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14화 (114/194)

< 착각일 뿐입니까? >

비전력!

태호는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전생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전생의 소테드는 리얼 포스의 역사에 나타난 적이 없어.’

운대가 겹친다.

태호는 전생에 선택했던 직업인 ‘에픽 콜렉터’를 포기하고 흑마법사로의 전향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우연, 기연, 행운을 얻었다. 이는 태호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일까?

‘어쩌면.’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어도, 그 나름대로의 길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어쩌면 다른 장로 드래곤들에게 다른 속성의 비전력을 전수받을 수도 있었을 거다. 또 어쩌면, 물리계열의 직업을 선택해 무대륙의 테무 일족에게 인정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태호는 새삼 ‘선택’ 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 회귀한 지금, 태호의 선택은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큰 줄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과거와는 달라졌다. 신들을 이용하기 시작하며, 같은 선택을 해도 훨씬 더 폭넓은 이득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유저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선택들이, 태호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기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모여, 이렇게 되었나.’

지금 있어 이 상황은 최적의 상황이다.

배운다.

두근두근!

태호의 가슴이 뛰었다. 과거의 그 어떤 유저도 접해 본 적 없는, 신력에 준하는 힘. 비전력!

그것을 익힌다는 것은 에픽 아이템 한두 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력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우겠습니다.”

태호가 말했다.

소테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우선, 비전력은 재능값에 크게 좌우된다. 백날 익혀 봐야 재능이 없으면 답도 없지. 평생 느끼지도 못하고 시간만 날리게 될 거다. 그 시간에 강화할 장비나 더 캐는 게 이득일 거야.”

재능값이라.

리얼 포스라는 가상현실게임을 즐기며,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태호도 처음이었다.

그간은 대부분의 것들이 일체감, 레벨, 경험, 장비로 해결됐기 때문이다.

‘그것들과는 다른 개념인가?’

알쏭달쏭한 가운데, 소테드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

태호가 고개를 까닥였다. 몇 걸음 다가가자, 소테드는 자신의 손에 시커먼 비전력을 만들어 냈다.

“자, 지금부터 시작한다.”

훅!

그의 비전력이 태호의 명치로 향했다. 뭔가가 쑥- 들어왔다는 느낌과 함께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후웅- 후웅-

마력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간 리얼 포스에서 느꼈던 그 어떤 감각과도 달랐다. 마력보다 훨씬 농밀하고, 또 알 수 없는 정순함이 느껴졌다.

샤라락-

허나.

그 느낌은 곧 사라졌다. 태호가 소테드를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게 비전력의 느낌이다.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서는 우선 이 비전력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아야겠지?”

“예.”

태호의 말에, 소테드가 가볍게 덧붙였다.

“마력을 응축시키면 된다.”

“예?”

“마력을 응축시키면 된다고. 그게 첫걸음이다. 비전력은 마력의 상위개념이나 다름없지. 우선은 마력을 하나로 합쳐, 음... 그래. 압축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보면 헛웃음을 흘릴 이야기였다.

리얼 포스의 대부분의 개념은 ‘스킬’ 등으로 해결되는 것. 그냥 스킬북을 받아, 그걸 펼치면 스킬은 언제든지 익혀진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게 있어.’

태호가 눈을 빛냈다. 가끔은, 스토리의 중심이 되거나 어떤 배움의 핵심에 서 있는 NPC들에게 이른바 ‘깨우침’을 얻어야만 익힐 수 있는 스킬들이 존재했다.

과거 검술만 해도 ‘동방십이류’ 나, ‘이도류무심살법’ 이라는 동방대륙의 검술들이 그랬다.

이는 일종의 묘리를 스스로 깨달아야 스킬로 등록이 되는 것인데,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에픽 스킬이었다.

‘그런 식이라면 해 볼 만하지.’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죠.”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여기 대충 앉아서 연습이나 해 보도록. 마력을 압축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어차피 해 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소테드가 그렇게 대답하며 팟! 하고 사라졌다.

어느새 블랙 드래곤 장로의 레어에는 태호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

이건 마치 무협 소설에서 내공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던가?

태호는 피식 웃으며 편해 보이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쌔애애앵-!

드래곤 레어의 꼭대기. 소테드는 높은 첨탑 위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고니악!

위대했던 드래곤의 땅. 그 사방을 뒤덮는 결계는 엄청나게 강화돼, 우악스러운 토네이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소테드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드물게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친히 나타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방은 어느새 모든 것이 적막에 뒤덮여 있었다. 이는, 고위 신력이 만들어 낸 절대 영역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지막 블랙 드래곤에게 부탁하기 위해서라면 이쯤 신력은 써 줘야겠지.”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소테드가 물었다.

“저 인간이 정말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있다.”

“......그렇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실론이었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를 보았다.

“못 본 새, 많이 늙었구나, 소테드. 내가 너를 처음 본 건, 대격변의 전장이었는데 말이야.”

“당신은 그대로시군요.”

소테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명은... 이미 뒤틀린 것 같습니다만. 저 인간은 지금 지나칠 정도로 강합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운과 기연, 그리고 신들의 축복을 받은 듯합니다. 어찌 저게 가능합니까?”

카실론은 대답 없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미소에서 뭔가를 느낀 듯, 소테드는 흠칫 놀랐다.

“저 녀석이 운명을 뒤튼 겁니까?”

“어쩌면.”

“......”

소테드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어쩌면 당신은, 미래를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간혹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떤 이질감이라고 할까요. 어느 순간, 이 삶을 한번 겪어 본 듯하다는 착각이 듭니다. 그 착각은 계속해서 선명해지고, 또 어느 순간에는 이미 본 장면을 다시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

“착각일 뿐입니까?”

카실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실론은 그의 이 말을, 아마 수십 번은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를 해 왔다.

“착각일 거다.”

때로는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절망이라는 것이 있다. 절망은, 목도한 자들의 몫으로 놔두어도 된다. 굳이 진실을 알 필요는 없다.

그는 강인하고, 한때는 신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보유했던 위대한 일족의 후예였다. 허나 그런 그조차 견뎌 내기 힘들 정도의 진실이다.

“그 녀석을 도와줘. 분명히 크게 도움이 될 거다. 내 용건은 이게 끝이야.”

“......”

소테드는 묵묵히 카실론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에서 눈치채기 전에 얼른 가 보련다. 나중에, 어쩌면 다시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

소테드가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들었다. 정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쌔애애앵-!

다시 현실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토네이도가 부는 소리였다.

* * *

태호는 마력을 뿜어냈다.

시커먼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것은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유튜브를 통해 퍼포먼스를 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걸 뭉쳐 볼 시간이다. 태호가 양손을 모아 마력을 한 곳으로 뭉쳤다. 마력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허공에서 일렁였다.

‘뭉치는 건 쉬운데.’

이를 압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태호는 마력을 훨씬 더 많이 뿜어내, 더 큰 어둠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이건 말 그대로 퍼포먼스. 아무런 위력이 없다.’

이것에 직격한다 한들, 단 1의 대미지라도 들어갈 리가 없다. 그저 마력을 뿜어내 형상화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집중한 채, 마력을 압축하는 것에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칠흑같이 일렁이는 어둠의 비전력. 그것을 사용하던 소테드의 모습.

‘점점 더 고밀도로 뭉쳐 보는 거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태호는 거대한 구체의 마력을 조금씩, 조금씩 압축해 나갔다. 마력의 양은 그대로이지만 구체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무스름했던 구체의 마력이 점점 더 선명한 검은 색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더.’

고오오오-

문득, 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긴 내 현실이나 다름없다.’

일체감이 100%의 상태이나, 태호에게 있어서 리얼 포스의 세계는 아직 ‘가상현실’ 의 개념에 머물러 있다. 이곳에서의 통증이 실제 통증으로 이어지지 않고,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한 발자국 더, 이 세상 속에 녹아들기로 했다.

-끄아아악!

문득, 과거 혼돈의 힘에 지배되었던 씨드가 떠올랐다. 현실처럼 고통을 느끼는 양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모습.

태호는 감각을 활짝 열었다. 일체감 100%라는 것, 그 이상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활짝 열린 감각 사이로, 또 다른 감각들이 일순간 찾아온다. 놀라울 정도로 입체적인 촉감, 향기, 그리고 호흡의 감각이 태호의 전신을 맴돌았다.

그대로 양손을 뻗어 정면의 구체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오.’

마력에 양손이 닿자, 기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마치 폭신한, 하지만 질량이 거의 없는 솜사탕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착각?

하지만, 착각이든 아니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태호는 천천히 그 마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지이이잉-

마력의 구체는 점점 더 작게 변해갔다. 태호는 온 신경을 집중해 마치 무아지경처럼 빠져들었다.

구체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한참의 시간 동안 작은 크기에 머물러, 그저 일렁이고 있을 뿐.

그러던 어느 순간.

고오오오-

마력의 형질이 일순 변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태호가 번쩍 눈을 떴다.

고오오-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시커먼 마력은 기존의 색감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마치, 순도 100%의 시커먼 어둠이 응집돼 있는 느낌과 같았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에너지를 만져 보았다. 질감이 확실히 달라졌다. 지금의 이 마력 덩어리는, 확연하게 와 닿는 촉감이 있었다.

‘촉촉한데.’

착각이라지만, 기분 좋은 지점토를 만지는 것 같은 촉감.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고, 말랑거린다.

태호는 그것을 오른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다, 조금 아까 소테드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명치 부근에 쑤욱- 집어넣어 보았다.

후욱!

그 순간.

태호의 전신에 끓어오르는 마력이 느껴졌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력과는 전혀 다르다. 뜨겁고, 생생했다.

화아아악!

어느 순간.

태호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온몸에 가득 찼던 생생함은 사라지고, 일체감 100%의 단순한 그 상태로 돌아와 버렸다.

‘이 감각은 대체 뭐지?’

당황한 나머지 두 눈을 깜빡이던 태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맙소사.”

분명히 조금 전에는 환한 대낮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떠 있었다.

< 착각일 뿐입니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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