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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108화 (108/194)

< 고맙게 됐다. >

로크나이엘은 광휘의 궁전 앞에 섰다. 그는 어느새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멀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폴리모프라고 한다.

이를 이용해 드래곤들이 인간의 땅을 유희하곤 한다는 흔한 설정이었다.

“벌써 돌아온 건가.”

문득.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에 카자토스가 서 있었다. 카자토스는 자신의 양손검을 등 뒤에 멘 채 서 있었는데, 그것 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호오.”

로크나이엘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보았다. 카자토스는 그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는지 살짝 뒤로 물러서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군. 이 자는 누구지?”

“드래고니악의 로크나이엘 워커드다.”

로크나이엘이 전신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온 몸에 독특한 마력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얀 안개 같기도 하고, 빛 같기도 했다.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드래고니악...”

카자토스가 단숨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당대의 테무 대장군이군.”

드래곤의 두 눈에 대한 고찰이 여럿 있는데, 아무래도 드래곤들이 보는 시점은 유저가 보는 시점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태호의 눈 앞.

[테무 대장군]

[무 대륙의 패자, 카자토스]

이렇게 적혀 있는 이름표가 드래곤의 눈에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드래곤의 독특한 설정 중 하나로 유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로크나이엘은 아무래도 무 대륙의 언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삼인방의 대화는 막힘 없이 술술 풀려 나갔다.

* * *

“흠......  그렇다면 다음 타겟은 드래고니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어.”

로크나이엘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태호에게 시선을 돌린 뒤, 살짝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고니악이 당신에게 신뢰를 가집니다.]

[드래고니악과의 평판은 현재 ‘약한 신뢰’입니다.]

[당신의 정보창에 평판 메뉴가 생성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로크나이엘은 태호를 믿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하면, 문제는 지금부터군. 혼돈의 힘이 뿜어내는 강대한 유혹은, 사실 드래곤들도 버텨 내기가 버겁긴 하다.”

“......”

“지금의 드래곤들이라면 더욱 잘 먹히겠군, 대격변 이전의 전투로 우리 일족의 힘은 대폭 축소된 상태.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아집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로크나이엘의 말투는 아주 시니컬했다.

태호는 드래곤들의 힘이 대폭 축소됐다는 설정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허나, 왜 인지는 모른다.

“왜 힘이 줄어든 겁니까?”

“......”

로크나이엘은 태호를 빤히 보다,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혼돈의 힘과 싸우며 저주 비슷한 것을 받아서.”

태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짓말이군.’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혼돈의 힘이 내린 저주라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문득.

태호는 한 가지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유산.’

확장팩 이름인 ‘드래곤의 유산’처럼, 뭔가 유산이라 불리우는 물건 혹은 힘의 원천을 빼앗긴 건 아닐까?

이런 저런 가설을 세우며 태호가 입을 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를 기다렸다가 해결하는 방법입니다만...”

허나 이 일에는 한 가지 허점이 존재한다.

로만이 바로 ‘유저’ 라는 점이다. 혼돈의 힘에 먹혔든, 안 먹혔든 아무래도 ‘죽음’ 이라는 행위가 가져오는 패널티가 온전히 먹히지 않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상대가 물리적 죽음을 초월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역시 일리 있군. 그렇다면...”

태호는 단번에 대답했다.

“당연히 현재 드래고니악의 결계를 훨씬 더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 그렇겠지.”

로크나이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편이 가장 확실할 겁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결계를 강화하십시오. 드래곤의 신묘한 마법이라면 그리 어려울 일은 아니니까요.”

“......그래야겠군.”

태호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어쩐지 자신 없는 말투였다. 그래서 한번 떠 보기로 했다.

“하루면 되겠죠? 드래고니악의 드래곤들이 힘을 합친다면 하루도 안 걸리겠군요.”

“......”

로크나이엘이 자신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태호는 대번에 깨달았다.

‘동면에 들었군.’

다른 드래곤들은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다른 드래곤 일족 분들은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나 보군요?”

흠칫!

로크나이엘이 살짝 놀라며 태호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답하진 않았지만,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동면이라.’

태호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로크나이엘 혼자 결계를 강화시켜야 하는데, 아마 마력이 심하게 부족할 것이다.

동면 중인 일족을 깨우면 간단한 일일 텐데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

‘동면이 끝나기 전에 강제로 깨워지면 패널티가 큰 경우.’

태호는 대강 흐름을 유추한 뒤, 입을 열었다.

“동면을 강제로 깨우는 것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유추했을 뿐입니다.”

[말재간이 발동 중입니다.]

태호는 말을 이었다.

“결계 강화를 도와드리죠. 제 생각에는, 놈들은 무 대륙의 사방을 뒤덮고 있는 ‘해신의 분노’ 역시 쉽게 돌파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드래고니악의 결계도 돌파할 겁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태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는지, 로크나이엘은 끄응-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너는 뭐지? 마치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는 듯 태연하게 비밀들을 말해대는군.”

“일단 볼카노스 님의 제사장이긴 합니다.”

“......”

그는 볼카노스... 맙소사- 라고 중얼거렸다.

“신의 힘을 이용하자는 것인가?”

그의 물음에는 동면에 대한 시인이 담겨 있었다.

“신의 힘을 직접 이용해 강화하려면, 균형에 합당한 만큼의 제물을 필요로 할 겁니다. 그건 손해에 가깝습니다.”

최소 에픽급 제물을 요청할 텐데, 그 정도를 결계 강화로 쓰면 휘발성으로 날아가 버린다.

“에픽 아이템은 어떻습니까? 바람속성의 에픽을 사용해 결계 강화가 가능합니까?”

태호의 말에 로크나이엘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 가능하다.”

“그럼 에픽을 이용합시다.”

토네이도.

현재 드래고니악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결계는, 드래곤의 마법이 만들어 낸 토네이도다.

즉, 바람.

태호는 바람의 신 라르를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신노스 공략’을 위한 대비로, 에픽을 바쳐 눈도장을 찍어 둔 바 있다.

* * *

본대륙 북쪽, 북풍지대.

풍화가 진행돼 가는 바람의 신 라르의 제단에 선 태호가 인벤토리 창을 뒤졌다.

바람의 신 라르를 부르려면 특수한 풀을 이용하면 된다. 바로, ‘바람초’ 였다.

[등급 : 1급]

[종류 : 소모품]

[이름 : 바람초]

[바람이 가장 잘 부는 곳에서 자란다는, 바람을 머금은 풀.]

바람초 25개.

정확히 개수까지 맞춰야 라르를 소환할 수 있다. 태호가 제물을 올리자, 사방에 바람이 몰아쳤다.

휘이이잉-!

어느새, 제단 위에는 반투명한 모습의 바람의 신  라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부드러운 인상의 여자였는데, 태호를 보더니 빙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쪽은 드래고니악의 실버드래곤, 로크나이엘 워커드 님입니다.”

[드래곤 일족...? 그들은 아직...]

그녀는 뒷 말을 삼켰다. 태호는 그녀의 뒷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직 동면에서 깨어날 때가 아닌데, 라는 말이겠지. 이내 라르가 태호를 보며 다시 빙긋 웃었다.

[굴레가, 뒤틀렸구나.]

운명의 굴레는 이미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버렸다. 태호가 씩 웃었다.

“맙소사, 정말로 바람의 신이시오?”

로크나이엘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핏줄인가?]

“아버님의 존함은 라그나 워커드요.”

[라그나! 그 아이의 핏줄이로구나.]

어쩐지 라르는 라그나 워커드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이다가,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힘을 잃기 전의 드래곤은 족히 수천 년은 산다는 설정이었으니까.’

태호가 입을 열었다.

“에픽 아이템 교환을 요청합니다.”

[교환이라, 좋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혼돈의 유산 하나를 꺼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신구(반지)]

[이름 : 멸망의 반지]

[나의 힘 앞에 복종하라.]

[옵션 : ???]

[개방까지 필요한 생명과 영혼 : 0/1000]

“얼마 전 제압한 추종자에게 얻은 혼돈의 유산입니다.”

“호, 호, 혼돈의 유산!”

로크나이엘이 기겁했다. 라르가 군말 없이 양 팔을 펼쳐, 보유하고 있는 에픽 아이템들을 보여주었다.

바람의 신 답게 바람 관련된 아이템들을 보유하고 있는 라르의 물건들. 태호가 로크나이엘에게 말했다.

“하나 고르십시오.”

“고, 골라?”

“예.”

로크나이엘은 고심하다, 마법구 하나를 골랐다.

‘돌풍지대.’

마법구의 이름은 돌풍지대. 바람의 힘을 극대화 시키는 마법구였다.

[수락하는가?]

라르의 물음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

.

.

드래고니악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태호는 로크나이엘이 건네 준 스크롤을 찢어, 아주 손쉽게 드래고니악에 돌아올 수 있었다.

우선, 돌아오자 마자 사방을 점검해 본다. 문제요소는 느껴지지 않았다.

로크나이엘은 손에 든 ‘돌풍지대’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태호에게 물었다.

“이걸... 내게 주는 건가?”

“빌려드리는 겁니다.”

에픽의 가치는 태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태호야 에픽을 여기 저기서 척척 구해 대니 다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보통 이런 반응이 일반적이다.

“흐음.....”

그가 그것을 받아 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아아아-!

그 순간, 로크나이엘의 눈 앞에 반투명하고도 거대한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바람으로 뒤덮혀 있는 그 곳이 반으로 쪼개지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드러냈다.

‘에픽이잖아?’ 그 안에 든 것은 네 개의 에픽이었다. 하나 하나 이름이 대강 기억나 꼽아 보던 태호를 뒤로 하고, 로크나이엘은 새로이 얻은 에픽인 ‘돌풍지대’ 역시 마력을 가득 불어넣은 채 집어 넣었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구슬 같은 것이 다시 하나로 붙었다. 이내,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곧바로, 드래고니악을 둘러싸고 있던 토네이도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솟구쳤다.

콰아아아!

마치 근접하는 모든 것을 갈아 버리겠다는 듯 살벌하게 돌기 시작한 토네이도는,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엘린의 공중정원은 진작에 개박살이 날 거다.

텅 비어 접근할 수 있던 하늘에도 반투명한 바람의 보호막이 만들어져, 그야말로 철통의 요새가 되었다.

로크나이엘이 뒤 돌아 태호를 보았다.

그는 쭈뼛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게 됐다.”

“별말씀을.”

이 정도가 태호에게도 이득이었다.

이로서, 일단은 드래곤의 섬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를 해치운 셈이다.

물론, 이것 만큼 중요한 다른 일도 잊지 않았다. 태호가 로크나이엘에게 물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됩니까?”

< 고맙게 됐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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