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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125화 (125/194)

< 악신(惡神) >

‘악신!’

본능적으로 그 단어가 떠올랐다.

리얼 포스의 세계에 악신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이름 그대로, 인간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가히 증오하는 듯한 이들이다.

‘여기에 신력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신급 존재가 지상에 내려와 있다는 말과도 딱히 틀리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태호가 알기론 신급 존재들이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세계의 맹약에 위배가 된다.

문득.

이 섬을 뒤덮고 있는 결계에 눈이 간다.

‘이게 맹약을 무효화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여러모로 조심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망설임 없이 볼카노스를 다시 불렀다.

허나, 볼카노스는 응답이 없었다.

‘뭐지?’

우선 결계를 도로 나가 보았다. 나간 상태로 볼카노스를 불러 보았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라간.

-어 형님.

태호가 라간에게 물었다.

-지금 로키에게 물어봐 줄 수 있냐?

-지금 궁전이라 됨. 뭐 물어봐?

-지상에... 신이 내려올 수 있냐고.

-흠. 알았다. 기다려!

잠시 후.

라간에게 귓속말이 왔다.

-형님. 로키가 그러는데, 자기가 아는 한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데?

로키도 제대로 모른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결계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뭔 일이 제대로 벌어지고 있는 듯싶었다.

사방을 둘러본다.

결계 내부의 땅은 거대한 폐허. 유저들은 물밀 듯 들어오지만, 땅은 그들을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태호는 우선 혼돈의 유산 찾기를 포기했다. 그건 차순위였다. 우선순위는 바로...

‘저 기운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유저들의 머리 위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온 기운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것.

저것을 쫓아 보기로 했다.

팟!

태호는 땅을 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사방의 결계는 점점 더 진득해져 간다.

어느 순간.

[자, 여러분.]

결계 속에서 로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아요. 하하하!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요~]

“뭐야 이 개새끼야!”

“역시 저 개새끼 본성 어디 안 가는구만!”

유저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무 화내지들 말아요. 일단 제 잘못도 있고 하니, 첫 번째 퀘스트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번 솎아 내야겠어요. 어디 보자...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할라나~]

‘퀘스트?’

마치 놀이를 하는 듯한 어조.

[자, 그럼 우선 1인당 30명만 죽여 주세요. 완료하신 분들께는 소정의 상품을 드리죠~]

죽여?

리얼 포스라는 게임에서 PK란 것이 그다지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허나, 태호는 그 뉘앙스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야!”

“뭐 하러 PK를 해!”

유저들이 아랑곳 않고 로만을 윽박질렀다.

[아직도 귀가 근질거리는 걸 보니, 마음에들 안 드시나 봐요? 그럼 이건 어때요? 지금 이 섬 안에서는, 유저를 죽이면 그 사람의 경험치를 엄~청 많이 먹을 수 있단 말이죠?]

로만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레벨 업 찬스인데, 게다가 여긴 머더러도 안 되는데~ 고고한 척하실 분들은 가만히 서서 경험치나 헌납하고 나가 주시면 되죠~ 하하하하!]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6급 퀘스트]

[서브 퀘스트]

[: 피로 피를 씻어 내기]

[유저 30명 학살]

[보상 : 유니크 등급 장비 랜덤 1종]

“퀘스트다!”

“유, 유니크를 준다고?”

사람들이 망설였다.

허나 그중, 머더러 출신 유저들은 PK에 거침이 없다. 누군가가 한 명을 죽였다.

푹!

그 순간, 압도적인 경험치가 밀려 들어왔다. 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그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지, 진짜다!”

“경험치 엄청 주나 보다!”

아무리 가상현실이어도 PK는 사람의 형태를 한 아바타를 죽이는 행위. 초심자가 하기에 쉬운 일은 아닐 터.

허나, 이곳은 리얼 포스.

가상현실!

각종 범죄도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룰 안에 허용되는 곳!

방아쇠가 당겨지자, ‘다들 하는데 하지 않으면 바보’ 가 돼 버린다.

푹! 푹!

“아악!”

“죽여! 빨리 죽여! 경험치 대박이다!”

“죽여라!”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젠장.’

태호는 그 한복판에 서서 귀신에 홀린 듯 서로를 죽여대는 유저들을 보았다.

죽은 유저의 머리 위로 쑤욱! 큼직한 기운이 새어 나와 저편으로 흘러갔다.

챙챙챙!

쾅! 콰콰쾅! 쾅!

병장비가 맞부딪히고, 마법이 쏟아진다. 사방의 유저들이 죽고, 죽이며 거대한 에너지들이 계속해서 새어 나온다.

탓!

태호는 그 에너지를 따라 움직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태호는 유저들에게 쏟아져 나오는 에너지가 한곳으로 모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편.

거대한 산봉우리 꼭대기로!

* * *

파파파파파팟!

가히 극속으로 달리던 태호가 유령표범을 꺼내 들었다. 유령표범에 올라탄 태호가 더욱 가속을 붙여 달렸다.

‘자연화.’

은신을 사용한 뒤.

‘귀신 질주.’

유령표범의 질주 스킬까지 사용했다.

[아아, 여러분 정말 잘 싸우시네요. 키하하하하! 으하하하! 자, 여기까지!]

로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결계 내부를 뒤덮었다.

[근데... 보상이 별론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질 않으셔서 서운하네요. 아직까지 몸을 사리는 분들도 꽤 많은 것 같네요? 그럼, 다음 퀘스트 갑니다. 어디, 이번 건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곧, 퀘스트가 떠올랐다.

[7급 퀘스트]

[서브 퀘스트]

[피로 피를 씻어 내기 2]

[: 유저 50명 학살]

[보상 : 레전더리 등급 장비 랜덤 1종]

‘미친 새끼!’

[자, 이번엔 레전더리 갑니다? 킥, 키키키킥! 서로 죽이세요! 어서요! 여러분, 레전더리입니다? 이번엔 레전더리예요!]

유저들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레전더리가 가져올 재화!

그 가치가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다.

-다 조져! 에픽이고 나발이고 레전더리부터 먹자!

-대박이다!

어느새.

태호는 거대한 봉우리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봉우리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고요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듯했다. 태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내의 모습은 기묘하다.

머리는 완벽한 대머리였고, 전신은 지방 하나 없는 순수 근육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상반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바지는 폭넓은 긴바지였다.

양팔은 터질 듯 거대하며, 목에 거대한 염주를 메고 있었다. 눈을 감은 얼굴은 그야말로 보살(菩薩)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으로 선해 보인다.

허나.

유저들에게 빠져나온 에너지는 그의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솥단지 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솥단지의 사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로 만들어진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위험해.’

위험신호가 태호의 전신을 쭈뼛쭈뼛 자극해 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바로.

‘신력...!’

악신!

머리를 굴린다.

저런 생김새의 악신(惡神)을 떠올린다. 과거 분명히...

‘조겐!’

선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악신, 조겐이 분명했다. 태호는 문득 눈앞이 막막해짐을 느꼈다.

‘왜, 아니 어떻게 신이 리얼 포스의 대지에?’

저건 화신체라고 볼 수도 없었다. 풍기는 위압감 자체가 아예 달랐다.

‘실체화돼 나타났어.’

감을 잡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거, 이 새끼들 혼돈의 힘이랑 결탁했구나.’

악신.

이렇게 되니 실마리가 하나둘 풀린다. 악신은 상위 신들의 수하들이나 다름없다.

상위 신들이 혼돈의 힘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했고, 궁지에 몰린 ‘로만’ 이 결국 천계에 손을 뻗은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세계의 맹약이 만들어 낸 금제는 매우 강력할 거야.’

강력하지 않다면, 그간 신들이 그토록 맹약을 어기는 것에 거부감을 표했을 리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강력한 균형의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결계 안에서만 한정적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 일리 있다.

싸워야 할까?

태호는 저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높은 산에서는 저 아래가 훤히 보인다.

마치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지옥도.

‘막아야 한다.’

태호가 막 지팡이를 뽑아 들 때, 조겐 역시 두 눈을 떴다.

[음?]

그의 두 눈에선 성스럽기 그지없는 신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애로운 표정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인고? 어찌하여 저 아래에서 싸우지 않고.]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 한없이 포근하고 나른해, 긴장이 풀려 버릴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

태호의 물음에 조겐이 빙긋 웃었다.

[나는 그저, 관찰할 뿐.]

그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밀려왔다.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신력과 비전력을 배우기 전에는 절대 보지 못했을 신력의 아우라!

[너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이... 드래고니악의 비전력이었던가?]

비전력!

비전력을 읽혔다. 허나, 그의 말은 그뿐이었다.

‘신력은 못 읽어?’

게다가.

태호는 으레 신들이 자신을 보면 한마디씩 하던 말을 떠올렸다.

-신들의 가호를 이리도 많이 받다니...

-세상에... 이리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 이가 있었다니?

헌데.

조겐은 그런 것에 대해선 의아함조차 품지 않는다. 분명히, 태호 같은 별종은 무수히 반복된 리얼 포스의 역사에서도 흔치 않을 텐데 말이다.

잠깐 의문이 들었으나 곧 뒤편으로 미루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힘이군. 모험가의 주제에는 맞지 않아 보이는걸. 허허허!]

“이곳의 목적이 뭡니까?”

태호가 짜내듯 외쳤다. 어쩐지, 그의 위압감은 썩 버틸 만했다.

‘전력이 아닌가?’

물론 그럴 것이다. 허나, 태호는 그 와중 한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힘이 온전치 않은 거야.’

세계의 맹약은 그 강대한 볼카노스도 쉬이 어길 수 없는 거대한 약속.

이 공간에서 그 약속이 깨어졌다. 그렇다면, 저놈이 온전하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네가 알 것은 없단다. 내려가지 않을 거라면, 혼쭐을 내주어야겠구나.]

조겐이 씩 웃었다.

그의 천사같이 자애롭던 얼굴에 힘줄이 가득 들어찼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악마의 그것처럼 험악하게 변했다.

[방해하면 곤란하거든.]

팟!

놈이 움직였다.

태호에겐 익숙한 체술계였다. 움직임과 동시에 사방으로 신력이 뿜어져 나갔다. 움직임의 체감은, 무 대륙의 최강자였던 카자토스보다 훨씬 더 엄청났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 정도면...

‘4/10 신노스급.’

과거에는 아예 엄두조차 못 냈을 거다. 눈 한 번 깜빡이면 터졌을 터.

허나, 과거의 태호보다 지금의 태호는 곱절로 강하다.

쾅!

놈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저 휘두른다는 단순한 행위였다만, 그 행위가 가져온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팟!

태호는 어둠의 발걸음을 이용해 놈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주먹은 허공을 갈랐으나, 저 뒤편.

콰콰콰콰쾅!

분명히 존재했던 지형이 완전히 뭉개졌다.

‘한 방이면 끝장이다.’

꿀꺽!

태호가 침을 삼켰다.

팟!

어느 순간. 놈이 순간이동하듯 태호의 앞으로 달려 들어왔다. 태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스킬을 사용했다.

‘냉혹한 정의.’

현재 태호가 가진 모든 상태이상 기술을 한 번에 걸 수 있는 냉혹한 정의다.

마력을 쓰는 수준으로는 신력에 비빌 수가 없다. 비전력을 크게 끌어다 쓰며 쏘아 낸 마법이 놈의 몸에 작렬했다. 동시에.

‘어둠 가시 장벽.’

태호의 생존기가 발동됐다.

촤촤촤촥!

절대 생존기라 여겼지만, 나파에게 부서진 적 있는 어둠 가시 장벽이 태호의 사방에 만들어져 돔 형태로 감싸 안았다.

콰콰쾅!

[으하하하!]

조겐이 신난다는 듯 장벽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그 사이, 장벽 내에서 쿨타임 0초인 강화된 중독을 마구 난사했다.

[스킬 쿨타임이 모두 초기화되었습니다.]

찰나의 시간 쿨타임이 초기화되고.

[9스택 달성]

칠흑 세트의 세트 옵션이 발동되어, 마법 9스택 달성 메시지도 보았다.

콰지지직!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가시 장벽은 허망하게 산산조각 났다.

‘볼카노스의 권능을 쓸까?’

아니다.

놈을 처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오히려 독이다. 신의 권능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줄 필요가 없다.

태호는 장벽이 깨어지자마자, 어둠의 발걸음을 사용했다.

팟!

[10스택 달성]

그리고, 생명력의 90%를 사용하는 ‘강화된 어둠의 명령’을 갈겼다.

10스택 이후의 마법은 5연사다.

비전력이 쭈욱 빨려 나갔다.

파파파파팍!

[큽!]

놈이 전신에 강화된 어둠의 명령을 얻어맞았다.

‘타격이 있다.’

역시 비전력은 신에게도 통한다. 통하긴 하나, 능가할 수 없을 뿐이다. 생명력이 곧바로 꽉 차올랐다.

눈 한번 깜빡할 사이, 놈이 태호에게 도달해 있었다.

‘폭사.’

콰콰콰쾅!

‘어둠 가시 장벽.’

초기화된 쿨타임으로 인해 다시 사용된 어둠 가시 장벽이 태호의 사방을 틀어막으려던 찰나.

우지직!

태호는 자신의 복부에 작렬해 버린 놈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소지한 모든 장비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완전상쇄되었습니다.]

생명력 비례 600%의 보호막이 완전상쇄됐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리고 본체의 생명력이 99%까지 떨어졌다.

남은 생명력은 단 2!

등골이 오싹한 한 방이다.

[데스나이트의 심장이 발동 중입니다.]

‘고맙다 막시무스!’

데스나이트의 심장 효과로 생명력은 곧 꽉 차올랐다.

[대미지를 반사합니다.]

< 악신(惡神)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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