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 조져지고, 더욱 강해지거라. >
테무 일족에게는 광휘의 궁전의 2~3층을 내어 주기로 했다. 어느새 조용해진 1층에는 이제 로키의 제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흠... 못 보던 새 내 제단이 시끌벅적해졌구나?]
간만에 소환된 로키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태호는 가만히 로키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이렇게 돼서... 만약 불쾌하셨다면, 곧바로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흠.]
로키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묘한 얼굴을 했다.
[저들은... 테무 일족이잖아?]
“예.”
태호가 눈을 빛냈다. 로키가 테무 일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로키의 두 눈에 어쩐지 흥미가 가득 찼다.
[너는 혹시 무 대륙에 다녀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태호가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했다. 나파와 카자토스의 대립에 대해 설명까지 할 무렵, 로키의 두 눈이 흥분에 가득찼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결국 나파란 놈을 해치운 것이냐?]
“예. 카자토스님과 제가 합공해 나파를 해치우고, 이 땅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호오... 호오... 아주 흥미롭군.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로키는 마치 영웅담을 듣는 소년마냥 재미있어했다.
“로키 님께서는... 무 대륙에 대해 아시는군요?”
[아다마다? 우리들 중 무 대륙의 용맹한 테무일족을 모르는 이들이 있겠느냐?]
“그들이 무슨 일들을 했는지요?”
[아, 네 녀석도 모르는 게 있구나? 하하하! 그래, 그들은 과거 혼돈의 힘에 맞서 싸우던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문득 로키의 두 눈에 씁쓸함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비운의 일족...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 굴레에서 벗어났겠군.]
로키의 말은 애매모호했다. 아니, 과거엔 애매모호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정확히 안다.
‘원래의 운명이라면, 그들은 타락하여 비운의 삶을 살게 되었을 테지.’
어쩐지 로키는 회상에 잠긴 얼굴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뭐냐?]
“글쎄요. 저는 신대륙으로 떠나볼까 합니다.”
태호의 말에 로키가 눈을 다시 반짝였다.
[어디로? 어디로 말이냐?]
“드래곤의 땅으로 가 볼까 하는데요.”
드래곤의 섬.
지금의 태호는 로만을 찾을 방도가 없다. 놈이 작정하고 숨거나, 태호의 예상범위 밖에서 움직인다면 사실상 놈이 하는대로 끌려 다녀야 할 수 있다.
‘어쩌면.’
태호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 가설을 세웠다.
‘로만은 이미 세계의 일부가 돼 버렸을 지도.’
가설이라기보단 확신이었다. 잊혀진 왕국 공략을 시작하기 전 잠깐 매스컴에 등장한 후 아예 종적을 감춘 것이 추측의 첫 번째였다.
그리고, 이번에 머더러 씨드를 처리하면서 느낀 괴리감이 두 번째. 놈들이 무 대륙을 타락시켜 역사를 앞으로 끌어오기 위해 움직인 흔적이 세 번째.
‘이미 혼돈의 힘에 잡아먹혔을 확률이 매우 높지.’
그렇다면, 무 대륙 공략에 실패했으니 다음 타겟은 드래곤의 섬일 확률도 상당한 수준.
‘놈은 리얼포스의 미래 확장팩들을 대부분 알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이 과연 일개 유저의 추측일까? 아니, 그건 분명히 외부의 힘이 개입해 있다는 반증.
그럼?
선수를 친다.
태호는 드래곤의 섬으로 갈 생각이었다. 허나 어떻게 한다?
[드래곤의 섬이라... 흥미롭군. 방법은 고안해 두었느냐?]
방법.
그 방법이 문제였다. 적어도, 바람복어를 이용한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섬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드래곤의 마법 토네이도를 뚫을 방도를 찾지 않는 한 입성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 있다.
‘엘린의 공중정원.’
엘린의 공중정원으로 향해, 그곳의 레이드보스 ‘엘린’을 이용한 방법이다.
“적당히는요. 엘린의 공중정원을 이용할 겁니다.”
로키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이내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너, 역시 재미있다.]
로키의 웃음에는 공허함이 반쯤 섞여 있다. 그는 지금 태호가 가진 ‘수호자의 힘’ 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고 있다.
아마, 그는 ‘이번 차원 역시 글렀다’ 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애초에 포기해 버린 채 이 상황에서 그나마의 흥밋거리를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
‘로키를 믿을 수 있는가?’
자신이 회귀했으며, 수호자의 힘을 이용해 혼돈의 존재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알려도 될 존재인가?
아직은 ‘아니오’ 다. 그가 알게 되는 사실들이, 천계의 고위 존재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아직은 정보가 없다.
“아차. 혹시 제게 하사하신 ‘속임수’는 인간 외의 생물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안 된다.]
“제물을 바칠 테니 강화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미물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 가지지 않고 있다- 정도의 해석을 할 수 있었다.
그 뒤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눴다. 로키는 어쩐지 꽤 편한 느낌이었다. 그를 대할 때면, 장난스러운 동네 형을 대하는 것 같단 착각이 든다.
어느 순간.
태호는 로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키는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태호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냐?]
“로키 님은... 인간이셨다고 했죠.”
[그렇다.]
“언젠가는 당신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합니다.”
[......]
로키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로키는 그렇게 한참 동안 태호를 보다 대답했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무거운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있으마.]
태호가 로키를 돌려보낸 뒤, 몸을 돌렸다. 광휘의 궁전의 문을 열고 나설 무렵, 문 앞에서 정좌를 한 채 앉아 있는 카자토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그렇다. 용무를 보는 듯 하여.”
카자토스의 목소리는 굳건했다. 태호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본대륙의 모험가들이 간간히 보이더군.” “많이는 없을 겁니다.”
“좋은 땅이다.”
카자토스는 사방을 둘러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 터전으로 삼기엔 더 없이 좋은 땅이다.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별말씀을.”
태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무 대륙에서의 시간들은 태호에게 여러 가지 혼돈의 유산을 주었으며,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바빠 보이는군. 어서 가 보도록 하라.”
“아참, 시간이 되신다면 제 동료들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동료들이 있나?”
“예. 전투를 즐기는 이들입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카자토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다.”
태호는 라간에게 귓속말로 이런저런 지시사항을 내려 주었다.
-진짜로? 카자토스가 우리한테 가르침을 준다고 했어?
-그래. 아마 도움이 될 거다.
-야호! 고마워 형님! 궁전은 나한테 맡겨! 내가 책임지고 잘 돌볼게!
피식 웃으며 광휘의 궁전을 떠난 태호는 생각에 잠겼다.
‘엘린의 공중정원이 어디쯤 떠 있을라나.’
북쪽으로 향했으니, 북쪽의 얼음세계를 까마득히 지나 펼쳐진 북부 대해를 넘어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 너머에는 한없는 한기의 바다가 있다. 유저의 발길은 당연히 닿지 않을 미지의 바다다.
태호는 대강 머릿속으로 과거의 지식을 끄집어내 보았다.
‘확실히.’
대장군과 장군들을 사냥하며 태호의 본신은 완전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덕인지, 기억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생생해져 가고 있었다.
막 회귀했을 초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던, 애매모호한 기억들도 이제는 전부 선명하게 하나하나 기억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엘린의 공중정원은 북부 대해를 가로질러, 신대륙 쿠반을 기점으로 크게 우회하여 본대륙에 돌아온다.’
그 기간은 1년.
‘신대륙 쿠반쪽으로 가면 일단 공중정원과 조우하는 건 큰 일이 아닌데.’
문제는 어떻게 올라가느냐다.
바람복어를 쓴다?
이 시기의 바람복어는 북부 대해를 지나지 않는다. 아마, 동부 연안에서 복어를 이끌고 북부로 향하더라도 가다가 죄다 죽어 버릴 거다.
[까악, 까악, 까악!]
[Lv.78]
[정예]
[까마귀 왕, 야타카라스]
간만에 맡는 바깥공기가 기분 좋은지, 야타가 꽥꽥 울어댔다. 태호는 그 녀석의 크기를 잘 가늠해 보았다.
크기는 현재 등에 막 올라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올라탔다.
“날아 봐.”
[까악! 미친 주인이 까마귀 죽이려고 한다악!]
야타가 비명을 지르며 날개짓을 했다. 뜨긴 뜨나, 대략 지상에서 10여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가 한계.’
탑승은 힘들다.
이 녀석을 키워서 타고 갈까? 란 생각에 물어 보았다.
“야. 너 공중정원 알아?”
[저번에 주인님이 잠깐 보여준적 있지 않냐악!]
“거기까지 날아서 올라갈 수 있어?”
[그렇다악! 하지만, 원래대로 모조리 성장해야 한다악!]
전성기시절로 돌아가야한단 말이었다. 태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마력의 결정체 먹는 귀신이었다. 그것을 수급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시간이 문제였다. 이 녀석은 레벨이 오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마력의 결정체 요구량이 늘었다.
즉, 지금 상황으로 태호가 아무리 열심히 사냥을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안 된다.
문득.
‘아.’
북부 대해라면, 마침 이용할 수 있는 필드보스 하나가 떠올랐다.
. .
.
.
.
.
[이번에도 내 딸이 강제귀환 당했더군.]
“아하하, 예에... 안타깝게도요.”
태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둠의 정령왕 아카드를 맞았다.
아르카네를 소환하자 만들어진 차원의 통로에 아카드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아르카네는 그런 아빠와 태호를 보며 방글방글 웃었다.
[재밌었어! 조져졌어!]
아르카네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깔 웃으며, 자신이 조져진 이야기에 대해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아카드는 미간을 긁적이며 끈기 있게 그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아르카네를 냉큼 집어 태호에게 넘겨 주었다.
[내 딸이 조져진 이야기를 수백 번은 들은 듯 하다. 아비 된 입장으로선...]
태호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막 입을 열려던 그 때.
[뿌듯한 한편으로 괴롭더군.]
“......예?”
자식이 조져졌는데 왜 뿌듯한 걸까.
[나의 딸이 전장에 나서, 점점 더 강해진다는 증거이니까. 참고로 이 몸은 어디 보자...]
아카드는 손가락을 꼽더니, 한참 생각하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마 여태까지 142번 정도는 조져진 듯 하군.]
“......아, 예 그렇습니까......”
[무수히 많은 조짐을 당하며 성장하는 것이, 정령의 길.]
엄숙하게 말하는 아카드의 모습이 자뭇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묘하게 이상한 사고관을 가진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 우리 딸.]
[응! 아빠!]
[자주 조져지고, 더욱 강해지거라!]
[알았어! 자주 조져질게!]
대환장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휘청, 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다.]
아카드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사라지고, 차원문이 닫혔다. 태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어디 가? 조지러 가? 조져지러 가?]
“음...”
태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유령선의 조종대를 잡았다.
쏴아아아아-!
사방에는 어두침침하고 극한의 한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매서운 바닷바람, 그리고 시커먼 북부 대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유령선이 있었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아르카네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조지는 쪽일려나...”
< 자주 조져지고, 더욱 강해지거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