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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127화 (127/194)

< 축하합니다! >

악신 조겐과의 사투는 태호에게 짙은 피로감을 선사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간은 아무리 게임을 열심히 해도, 이토록 지친다는 감각은 느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조겐이 사라지고, 금세 결계 역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한 유저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아...”

허나 태호는 방심할 수 없었다. 마음은 쿵쾅거리며 불길하게 뛴다.

로만.

아니, 로만을 먹어 치운 판타로스의 사념체!

놈이 기습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태호는 그대로 사방을 경계했다.

전투의 흔적은 참담했다.

사방은 본래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조겐의 강력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우선은.’

태호는 망설임 없이 귀환 스크롤을 찢었다.

찌지직-!

다시 나타난 곳은 이름 모를 남부의 초보자 마을이었다.

그대로 드러누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안심이 됐다.

‘수지타산 안 맞는 일을 해 버렸네.’

허나 수확은 분명히 있었다.

‘신력!’

이 신력이란 것을 조금만 더 연구해 보면, 세계의 맹약을 위반하고 지상에 내려온 신들과 맞붙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에픽 아이템은 신들을 상대할 때도 유효하다는 것.

‘왜일까?’

태호는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카실론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에픽 아이템은 어쩌면, 유저가 신이나 혼돈의 존재들을 상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카실론이 베푼 자비일 지도 모르겠다.

* * *

[가상현실게임, 리얼 포스. 전 세계 일시적으로 무수히 많은 유저들의 두통 및 호흡 장애 호소...]

뉴스가 난리가 났다.

[이례적인 집단 어지럼증... 이미 안전이 검증되었다던 VR, 과연 ‘진짜’ 안전한가.]

태호는 뉴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충 수만 명.’

모든 유저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추산 숫자가 수만 명 급.

리얼 포스의 동시접속자 수가 1억에 육박한다지만, 수만이란 숫자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결계에 진입한 건 250 이상 유저들이고, 대충 그중에서 로만 새끼 퀘스트 때문에 죽어 나간 사람이 수만 명쯤은 될 텐데.’

아무래도 태호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 결계가 생명력을 빨아 먹었군.’

생각해 보면 오싹한 일이었다. 태호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현실에 끼치는 영향.

그간은 고려해 보지 못했다. 그저, 혼돈의 유산을 가지고 개방해 혼돈에 먹힌 유저들만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물고 벽을 주먹으로 쳤다. 쾅! 소리가 났지만, 아랑곳 않고 쾅쾅! 몇 번 더 쳤다.

[집단 어지럼증의 사유 확인 불가능... 하지만 동시간의 리얼 포스 접속자인 공통점 확보...]

[각지 단체, 리얼 포스의 제작사 ‘팀 아스라이’에게 해명 요구.]

‘일시적으로 강력한 그래픽 효과를 본 것에 대한 어지럼증’ 정도가 증세의 원인으로 유추되는 모양이었다.

허나, 태호는 혼돈의 결계가 유저들의 생명력을 빨아 먹었다는 확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팀 아스라이가 나서는 건가?’

태호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팀 아스라이는 여지껏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일단, 돌아와서.

‘그렇다면... 내가 싸움에서 죽게 되면?’

이 가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간은 그나마 ‘죽음’이란 것에는 초월적이었던 것이 사실.

일단은 데스나이트의 심장이 반불사(半不死)의 목숨을 주었다만, 그것도 조겐처럼 한 방에 골로 가는 상황이라면 완전히 안전하다 할 수 없다.

허나 어차피 죽어도, 캐릭터의 죽음. 캐릭터의 죽음이 현실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계산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호는 마음을 잡았다.

‘일단, 이어지는 에픽 파밍은 목숨 줄을 최대한 늘릴 수 있는 녀석들로.’

......신.

신이 드디어 리얼 포스 대륙의 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상위 신’의 명령을 받은 ‘악신’이 혼돈의 힘과 결탁을 시작했다고 가정해야 할 듯하다.

이로써 적이 늘었다.

아니.

늘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일일까?

태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제한적이긴 하나 ‘세계의 맹약’이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렇지.’

적이 늘었지만,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신들의 폭도 넓어진 셈이라 보는 게 합당하다.

태호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려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지금 당장 급선무는, 이 기묘한 신력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악신 조겐과의 사투로 신력의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고체 같던 신력은 비전력과 결합했을 때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명확한 원리, 그리고 운용을 체득해야 했다.

고오오-

드높은 나무 위.

태호는 비전력을 모으고 또 모으기 시작했다.

[비전력을 저장합니다.]

[현재 소유한 비전력은 한계치의 100%입니다.]

한도치까지 모은 비전력을 기반으로, 천천히 신력을 뒤덮어 본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심장이 요동친다. 허나, 크게 효과는 없었다.

‘역시.’

신력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감각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

오감을 연다.

천천히 감각 세계로 걸어 들어간 태호의 피부에 와닿는 체감이 확연히 달라졌다. 바람의 향, 그 속에 숨은 풀 내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봄의 향기!

따스한 태양! 살랑이는 바람!

그 모든 것이, 태호가 ‘감각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 세계는 대체 뭘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리도 쉽게, 이런 세계에 접어들 수 있는 거지?’

일체감이 100%이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전무후무한 그 경지에 도달한 뒤에야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우선 태호는 비전력으로 신력을 다시금 감쌌다.

둥- 둥- 둥-

비로소 신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력(神力)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신력은 비전력이 동반되어야만 움직이는 듯하다. 감각 세계에 있다 하더라도 신력 혼자만 움직이면 큰 변화는 없다.

더 높은 세계.

그렇다.

이 감각 세계, 그리고 신력. 더 높은 세계에서 신들, 그리고 혼돈의 존재들과 맞서기 위해선 그것들을 태호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고오오오-!

신력이 움직이며 태호의 전신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조겐과 싸울 때는 초 단위로 생사가 오가는 혈전이었던지라 여유롭게 다룰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생겼으니, 진득이 이 녀석을 탐구해 볼 생각이다.

비전력을 이용해 신력을 뒤덮은 채, 비전력을 움직여 보았다.

고오오-

신력은 조금씩 움직이며 비전력에 융화돼 가는 느낌이었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연히.

감각 세계에 들어오면 비전력을 모으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진다.

‘전투에 응용해야 해.’

꿀꺽!

허나. 감각 세계의 고통은 현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얻어맞으면 즉사인 놈들이 앞으로 수두룩할 텐데... 버틸 수 있을까?’

쏴아아-!

태호가 허공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며 비전력과 신력이 결합된 힘을 소모했다.

어느새 비전력이 사라지고, 고체 형태의 신력만이 남았다.

다시 비전력을 모은다.

싸아아아-!

밀물과 썰물이 이어지듯, 비전력의 충전과 방출이 이어졌다. 무아지경처럼 그런 반복 행동을 하면서도, 태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버틸 수 있다.’

태호에게는 아직 지난 과거가 생생했다.

판타로스와 그 수하들이 현실로 튀어나오고, 1년간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혈전을 펼쳐야 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적을 베었다.

당연히 치명상도 자주 입었고,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 나간 적도 많다.

고통은 실시간으로 찾아온다. 익숙지 않은 격통도 무뎌지는 당시의 1년이었다.

사제 직업군들이 없었다면 태호가 회귀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죽을 것 같아도 버텨야지.’

힘이 된다면 버텨야 한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 강해질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쓴다.

쏴아아아-!

비전력이 방출되고.

싸아아!

다시 모여 신력을 뒤덮는다. 그 과정이 얼마나 반복됐을까?

문득.

콰아앙!

두개골 속에 폭발음이 들렸다. 정확히는 착각이었지만, 뭔가가 개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

비전력이 마구 충전돼 가고 있었다.

[보유 중인 스킬 ‘어둠의 비전력Ⅰ’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패시브 : 어둠의 비전력Ⅱ]

[설명 : 태고의 힘, 어둠의 비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사용할 수 있습니다.]

[1단계 : 마력을 치환하여 어둠의 비전력을 수집합니다.]

[2단계 : 어둠의 비전력 저장량이 3배로 늘어나고, 저장 효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어둠의 비전력을 연마할 때마다 스킬의 경험치가 상승하며, 일정량을 충족하면 스킬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스킬이 업그레이드될수록 순도 높은 비전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패시브 스킬, 어둠의 비전력이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태호는 그것이 제시하는 가이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순도 높은 비전력.

그것이 관건인 듯했다.

* * *

태호는 며칠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오롯이 비전력 연마에 투자했다.

시간이 날 때 연마해 두는 게 편하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아직도 요지부동인 신력을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일단 비전력의 등급을 높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흘 뒤.

[보유 중인 스킬 ‘어둠의 비전력Ⅱ’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보유 중인 스킬 ‘어둠의 비전력Ⅲ’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태호의 비전력은 어느새 4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어느덧 감각 세계에 접어드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고, 또 비전력 다루는 것도 많이 쉬워졌다.

그리고.

4단계에 접어들자, 비전력의 농도가 아주 진득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도 높은 비전력!’

아무래도 4단계부터의 비전력은 순도 높은 비전력인 모양이다.

모으는 양과 모이는 속도는 전에 없이 빨라져,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비전력을 채울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다.’

빠른 이유는 바로, 반지와 메소드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스킬 숙련도 2배 증가 2중첩’ 의 힘이었다.

‘아직도 마력에서 바로 치환은 안 되네.’

조금 더 단계를 올려야 할까?

갈증이 인다.

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새로이 모인 정순한 비전력으로 신력을 감싸 보았다.

구구구궁-

웅장한 떨림과 함께, 신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

여태까지는 본 적 없는 반응이다.

‘효과가 있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치며 태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력은 전에 없이 울리며,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태호는 망설이지 않고 비전력을 계속해서 운용했다. 신력을 뒤덮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법을 쓰기도 하고, 가득 모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빠직!

뭔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일종의 착각일 테지만, 분명히 들었다.

우지직!

그 순간.

화아악!

온 사방의 감각이 더욱 활짝 열렸다는 느낌과 함께, 아주 뜨거운 기운이 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컥!”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악!”

몸속의 피 대신, 용암이 움직인다면 이런 기분일까?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온 사방을 뒹굴었다.

“아아아악!”

그렇다.

‘시팔, 신력!’

신력의 표면을 덮고 있던 딱딱한 껍질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새어 나온 신력이 태호에게 어마어마한 격통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이 고통은 진짜다.’

혈관 하나하나가 찢어지는 격통 속에서도, 태호는 간신히 정신 줄을 부여잡았다.

리얼 포스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느끼는 실시간의 고통!

‘이거 못 이겨내면 죽는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

답은 하나였다.

태호는 이를 악물고 비전력을 끌어모아, 몸 구석구석으로 퍼트렸다. 온몸에 퍼진 신력을 비전력이 감싸 안는 모양새였다.

‘끄으응-’

코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태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질질 새고, 이가 으드드 떨렸다.

신이 사용하는 힘에 손을 댄 대가!

허나, 그 와중에도 고도의 집중력으로 비전력이 운용됐다.

어느 순간.

고오오오-

신력은 비전력과 섞였다. 타오르는 격통도 점점 멎어가고, 용암 같던 기운도 어느새 천천히 포근함으로 바뀌었다.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 통증이 멈추었다.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쉬던 태호가 눈을 떴다.

“헉, 허억... 시, 시부럴...”

어느새 두 기운은 완전히 섞였다. 예전처럼 쉽게 분리되지도 않았다. 그저 완전히 섞여 버린 또 다른 힘이 돼 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뭐야?”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 축하합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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