륙의 던전들은 소수정예로 클리어해 나가거나, 솔로 플레이에 최적화 돼 있다. 바로, ‘승부’ 라는 컨셉 때문이다.
무 대륙의 존재들은 보통 전쟁을 할 때, 우두머리나 대표가 나서 일대 일 승부로 전쟁의 승패를 가름짓는다. 지금 와서야 타락한 나파가 그런 컨셉이고 뭐고 다 뭉개버렸고, 과거에는 타락한 카자토스가 그 컨셉을 뭉개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태호는 무 대륙을 질주하며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대지에는 타락한 존재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분명 푸르렀던 대륙엔,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래도 혼돈의 힘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달리며 ‘어둠의 추적자’를 활성화시켜 보았다.
아직 잡히는 장군이나 대장군은 없다.
이 땅에 로만을 비롯해 뱀파이어즈의 세간부가 정착했다. 이번 기회에 놈들을 확실히 조지고, 계획을 파토내야 한다.
‘어찌 한다?’
따지고 보면 골치아픈 적이었다. 유저가 적인 경우가 가장 그러한데, 이유는 단순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까.’
판타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도달한 곳은 무 대륙 북서쪽, 탈론의 숲이었다.
탈론의 숲은 거대한 원시림이었다. 과거, 샤미드 수림이라는 곳에 왔을 때랑은 전혀 다르다. 이 곳은 식물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웬만한 건물 크기보다 더 크다.
게다가 서식하는 곤충들과 새, 그리고 몬스터들의 평균 수준도 500대에 달한다.
본대륙의 레이드급 던전 수준이 무대륙에서는 잡몹 수준이다- 이 말이다.
태호가 막 탈론의 숲으로 들어서자.
[숲의 가호가 발동중입니다.]
우리아의 숲의 가호가 발동되어, 전신에 은신효과를 부여했다. 잡몹들이 달려들면 괜히 귀찮아질 수 있으니, 아주 유용한 셈이다.
그대로 유령표범이 숲 속을 질주한다.
파파파파팟!
유저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 그 곳에는 그야말로 원시 그 자체의 생태계가 조성돼 있었다. 당장 거대한 나무를 기어올라가는, 족히 20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 지네가 보였다.
[Lv. 495]
[자이언트 밀리패드]
꿈틀거리는 수천 개의 발과, 윤기를 띈 단단해 보이는 등갑이 눈에 띈다.
게다가 장신1미터는 넘어 보이는 개미 군단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Lv. 450]
[워 앤트]
저건 전투개미들이고, 섣부르게 건들면 수백 마리의 워앤트 군단에게 쫓기게 된다.
그 외 다양한 절지파충류들을 스쳐 지나가던 태호는 일순간 유령 표범을 멈춰세웠다.
가르르릉-
유령 표범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자, 인벤토리 창에서 고기 한 덩이를 꺼내 먹여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긴가.’
태호의 눈 앞에는 마치 앙크로와트 사원처럼 세워진, 아주 오래돼 보이는 건축물 하나가 홀연히 서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건축물 같고, 그냥 대충 보면 이끼에 뒤덮힌 큰 바위 같기도 했다.
우선, 유령표범을 소환해제한 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눈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가 개방 조건 : 미지의 대륙을 찾아, 그 곳에 숨겨져 있는 에픽 콜렉트의 유적 찾기.]
[유적을 찾았습니다.]
곧, 태호의 몸에서 금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 광채는 정면의 유적지로 쏘아져 나갔다.
구구구궁-!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사방이 떨리며 유적이 깨어나고 있었다. 온 몸에 칭칭 감고 있던 이끼와 식물들이 삽시간에 떨어져 나가고, 어느새 눈 앞의 유적은 본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약 4층 건물 정도의 크기.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흰색 돌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유적지의 꼭대기 한가운데에는 한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입구를 찾는 것은 쉬운 일. 바로 눈 앞에 보이니까. 태호는 이미 한 번 겪어 본 바 있는 이 일을, 빨리 해치우기 위해 정면의 문으로 들어섰다.
에픽 콜렉트의 개방 조건. 그건 애초에 이 유적을 찾는 것. 들어가게 되면, 곧바로 클리어된다.
태호가 건물로 들어선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사방의 풍경이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과거에는 없었던 기억이었다. 태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지팡이를 꼬나 쥔 채 자세를 낮추었다. 막시무스와 아르카네도 소환해 냈다.
헌데.
[당신의 펫 ‘강철의 기사 막시무스’를 소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정령 ‘아르카네’를 소환할 수 없습니다.]
[불가사유 : 상위 신력이 만들어 낸 특수지역]
어?
신력?
아니, 잠깐만. 그냥 신력이 아니라 ‘상위 신력’ 이라는 말이 어째 낯설다.
태호가 당황할 무렵.
사방의 풍경은 어째 한번 본 풍경으로 바뀌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유독 귓속으로 파고드는 기분. 어느새 온 사방은 시계들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
이 곳을 본 적이 있다. 다름아닌, 서울의 하얀색 시계탑에서!
태호는 이 곳이 여신 아우슈리네가 어떤 남자와 대화를 하던 곳임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사방의 풍경, 그리고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에 한 개의 탁자.
“아, 역시 너구나?”
문득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태호는 흠칫 놀라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귀신처럼 홀연히, 어느 순간 나타난 남자는 태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우슈리네가 선택한 최후의 보루가, 너였단 말이지.”
태호는 가만히 그를 보다, 물었다.
“네메데스?”
“흠... 그래. 지금은 그렇게 불리고 있지.”
“그리고... 카실론?”
“인간일 적, 그런 이름도 하나 가지고 있었지.”
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초보 학자 카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에픽 아이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그 남자였다.
텍스트로는 익숙하나, 실제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었던 그런 신이었다.
그리고.
‘인간일 적?’
중요한 단서일 수 있는, 그 말을 되새겼다.
“그래, 시간을 되돌아온 기분이 어떠실라나?”
눈 앞의 카실론, 혹은 네메데스. 태호는 그 둘 중, 카실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
그리고 그는, 태호가 회귀자인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두 명 중 한명이다.
“할만 해?”
그의 물음에, 태호는 빤히 그를 보다 대답했다.
“그럭...저럭이더군요.”
“그래?”
카실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이 곳에 와 있는 겁니까? 과거에 이 곳은 이런 큰 이벤트가 있던 곳이 아니었는데.”
태호의 물음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카실론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과거에는 네가 회귀자가 아니었고, 아우슈리네는 권능을 쓰지 않았었으니까.”
“......”
“그리고, 이 곳은 원래 내 거야. 너도 에픽 아이템을 제법 모아 본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해답이 있었다. 에픽 아이템마다 적혀 있던 ‘초보 학자 카실론’ 의 한 마디 평가, 혹은 글귀들.
“당신이 에픽 콜렉터란 직업을 만든 신?”
“흠...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서, 이 세계가 창조될 때 에픽으로 분류될 아이템들을 분류하던 사람일 수도 있고.” 태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당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 중 하나입니까?”
“한 숟갈 거든 건 사실이야. 그래서, 제법 높은 직위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
태호가 막 다시 뭔가를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카실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지?”
“......”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은 너무 일러. 네가 알면 안 돼. 균형의 힘이 버텨내질 못 해. 알면, 필연적으로 망가질 거야.”
“......?”
균형의 힘이 버텨내질 못 한다?
태호가 그 의미를 곱씹을 무렵이었다.
“균형의 수호자는, 네가 알게 될 지식으로 인해 다가올 역풍을 막아 줄 것이다.”
“......”
“그것을 온전히 깨운 뒤에는, 너와 나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터.”
꿀꺽!
태호는 천천히 물었다.
“망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밉니까?”
“서서히... 천천히...”
카실론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되뇌었다.
“허나, 확실히... 이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리겠지...”
문득 그 때 든 생각은, 로만을 비롯한 세 머더러들이었다. 카실론은 이내, 태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간 많은 차원을 돌아다니며, 이 저주받은 세계는 무한한 반복을 해 왔다. 하지만, 아우슈리네의 말 대로야... 네 행보는 파격적이고도, 신선하다. 자신이 가진 강점을 한점 사리사욕 없이, 온전히 활용하고 있어.”
“......”
“그녀의 말 대로다... 네게 걸어볼 만 하겠어.”
이내, 사방이 흩어져 간다.
태호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수호자의 힘을 온전히 각성하게 되면, 다시 찾아 와라.”
화아악!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어느새 태호는 유적지의 바깥에 서 있었다.
눈 앞에 메시지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추가 개방 완료]
[에픽 콜렉트의 추가 목표가 개방되었습니다.]
< 초보 학자 카실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