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전용 에픽 >
“으으...”
씨드는 정신을 차렸다. 아까, 언노운에게 죽었던 것 까지는 생각나는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의 씨드는 아무것도 없는 회색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문득, 언노운의 말이 떠올랐다.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이 상황.
실은 그랬다.
씨드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혼돈의 힘의 사념체와 계약을 하고 나서, 혼돈의 힘이 부여한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 하면서, 그리고 그 보상으로 얻은 에픽 아이템을 개방하면서.
수 없이 느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리얼포스에 심취하게 돼 버렸다. 그 과정에서, 부와 힘을 얻었다. 명예?
악명도 명예라면, 그렇다. 명예도 얻었다.
허나,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로그아웃 한 것이 언제적이었을까?
아마 일 주일? 이 주일? 그보다 훨씬 더 전 같다.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왜 로그아웃이 안 되지?’
그리고 언노운에게 죽었다.
“아아, 실망이구만.”
그때.
씨드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 서 있는 것은 로만이었다.
“로, 로만.”
“기껏 공들인 무 대륙 계획은 완전히 파토가 나 버렸네~ 누구 때문일까?”
“나, 나, 나 때문은 아니야.”
씨드가 항변하듯 소리쳤다.
“아니지, 아니지. 네놈들이 밍기적거리지만 않았어도 진작 카자토스랑 나파 둘 다 타락시킬 수 있었잖아?”
로만은 싸늘한 얼굴로 저벅 저벅 걸어와 씨드 앞에 섰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있는 씨드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밍기적거리다 기회를 놓쳐서, 카자토스는 요새로 도망쳐 버리고 그 사이 언노운이 와서 모든 게 다 파토나 버렸어. 이 개자식아.”
말투는 장난스러웠으나, 섬뜩했다. 씨드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이, 이, 이제 그만할래.”
“뭐?”
“이, 이거... 그, 그만할래. 나, 나, 로그아웃 할래. 이거... 에픽 아이템 너 줄게... 난, 이제 그만하고 싶어.”
씨드의 말에 로만이 씩 웃었다.
“등신새끼. 누가 그만 하게 해 준대?”
“......뭐?”
“그러게 계약은 잘 알아보고 해야지.”
로만이 이죽였다. 씨드는 문득, 과거 혼돈의 사념체와 맺었던 계약을 떠올렸다.
-무, 무엇을 바쳐야하는데?
-네.... 영혼... 비명... 바치겠느냐...
그때는 그냥 게임인 줄 알고 바친다고 했었다. 그리고, 혼돈의 유산을 개방할 때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돈의 유산이 개방된 그 시점에서, 계약은 직접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이제는 이 세계가 네 현실이야.”
로만의 말을 들은 씨드가 몸을 덜덜덜 떨었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난 그저...”
문득 씨드는 깨달았다. 로만 역시 이상해졌다. 욕구충족적이고 자극적인 방송을 일삼던 철부지 로만이 아니었다.
놈의 두 눈은 회색빛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신에는 기괴한 오오라가 감돌았다. 과거의 장난스럽던 분위기는 이제 없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너... 로만... 아니지.”
씨드의 말에, 로만은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면, 정신병에 걸려 버릴 것 같았다.
“잘 들어, 등신아.”
로만은 씨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른이라는 건,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거야. 나이만 처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넌 지금부터 책임을 져야겠다.”
“뭐, 뭐?”
푹!
로만의 손이 씨드의 심장을 찔렀다. 치이이익- 하며 피가 튀었다. 씨드는 전신을 장악해 오는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쳤다. 허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씨드는 죽지 않았다. 다만, 죽어갈 뿐이다. 숨을 헐떡이며 이성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로만은 그런 씨드를 번쩍 들고 회색의 공간을 저벅 저벅 걸어갔다.
어느 순간. 회색 공간의 끝에는 거대한 제단이 서 있었다.
“너희 모두,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
그 제단에는 뱀파이어즈의 길드마스터, 그리고 부길드마스터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씨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제물로서 그 책임을 다 해라, 버러지들.”
털썩!
씨드가 제단 위로 날아가 쳐박혔다. 그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물었다.
“너, 너... 너... 누구야... 로만... 어디... 갔어...”
“로만?”
문득, 로만이 섬뜩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그런 인간이 있었던가? 큭, 큭큭큭...”
곧, 로만의 입에서 사이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산하고도 소름끼치는 이족의 언어였다.
* * *
미니미 섬에 막 도달한 태호는 씩 웃었다.
“세상에, 진짜 신기하네 여긴."
섬의 크기는, 얼마 전 지나쳤던 '홀로 섬' 비슷한 크기.
하지만 이 곳만의 특이점이 있었다.
-거인이다!
-거인이 왔다! 으악! 우리 모두 죽었다!
이 곳의 거주민들이다. 이 곳은 미니미 라고 불리우는 작은 요정들이 사는 곳이다. 크기는 대략 태호의 주먹만 한 크기인데, 군락을 이루며 여기 저기 나뉘어 산다.
태호가 등장하자마자 난리가 났다. 태호가 조우하고 있는 것은 가장 선두의 작은 마을이었다. 작지만, 언뜻 봐도 백여 명은 모여 사는 듯 한 마을이다.
-싸우자! 싸울 준비를 하자!
미니미들이 여기 저기서 이쑤시개 같은 것을 들고 태호에게 대항하려 했다. 바들바들 떨고있는 것이 너무 웃겨 태호는 배를 잡고 웃었다.
“맙소사군.”
-거인이 말을 했다!
“너희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단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태호가 자비로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 창을 뒤적였다.
“어디보자...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꺼내 든 것은 사과였다. 태호가 꺼낸 사과를 보더니, 미니미들이 자지러졌다.
-끄아악! 사과가 미니미만 하다!
-괴물 사과다!
태호는 미니미들이 없는 자리를 골라, 사과 두 알을 내려놓아 주었다. 내친 김에 인벤토리 창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 그리고 생선도 하나씩 내려놓았다.
-세상에... 평생 먹어도 못 먹겠다.
-좋다 거인! 물어볼 게 뭐냐!
태호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이 섬 어딘가에, 거대한 유적 같은 게 있을 텐데 말이야. 엄청 큰 건물 같은 거 말이야.”
-엄청 큰거?
“그래, 엄청나게 큰 거.”
-저기, 산 넘어 가면 있는거?
“산 넘어 가면 있냐?”
태호가 몸을 일으켜 저 편을 보았다. 미니미들에게 있어 ‘산’ 이라는 개념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여정을 해야만 넘을 수 있는 존재였다.
-있다, 엄청 커!
“그래, 알았다.”
태호는 그렇게 대답한 뒤 유령표범을 소환해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제법 높은 산을 넘자, 꼭대기에서 저 아래가 훤히 보였다. 홀로 섬 크기의 섬 아래, 이곳 저곳에 개미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개중.
시커먼 흑요석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듯 한 유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기군.’
태호는 목표를 정한 뒤, 달렸다.
잠시 후.
태호는 흑요석 건물 앞에 도달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3층건물보다 조금 높은 크기였고, 표면에는 신비로운 음각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 곳이었던 것 같은데.’
흑마법사의 전용 에픽을 구하는 방법은, 과거 인터넷으로 퍼진 정보를 수집해 알게 되었다. 미니미 섬을 직접 방문해 본 적은 없기에, 그 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확실히 이 곳이 맞는 듯 싶다.
유적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다. 무력으로 열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다, 가만히 접근해 본다.
[입장조건 충족]
[흑마법사]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끼이익- 하며 문이 열렸다.
‘그 다음엔 시련이 있다고 했나?’
과연.
유적을 열고 들어서자, 내부에는 괴상한 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마치 마법사 로브를 입은 허수아비들 같았다.
저마다 꼿꼿히, 생기 없는 모습으로 서 있다가 태호가 들어서자 하나 둘 두 눈에 생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냐... 이 곳은, 흑마법사를 위한, 시련의 유적.]
[흑마법사가 아닌 이는, 나가라, 끼릭끼릭]
[멍청이, 여기는, 흑마법사만 올 수 있다.]
세 허수아비들은 서로 만담을 하듯 대화를 나누며 태호를 보았다.
[우리는, 흑마법 허수아비.]
[볼카노스 님의 명에 따라.]
[유적을 찾은 후배에게, 시련을 준다.]
“......”
그래, 분명히 이런 느낌이었다. 태호는 미간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렇냐?”
[그렇다. 임마. 새끼야.]
[싸가지가, 없는데, 끼릭끼릭]
[볼카노스 님의, 명에 따라, 호되게 혼내 준다.]
“......”
태호는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간만에 통쾌하게 웃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는 볼카노스 님의 제사장입니다. 자자, 이리 와 보세요.”
[뭐라? 저게, 헛소리를, 하네?]
* * *
잠시 후.
태호가 볼카노스를 소환해 직접 보여주자, 세 허수아비들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진짜구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끼릭끼릭]
볼카노스에게 듣기론, 이 삼인방은 과거 마법으로 만들어 둔 더미 인형이라고 했다. 이 유적을 찾는 흑마법사에게 시련을 주는 역할이라는데, 꽤나 독특한 컨셉인 듯 했다. 의외로 보유한 힘도 결코 적지 않은 듯 하다.
"자, 이제 됐죠?"
[그래, 그렇다.] [따라오거라. 끼릭끼릭]
콩 콩 콩! 뛰며 허수아비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인도한 곳에, 흑요석 상자가 있다. 상자를 열자 검은 색의 장갑 한 켤래가 보였다.
[우리가 지키던, 유물.]
[멋진, 흑마법의, 정수, 끼릭끼릭]
[이젠, 네 거다.]
태호는 군말 없이 장갑 한 켤래를 챙겼다.
[아이템 : ‘칠흑의 어둠장갑’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서 두 번째 흑마법사의 전용에픽을 획득한 셈이다.
전용에픽인 '칠흑 세트' 는 이제 두 부위를 모았다.
‘이건 꽤 손쉽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전용에픽만 남았는데, 그걸 구하는 것은 제법 고난의 길일 터다.
유적을 막 나서려던 그 때. 문득, 태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 허수아비가 보였다.
“......”
그들을 보며, 어쩐지 엘 로스의 던전에서 본 문지기가 떠올랐다. 목적이 정해져 있는 삶에서, 그 목적을 달성해 버린다면 어찌 되는 걸까?
가만히 생각하던 태호가 입을 열었다.
“전 이제부터 본대륙으로 갈 건데, 같이 가실까요?”
[저, 정말이냐?]
[우리를, 데리고, 가게? 끼릭끼릭]
어쩐지 반가운 목소리여서 태호는 빙긋 웃었다.
“그럼 따라 오세요.”
[그럼, 고맙게.]
펑! 펑! 펑!
그 순간, 세 허수아비는 작아지더니 아이템으로 변해 버렸다. 마치 유령선과 비슷한 형태인 듯 하다.
“......”
거 참 편리한 기능이다.
태호는 세 허수아비를 주워, 인벤토리 창에 집어넣었다.
< 두 번째 전용 에픽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