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력을 배우다 (1) >
블러드 아일랜드.
과거에는 이름 없는 섬이었다.
태호는 그 섬을 몇 번 지나쳐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인도였고, 등장하는 몬스터 수준은 대략 100~200. 눈여겨볼 것이 딱히 없으며, 에픽 등의 히든 피스도 없었다.
무수히 많은 섬들 중, 그런 섬이 한두 개쯤 있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다.
허나 지금, 그 섬은 특별해졌다.
대도시 라이언의 항구가 북적거리며 매 시각 떠나는 범선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서쪽으로 가자!”
모두가 희망에 차 그렇게 소리쳤다.
항간에서는 ‘혼돈의 힘이라면 위험한 거 아닐까?’라는 의견이 일었다.
허나, 그런 소수의 의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픽 다섯 개!
보통 사람은 하나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에픽이 무려 다섯 개! 그 숫자, 그리고 매력적인 아이템의 옵션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리얼 포스의 아이템은 비단 가상현실만의 부와 명예가 아니었다.
사기적인 에픽 아이템으로 리얼 포스 내에서의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 영향력은 자연히 현실로 이어져,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인생 역전!
그 매력적인 단어!
대형 길드들도 크게 예외는 아니었는지, 악명 높은 ‘로만 제국’의 이벤트에 참전 의사를 밝혔다. 에픽이라는 아이템의 위력은 그 정도였다.
“......”
태호는 남부 초보자 마을에 들어서서, 인적이 드문 평야로 향해 드러누운 채 그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카이저.
그 무렵, 쉬폰에게도 귓속말이 도착했다.
-봤나?
-봤다.
태호는 짧게 대답했다.
-갈 거냐?
그의 물음에, 태호는 역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간다.
-흠... 나는 어쩐지 꺼려지는군.
드문 일이었다. 쉬폰, 윤형석. 그가 그런 약한 소릴 하는 건 처음이었다.
-꺼려진다고?
-혼돈의 힘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 모쪼록 건투를 빌지.
그와의 연락이 끝난 뒤, 태호는 수중에 보유하고 있던 ‘혼돈의 유산’ 들을 정리할 생각을 마쳤다.
태호는 직접 머더러들에게 이 유산들을 획득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혼돈의 힘을 보유한 놈들에게도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지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혼돈의 유산들은 각기 에픽,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다.
에픽?
스킬?
분명히 다들 일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태호가 아는 여러 신들을 이용한다면, 분명히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비전력을 접하게 되며 그보다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은 불확실하나, 도전해 볼 가치는 있는 것.
이제 그것에 대한 거래를 해 볼 시간이다.
‘나와라, 볼카노스.’
태호가 볼카노스를 소환했다
싸아아-!
어느새 시커먼 세상, 볼카노스가 걸어 나왔다.
[나를 불렀느냐.]
“그렇습니다.”
태호는 군말하지 않겠다는 듯 상황을 설명했다. 로만의 계략을 들은 볼카노스가 신음을 흘렸다.
[끄응... 일이 복잡하게 됐군.]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볼카노스님께서 부여하신 ‘어둠의 추적자’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놈들이 알아냈다면 미리 대비를 해 두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겠군.]
볼카노스가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한 힘을 축적해 두는 것이 좋겠죠.”
태호는 그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현재 제게는 드래고니악의 비전력이 있습니다.”
그렇다.
비전력의 존재!
마력보다 상위 단계의 에너지. 그리고, 혼돈의 힘과 신들을 대적할 수 있는 드래곤의 힘.
역사에 등장한 바 없는 그 힘을, 태호는 특이한 감각 세계에 들어서는 체험을 하며 익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신력이란 것도 배워 볼 만한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태호의 추론.
지이이잉-!
태호가 만들어 낸 비전력은 손바닥 위에서 일렁였다. 볼카노스 역시 모를 리 없는 드래고니악의 비전력이었다.
[비전력... 네가 그것을 배웠구나.]
태호는 그에게 물었다.
“드래곤들에게 들었습니다. 비전력은... 태곳적부터 신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죠?”
[그렇다.]
“비전력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더군요.”
[......]
볼카노스가 살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태호는 빤히 그를 보며 덧붙였다.
“그러는 한편으론 생각했습니다. 신력에 대항할 수 있는 드래곤의 비전력. 이것을 배울 수 있었다면, 신력 역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라고요.”
그간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리얼 포스는 철저한 시스템적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마 높고 스텟 잘 뽑아 놓고, 높은 레벨에 에픽을 둘둘 말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보통 유저로는 아무리 천하제일의 장비를 얻어도 절대 갈 수 없는 윗단계의 세계.
태호는 이제 그 세계의 높은 산을 등반하고 있었다.
이것은 확신이다.
‘절대 마력만으로는 혼돈의 힘을 대적할 수 없어.’
분명 태호는 언젠가 판타로스와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천계의 상위 신들과도.
‘그리고, 비전력만으로는 신들과 대적할 수 없어.’
[......]
지이잉-!
순간.
볼카노스가 사방으로 결계를 만들어 냈다. 신력이 만들어 낸 공간에는 몇 번 들어와 본 적이 있기에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군.’
지금부터 볼카노스는 외부로 새어 나가면 곤란한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신력에 도전하고자 함인가?]
볼카노스의 목소리에 힘이 서렸다. 허나, 꾸중이라기엔 기특한 듯한 목소리였다.
태호는 빙긋 웃어 보였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 목표는 판타로스라고.”
[......]
“판타로스가 부활해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대충 알겠더군요, 혼돈의 힘에 준하는 힘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로 놈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말입니다.”
태호는 그렇게 힘주어 말했다. 허나, 볼카노스는 어쩐지 영 곤란한 듯 팔짱을 꼈다.
[그런다 한들... 신력이 괜히 신력이겠느냐? 이것을 인간이 배웠다는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요구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당연하다.]
‘역시.’
보통의 유저라면 신력을 배우겠다는 이야기를 할 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겠다면, 교환의 가치가 높은 편입니까?”
[흐음......]
볼카노스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느 정도는 예상대로군.’
신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은 적중했다. 다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에픽 하나면 됩니까?”
[한참 모자라다.]
볼카노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또한, 흥정을 막으려는 듯 덧붙였다.
[네 의도와 동기는 아주 충분하고, 나는 그것에 강한 긍정과 지지를 표한다. 내게 있어서도 의미 있는 일이지. 허나, 이는 균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중대한 힘이다. 또한... 흐음.]
볼카노스는 말을 삼켰다.
‘이는 내 존속 여부와도 크게 연관된 일이겠군.’
볼카노스는 태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은... 어쩌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볼카노스는 어쩌면, 내가 이 세계의 진실에 근접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어.’
같은 시각, 태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호는 볼카노스를 빤히 보았다. 두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돌아와서.
말은 길다만, 상응하는 가치를 내놓지 않으면 아무리 너라도 못 준다는 소리다.
태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두 개는요?”
[불가.]
“그럼 세 갭니까?”
[불가하다.]
심지어 아주 단호했다.
‘아주 비싸군.’
볼카노스는 이미 태호에게 큰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것은, 그만큼 균형을 철저히 맞추어야 한다는 것일 터.
즉.
‘아주 가치가 높기에 그런 것.’
태호는 턱을 괸 채 생각하다가, 인벤토리창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개방된 혼돈의 유산이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착(캐릭터에 장착 귀속됨)]
[이름 : 파멸의 비명]
[나의 힘 앞에 복종하라.]
[옵션 : 공격력 상승 2배]
[공격속도와 이동속도 2배 증가]
[혼돈의 힘과의 계약을 필요로 합니다. ‘미계약 상태’]
그것을 본 볼카노스가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그리고,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그것도 재주라면 놀라운 재주로다.]
“이것의 가치로 불가합니까?”
장착 불가에다가, 심지어 개방된 혼돈의 유산이었다. 이는 무 대륙의 나파를 해치우며 얻은 물건이다.
[허나... 역시 모자라다.]
볼카노스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태호는 한 가지를 더 꺼냈다.
역시 개방된 혼돈의 유산이었다.
[등급 : 에픽]
[종류 : 방어구(손)]
[이름 : 공허의 포식자]
[나의 힘 앞에 복종하라.]
[옵션 : 아군을 처치하여, 소유한 모든 능력치의 20%를 일시적으로 자신의 능력치로 흡수합니다. (최대한도, 20개체)]
[혼돈의 힘과의 계약을 필요로 합니다. ‘미계약 상태’]
볼카노스는 이제 놀라기도 질렸다는 눈치였다.
“무 대륙의 사건을 해결하며 얻게 된 물건들입니다.”
[이 역시도 모자라다.]
신력의 가치가 점점 더 가늠이 왔다.
지출이 크지만, 점점 더 태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길이 틀리지 않았군.’
“그럼 하나 더 얹어 드리죠.”
태호는 다음 거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이건 마해의 속삭임입니다. 마찬가지로 혼돈의 유산이죠.”
크레이지 도그의 간부진을 족쳐 얻어 낸 마해의 속삭임이다. 개방이 필요한 물건이지만, 에픽 하나의 가치를 지녔다.
[좋다. 균형은 성립되었다.]
볼카노스로부터 긍정 신호가 왔다.
‘이 정도면...’
과거, 장착 귀속 혼돈의 유산은 에픽 두 개급 대우를 받았다. 개방되었으니 그 가치는 더 클 것인데, 장착 귀속 두 개에 그냥 혼돈의 유산 한 개와 교환을 했다.
‘최소, 에픽 다섯 개 급의 가치.’
대출혈이었지만 신력이란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역시 별 큰일 아니다.
태호가 미련 없이 세 종의 아이템을 내주었다.
신력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면, 이제 태호가 보유한 힘은 총 두 가지가 된다.
드래곤의 비전력!
신들의 신력!
[가까이 오거라.]
태호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볼카노스는 태호를 보며 살짝 눈을 감았다.
[허나, 너는 유의하여야 한다. 신력이란 본디 신들의 힘. 네가 방법을 익힌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배우겠느냐?]
그것은 경고였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살짝 고민했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비전력으로 신들과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까?”
[신들과 싸운다?]
“어쩌면 악신과 조우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주를 내리는 것을 막는다든가, 하는 등의 일 말입니다.”
볼카노스는 고개를 저었다.
[태고시절의 비전력이라면 몰라도... 이 시대의 비전력은 그 힘이 많이 쇠퇴한 상태... 현재로서는 무리일 것이다.]
‘그럼 곤란해.’
태호는 현재 ‘천계의 상위 신’ 들이 혼돈의 힘과 분명히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신들과 격돌할 날도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상위 힘이 더 필요했다.
“그렇다면, 역시 신력을 배우겠습니다.”
[......]
볼카노스는 딱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곧.
콰아아아아-!
그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몰아쳤다. 그것은 그대로 태호의 몸속에 스며들었고, 심장 부근에 이물감이 느껴질 무렵에야 멈추었다.
[패시브 스킬 : ‘신력(神力)’을 획득했습니다.]
< 신력을 배우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