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력이 왜? >
볼카노스와의 이번 만남은 여러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태호는 어느 정도 자신의 상황을 그에게 전할 수 있었고 볼카노스 역시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믿을 만한 아군이 된 걸까.’
이제 볼카노스는 확실한 아군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의미 있는 거래였다.
아마도.
-수호자의 힘을 온전히 각성하면 돌아와라.
카실론은 태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바, 수호자의 힘을 온전히 각성하게 된다면 의사를 주고받는 데 있어 제약이 사라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금제.’
신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금제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걸까?
어쩌면, 그 금제란 신들뿐 아니라 유저들에게도 존재하고 있을지도.
돌아와서.
태호는 새로이 얻은 힘, ‘신력’이란 것에 대해 잠깐 탐구해 보기로 했다.
로만은 대형 이벤트 공지를 띄워 버렸고, 그건 이미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라 버렸다. 이미 공중파 TV 뉴스에 섬으로 몰린 수백만의 인파를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을 보니, 말 다 한 셈이다.
혼돈의 유산.
놈에겐 중요한 물건일 터. 그런 에픽을 그냥 줄 리가 없다.
태호는 조금 조심해서 접근해 보기로 하고, 우선은 신력을 움직여 보았다.
쿵-
심장 부근에 만들어진 쇳덩어리 같은 기운. 그것은 요지부동으로, 그저 굳건히 그 자리에 있을 뿐.
눈을 가늘게 뜬 태호가 점점 더 그 덩어리를 자극해 보아도 딱히 별 수확은 없었다.
‘흐음.’
그렇다면.
태호는 스스로 ‘감각 세계’라 명명한 그 감각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눈을 감은 채 점점 더 리얼 포스의 세계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고도의 집중이 한참 동안 이어진 뒤,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방이 탁- 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귓속에 물이 들어가 있을 때의 소리와 물이 빠져나왔을 때의 소리가 다르듯. 한 꺼풀의 막이 벗겨진 듯한 감각이 오감을 자극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아아아-
평야의 바람, 그리고 신선한 풀 내음. 그리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현실감과 머리칼이 흩날리는 사소한 감각들.
태호는 지금 감각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 상태로 신력을 움직여 보았다.
쿵-
요지부동의 신력이었지만, 어쩐지 감은 눈앞에 그것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딱딱한 물질에 뒤덮인 에너지?’
추상적인 느낌은 그 정도였다. 요는, ‘이 표면을 제거해야 한다’ 정도의 느낌. 한참 동안이나 신력이란 힘에 대해 느끼고 고민해 보았다.
비전력은 끈적하고도 말랑말랑한 물질.
신력은 딱딱한 물질.
마력은 그냥 수증기.
묘사하자면 이 정도의 수준이다.
“......”
전혀 다른 세 가지의 힘이 몸속에 일렁이고 있는 것이 못내 신기했다. 각기 기운이 풍기는 고유의 느낌과, 대강 구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들을 정확히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태호는 조바심이 났지만, 억지로 그 마음을 진정했다. 우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
일단 착용하고 있는 ‘칠흑의 어둠 반지’를 해제하고 ‘고대 왕국의 증표’를 바꾸어 착용했다.
이 반지는 현재 태호에게 장착 귀속된 ‘메소드의 기운’과 효과가 중첩된다. 즉, ‘스킬 숙련도 효율 2배 증가’가 2번 중첩되었다는 말이다.
그대로 가진 모든 마력을 응집해, 비전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마력이 전량 소모되며 비전력이 만들어져, 체내에 저장되었다.
[비전력을 저장합니다.]
[현재 소유한 비전력은 한계치의 3%입니다.]
우선, 필요한 힘들은 손에 들어왔다. 차근차근, 비전력부터 연마해 나가다 보면 의외의 해답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소유한 비전력은 한계치의 12%입니다.]
상념을 지워 가며 비전력을 계속해서 쌓아 나갔다.
[현재 소유한 비전력은 한계치의 100%입니다.]
비전력을 모조리 충전한 뒤에야 태호는 일어섰다.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가, 저 멀리로 기울어 가는 것을 보니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한 모양이었다.
태호는 그 길로, 서부 대도시 라이언으로 향했다.
항구도시 라이언!
라이언의 중심부, 선박장에는 무수히 많은 선박들이 오고 가고를 반복한다.
원래도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오늘은 유독 더 많은 듯싶다.
대항해 시대!
과연.
인터넷 생중계에서 본 그대로, 대항해시대가 열려 버렸다. 출항을 준비하는 유저들이 빼곡히 모여 범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일확천금의 꿈이 가득 담겨 넘실거린다.
태호는 그들을 지나쳐, 흑마법사의 탑으로 들어섰다.
“카이저!”
늘 그 자리에 있던 흑마탑주, 아파치 레퓨어가 태호를 반겼다.
탑의 상황은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다.
내부에 유저들이 하도 북적거려,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지경이었다.
본래는 아파치 혼자였는데, 이제는 NPC들도 대거 늘었다. 그 높은 탑이 사람으로 꽉 차 있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어어, 거기 잠깐 기다려!”
화아악!
아파치가 손짓하자 태호는 어느새 최상층의 귀빈실로 이동해 있었다.
“어휴, 동지들이 하도 늘어서 이제는 정신이 다 없네.”
그는 투덜거리지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이것이 다 태호의 덕이었다.
흑마법사는 이미 리얼 포스의 주류가 되었다.
어느 파티에서나 적당히 다방면에서 쓸 만한 흑마법사를 채용했고, 뭐 하나 특출나진 않아도 딱히 빠지는 게 없어 대중적인 인기도 좋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언노운의 폭발적인 인지도가 한몫할 것이다.
“어디 봐, 나의 오랜 친구이자 은인이여-”
그는 태호에게 포옹을 하려는 듯 다가오다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
“음?”
아파치는 태호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질적인 기운...”
“...느껴지십니까?”
“...너. 어째서 드래곤의 기운을 품고 있지?”
아파치의 질문에 태호는 문득 그 역시 하프드래곤인 것을 깨달았다.
“음... 드래고니악에 갔었습니다.”
“뭐? 뭐어? 뭐라고오?”
아파치가 경악하듯 소리 질렀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사방을 뛰어다니다가, 다시 태호에게 달려와 양팔을 꽉 붙잡았다.
“이런! 치사하게! 치사하게 혼자 갔어? 왜 그랬어? 나한테도 좀 알려 주지!”
“어음...”
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소테드 스펠터라는 분을 아십니까?”
“아, 알다마다! 최후의 블랙 드래곤! 알고 보면 우리 조상님! 그걸 왜 몰라?”
“...드래곤의 후예가 맞긴 맞으시군요. 그분께 드래곤의... 비전력을 조금 배워 보았습니다.”
“비전력!”
소테드는 그 말을 듣자,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음... 그렇지. 그래, 맞아... 드래곤의 힘을 손에 넣었구나. 음... 어어? 뭐라고?”
이내 그는 재차 놀란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 맙소사! 대체 인간이 어떻게 드래곤의 힘을? 그건 나도 흉내만 간신히 내는 건데?”
“......어, 어쩌다 보니까요.”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재능 값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엄연한 흑탑의 탑주였고, 오랜 시간 탑을 지켜 왔다.
“소테드 님이 안부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어, 그리고... 아무래도 조만간 드래고니악의 동면이 끝날 거라 하셨어요.”
“오, 그, 그렇구만.”
그는 극도의 흥분상태였다.
“그리고 저는 좀 멀리 떠나야 할 듯싶은데, 그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뭘?”
태호는 씩 웃었다.
“더 강해질 수 있는 마법서 말이에요.”
“아-!”
태호가 요구한 것은 전직의 서였다.
이제 태호는 400레벨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한다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6차 전직인 것이다.
“음... 그렇지. 맞아.”
그가 풀 죽은 얼굴로 천천히 자신의 서재로 갔다. 그리고 마법서 한 권을 꺼내 태호에게 전해주었다.
[교환 불가 : ‘흑마도사 6차 전직의 서’를 획득했습니다.]
태호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귀띔하듯 말을 건넸다.
“그, 소테드 님이 동면에서 깨어나시면 꼭 이곳에 들르시라 일러두겠습니다.”
“진짜지?”
아파치가 눈을 반짝였다.
......바다 위에 수많은 범선들이 한 섬을 중심으로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블러드 아일랜드’의 온 사방은 유저 떼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 것이다.
허나.
그 모두가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장 제한]
[본 구역에는 Lv.250 이상의 유저만이 입장할 수 있습니다.]
“아이 씨! 뭐야 이거!”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냐? 이럴 거면 진작 얘기라도 해 주든가! 레어 던전 파티 빼먹고 온 건데!”
한눈에 봐도 수백만은 되는 유저들.
허나 정작 들어갈 수 있는 유저는 5%도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결계래? 어떻게 만든 거지?”
“낸들 알아? 또 뭐 히든 피스로 만들었겠지.”
리얼 포스에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면, 히든 피스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
-형님. 우린 거기서 빠지기로 했는데, 어차피 길드원들은 진입하기도 힘들 거고 나도 썩 구미가 안 당기네.
태호는 그런 범선 사이에서 ‘눈속임’을 사용한 채 유저들에게 동화돼 있었다.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군.
-그냥 예감이 별로 안 좋아. 로만 그놈이니까 더 예감이 안 좋기도 하고. 아마 사람도 엄청 모인 걸로 아는데 어때?
사방 어딜 둘러보아도 유저들 투성이다.
-많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일 있으면 연락 줘.
귓속말을 멈춘 뒤 저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섬!
크기는, 여지껏 가 보았던 평이한 섬들보다 대략 5배가량 더 크다.
허나 그 정도로는 진입하고 있는 유저의 수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 많은 유저들이 들어선다면 섬은 좁을 거다. 이 정도라면 상황은 얼마 걸리지도 않아 완료될 거고, 꿍꿍이가 있다면 곧 드러날 터.
태호는 계속해서 쑥쑥 진입하는 유저들을 지켜보며 인터넷방송 채널로 접속했다.
[로만 이벤트중!]
[블러드 아일랜드 탐방!]
방제목은 이런 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 시청자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다.
태호는 그들의 방송을 보며 정보를 빠르게 수집해 나갔다.
우선, 저 알 수 없는 결계로 진입해 들어가면 보이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넓은 땅에 도달하게 된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은 마치 ‘투쟁의 평야’처럼 PVP 허용지역이다. 죽여도 머더러가 되지 않는다.
이 정도가 평균적인 정보였다.
가만 지켜보니 결계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유저도 있고, 들어가서 스크롤을 찢어 귀환하는 유저들도 제법 있었다.
‘그냥 자선 이벤트? 혼돈의 유산을 뿌리면서까지?’
그건 넌센스다.
이 많은 사람들을 모은 이유가 있을 거다.
섬은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한 기운에 뒤덮여 있었다.
‘저게 나만 보이는 건가?’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붉은 기운이 대체 뭘까요?”
“무슨 기운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역시나 태호의 눈에는 보이는 게, 유저들에겐 안 보이는 듯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히 비전력이나 신력 둘 중 하나 때문인 듯했다.
‘어쩌면 둘 다 가졌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
상위 힘을 갖게 되고, 이제 태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 것이다.
잠깐만.
‘막시무스는 어떻게 혼돈의 힘을 느끼는 거지?’
예전부터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 성능을 지닌 NPC겠거니, 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어쩌면 그 비밀에, 막시무스의 숨겨진 힘을 개방하는 방법이 담겨 있을지도.
우선 태호는 범선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칠흑의 어둠 밟기’의 그림자를 이용해 빠르게 섬에 근접해 들어갔다.
‘혼돈의 힘으로 만들어진 정체불명의 결계, 그리고 무수히 많이 모인 사람들.’
이 수상쩍은 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결국 들어 가 봐야 알 듯싶었다.
우선 섬의 사방을 살펴본다. 결계는 요지부동. 태호는 우선,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한 걸음 내딛어 보았다.
후욱!
그 순간.
태호의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이 세계의 땅은 검붉은 빛, 내부는 말라비틀어진 숲과 황폐한 풍경만이 보여질 뿐.
태호가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유저들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봐! 진짜네! 들어오니까 완전 다른 세상이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빨리 에픽이나 찾아봐! 그거 하나 찾으면 인생 역전이다!”
사람들의 외침들이 들려왔지만, 태호는 그들에게서 기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그들의 몸에서 마치 가루 같은 것이 스멀스멀 떼어져 나와, 저편으로 흩날려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은 그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 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
태호는 혹시 자신도 그러나, 하고 스스로를 보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이 기운...’
결계로 뒤덮인 그 세계 내부에는 기묘한 기운의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미미하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태호는 아까, 비전력을 축적하기 전에 그런류의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신력... 이잖아?’
신력을 익히지 못했더라면 분명히 가늠조차 못 했을 테지만 지금의 태호는 이미 신력의 느낌을 기억해 둔 상태.
‘신력? 신력이 왜?’
잠깐만.
태호는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 신력이 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