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락한 신수(神獸) (2) >
헥헥헥!
강아지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거리다, 태호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뭐냐 이건...”
태호는 드물게 당황했다.
‘이게 펜리르3세?’
이름 한번 대충 지었다고 생각하며, 태호가 강아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망! 망망망!
펜리르3세는 이상할 정도로 태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던 주인을 만난 양, 태호에게 못 안겨 안달이었다.
태호는 잠시 고민하다, 펜리르3세를 품에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크기는 작았다.
핥핥핥!
녀석이 태호의 뺨을 핥았다. 녀석에게서 향긋한, 아주 향긋한 용과 냄새가 났다.
* * *
[현재 ‘로만TV’라는 인터넷방송 채널을 운영하던 김홍철 씨의 실종이...]
로만은 현실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태호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로만은 현실에서도 완전히 지워진 모양이었다.
인적이 완전히 사라진 그의 집에는, 리얼포스의 접속기와 방송장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리얼포스’를 즐기던 유저들의 연이은 실종사태는...]
정확히는.
판타로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맺었던, 그리고 혼돈의 유산을 일깨웠던 유저들이 실종되었다.
일각에서는 ‘현피’ 가 아니냐, 혹은 해외 잠적 등을 꼽았다. 물론, 해온 행적이 그야말로 망나니 그 자체였던 로만인지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거란 추측도 나왔다.
허나, 그는 완전히 이 세상에서 지워져 버렸을 뿐. 실종수사에 들어간들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태호는 그런 뉴스기사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우선, 로만을 잡아 조져야 한다.’
죽이는 것이 온전한 방법일까? 유저마냥 죽음에 대한 패널티가 거의 없다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찾지?’
자.
천천히 리얼포스의 확장팩들을 나열해 보자.
첫 번째 확장팩 ? 잊혀진 왕국
두 번째 ? 혼돈의 좌
세 번째 ? 드래곤의 유산
네 번째 ? 무대륙의 강자들
다섯 번째 ? 샴의 사원
여섯 번째 ? 환각의 케노스
일곱 번째 ? 신노스의 군단
여덟 번째 ? 심연의 헤파이돈
아홉 번째 ? 운명의 데페로
열 번째 ? 멸망한 세계
이중 잊혀진 왕국과 드래곤의 유산, 무대륙의 강자들은 태호의 손에 의해 사실상 무산이 됐다.
대장군 중에도 케노스와 신노스는 죽었고, 곧 등장할 대장군은 샴.
당장 리얼포스의 스토리상 ‘혼돈의 좌’ 가 가장 근접치에 가깝다.
혼돈의 좌의 내용은, 고대에 봉인되었던 혼돈의 별자리가 움직이며 시작된다. 악의 화신인 ‘오렌’ 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주인에게 이 세계를 바치기 위해 거대한 의식을 시행하는 스토리다.
그 주인은 당연하게도 판타로스.
‘하지만.’
혼돈의 좌가 움직이는 조건을 태호는 모른다. 그리고 당장 아직 ‘드래곤의 유산’ 이 온전히 끝나지도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메인 퀘스트가 클리어되지 않았어.’
태호가 보유한 현재의 메인 퀘스트는 이렇다.
[8급 퀘스트]
[메인 퀘스트] [고대의 드래곤]
[:고대의 드래곤들이 가진 비밀을 알아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상 : ???]
이는 막시무스가 부여한 ‘영광의 기사단’ 의 후속 퀘스트였다. 아무래도 막시무스는 리얼포스의 흐름 상, 거대한 줄기의 메인 퀘스트를 부여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지금 작금에 가장 중요한 건, 블랙 드래곤 ‘소테드 스펠터’ 다. 그와 가까워지면 여러 모로 유용할 것이며, 드래곤의 땅 중심부에 위치한 ‘유산’ 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할 무렵.
망망! 망!
[꺄하하하!]
저 편에서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태호가 흘끔 쳐다보자, 아르카네와 펜리르 3세가 신나게 들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 * *
[오, 오오... 펜삼아!]
펜삼이...
엄청난 작명 센스였다.
“이름이 펜삼이입니까?”
[응? 그치. 펜리르3세라고 매번 부르면 길고 어렵잖아.]
그건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망망!
펜리르3세는 로키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태호와 로키를 번갈아 보다가, 혼란스럽다는 듯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다 로키의 앞에서 망망! 짖었다.
“......”
[아마, 네게 나의 가호가 두 개나 깃들어 있어서 그러나보다. 네게서 내 힘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제야 태호는 이 녀석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까요? 데려 가시렵니까?”
[끙... 그건 힘들다.]
로키가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균열을 통해 불시착하게 된 이 녀석은 아직 천계에서도 정확히 존재를 알지 못 한다. 헌데, 다시 천계로 데려오려면 세계의 맹약을 깨야만 하느니...]
로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세계의 맹약이라는 것이 정확히 뭡니까?”
[......거대한 약속이다. 태고적, 이 세계를 두고 맺은 다차원간의 약속.]
로키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태호는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 들었다.
‘아무래도 리얼포스의 세계를 창조할 때, 간섭제한 조약 같은 것 같군.’
거기서 든 의문 하나.
“혼돈의 힘은, 세계의 맹약으로 제어가 불가능한 겁니까?”
[휴우... 제어가 되었지 않느냐.]
“예?”
로키는 태호를 빤히 보았다.
[제어가 되었다 했다.]
“......”
아.
태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세계의 맹약을 통해 혼돈의 힘을 제어하는 것. 그것은, 멸망의 시기를 늦추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혼돈의 힘은... 그 맹약이란 거대한 약속으로도, 멸망의 날을 뒤로 미루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강하단 말씀이십니까?”
[균형을 파괴하는 힘이란... 그런 것이다.]
기묘하다. 태호는 이질감을 느꼈다.
-이 지독한 짓거리, 나도 신물이 나. 천계의 윗선들은 이미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가만히 놔 두면, 끝없는 희생의 반복일 뿐.
태호는 문득 과거, 아우슈리네와 카실론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의 로키는 뭔가를 숨기고, 표면적인 정보만을 나열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천계의 윗선.’
그들은 뭔가를 꾸미고 있다.
태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질문을 날렸다.
“수호자의 힘이라면 막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네게 별 얘길 다 했구나.]
로키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허나 태호는 여러 가지 추측을 더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맹약으로 인해 리얼포스가 여러 번 재시작되는 것일 지도.’
그렇다면.
‘아우슈리네라는 수호자가 이미 존재했는데, 왜 천계의 윗선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걸까?’
수호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혼돈의 힘을 ‘막아내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주축으로 한 계획을 만들어야 정상이었다.
허나 지금의 천계는 정확히 ‘방치’ 중이다. 그냥 유저들에게 맡겨 놓는 모양새이지만, 상식적으로 유저들로 혼돈의 힘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태호는 어쩐지 싸늘해진 눈으로 로키와 펜삼이를 바라보았다.
‘천계의 윗선은, 혼돈의 힘이 깨어나는 것을 그냥 놔 둔다. 그리고, 놈들이 세계를 부수고 휘젓는 과정에서, 모종의 이득을 취한다?’
이런 다소 뜬금없지만, 어쩐지 일리 있는 가설까지 등장할 수 있다.
더 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입을 다물기로 작정 한 모양이니까.
[아무튼, 일단 펜삼이는 당분간 천계로 돌아올 수 없다. 지상계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
“흠... 문제는 없습니까?”
[있다.]
로키가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천계의 신수의 혈통. 이대로 있다간 분명 천계의 시선을 받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 곤란해지지...]
“시선을 받지 않으려면, 모험가의 소유물로 분류되는 게 어떨지요?”
로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호를 보다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씩 웃었다.
“이 녀석과 계약을 맺어 제 펫으로 만들면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 이긴... 한데에...]
로키는 어쩐지 불안해졌는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태호를 보았다.
[뭘 요구할 생각이냐? 이 영악한 놈아.]
“그건 차차 생각해 보죠.”
[하아... 아스가르드의 주인이 한낱 인간 따위에게 능욕당하고 있다니.]
로키가 한탄 아닌 한탄을 했다.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펜삼이에게 입을 열었다.
[펜삼아, 너는 지금부터 이 녀석을 주인으로 모셔라.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알겠냐?]
망! 망!
펜삼이는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로키를 보다가, 로키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태호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 참. 혹시 혼돈의 좌가 언제 움직일까요?”
[그거? 글쎄다, 운명이 제대로 뒤틀린 데다... 솔직히 언제 움직여도 이제 이상할 것은 없다...... 잠깐만. 그것도 알아?]
태호는 씩 웃어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죠.” [휴우... 그래라. 아참, 그리고. 펜삼이는 전투시에는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엄청 놀라지는 마. 우리 아가 상처받는다.]
“우리 아가...”
[우쭈쭈, 우리 아가 이리 온.]
헥헥헥!
펜삼이가 혓바닥을 내밀고 로키의 앞에 앉아 망망 짖었다. 로키는 안쓰러운 얼굴로 펜삼이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기 형아 말 잘 듣고, 몸 건강히 있어. 알았지?]
* * *
태호는 펜리르와 계약을 맺었다.
[펜리르 3세가 당신의 펫이 되었습니다.]
[이름 : 펜리르 3세]
[레벨 : 420][유아기 신수(神獸)]
[생명력 : 1000000][마력 : 100000]
[공격력 : 500000]
[방어력 : 500000]
[보유스킬 : 보름달 삼키기, 광폭화]
‘맙소사군.’
유아기 신수.
아직 덜 자랐다는 말인데, 레벨은 420이고 생명력 마력 공방스텟은 거의 정신이 나간 수준이었다.
‘이게 천계의 수준이란 말인가?’
물론 태호가 상대한다면 별 게 아닐 테지만, 고작 천계의 유아기 신수 하나가 이정도 파괴력을 가졌다는 것이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럼 신들은?’
신들은 아마도,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의 무력을 가졌을 것이다. 당장 태호만 보아도, 볼카노스의 권능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그 파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일단은, 든든한 아군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대장군 샴을 처치할 아군이 늘어나는 것은 언제든 나쁘지 않다.
망! 망망!
펜삼이가 들판을 신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태호는 모처럼 소환할 수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다 소환했다.
[개다! 개! 짖어봐! 짖어!]
아르카네가 빽 소리치며 펜삼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냉큼 녀석을 덮친 뒤, 복슬복슬한 털에 제 뺨을 부볐다.
[배고프다악!]
“새 동료니까 친하게 지내.”
태호의 말에, 야타의 두 눈에 심술이 가득찼다. 최근 야타는 자신의 서열에 대한 고민이 아주 많은 편이었는데, 이유는 유령표범에게 서열 정리를 시도하려다 된통 당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야타는 두 눈으로 펜삼이를 보며 포르르- 날아가 녀석의 머리 위에 앉았다.
[잘 들어라악! 넌 오늘부터 막내다악! 막내의 임무는 물 떠오기, 마력의 결정체 모으기, 그리고...]
펜삼이는 이 귀찮고 시끄러운 까마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고오오오오-!
녀석의 몸집이 일순 족히 스무 배 이상 거대해졌다. 어느새 펜삼이는 거대한 검은 늑대개처럼 변했다. 두 눈은 시뻘겋게 빛나고, 털은 윤기를 띄었으며 어금니와 발톱이 어마어마하게 날카롭고 길어졌다.
[꺄하하하하! 너무 좋아! 조져! 조지자!]
아르카네가 신이 나 폴짝 폴짝 뛰었다.
카르르릉!
야타는 그런 펜삼이를 보더니, 꽥! 하고 기절해 버렸다. 태호는 그런 펜삼이를 보며 흠칫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살라딘의 사원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단번에 납득해 버린 것이다.
‘추락한 신수.’ 추락해도, 신수는 신수다.
< 추락한 신수(神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