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환의 고리 >
빛으로 만들어진 거인은 고고히 나타나, 판타로스를 바라보았다.
-전 언 이 다, 판 타 로 스.
태호는 메타트론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 제 얼 마 남 지 않 았 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태호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판타로스가 요사스러운 눈으로 메타트론에게 읊조렸다.
-곧... 이 거대한... 맹약이... 깨어질... 것이다...
맹약이 깨진다!
놈의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끔찍했다.
-순환의... 고리에... 대적하기... 위한... 일시적... 동맹... 허나... 영원치 않으리... 모든 일이... 끝나면... 너희 천상의... 권좌는... 모조리... 혼돈으로... 뒤덮히리라...
-건 방 지 구 나.
쿠구구구궁-
구구궁- 구궁-!
메타트론과 판타로스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사방의 모든 것들이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건물이고 무너진 잔해들이고 그 둘의 힘에 빨려 들어가, 한 줌 가루처럼 변했다.
세상은 황금빛 광채와 회색으로, 반반 나누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두 개의 빛이 대립했다.
고오오오-
어마어마한 파동!
이내, 메타트론이 입을 열었다.
-허 나, 순 환 의 고 리 를 부 수 기 전 까 지 심 판 은 미 루 어 야 할 것 이 다. 우 리 의 결 전 은 그 이 후 이 다.
그는 곧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순환의 고리...?’
태호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일시적 동맹.
순환의 고리.
곧 깨어질 세계의 맹약.
이것들이 키워드였다.
그리고, 그들이 협력 관계이며 또한 세계의 맹약을 부수는 이유가 ‘순환의 고리’ 때문이란 것까지 인지했다.
순환의 고리.
카실론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메타트론이 사라지고, 부서진 세계에는 판타로스와 그들의 군단만이 남았다.
-수호자 일족... 귀찮은... 금제를... 걸어 버렸군...
곧.
혼돈의 군단은 회색 기운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소용돌이치듯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쩌억, 하늘 한가운데가 갈라지며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그곳의 세상은 회색 기운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혼돈의 권좌!
그들은 권좌로 돌아가 버렸다.
화아악-!
사방은 어느새 마구 뒤섞이며 바뀌어 간다. 그리고. 시야가 탁 트일 무렵, 태호는 백색의 시계탑 앞에 서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탑은 천천히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추었다. 시계태엽 소리가 멈추고 곧 적막이 찾아왔다.
태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이 멈추어 있었다.
부우웅-
저편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자전거들이 보이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나 잡담을 나누며 걷는 이들이 보였다.
* * *
리얼 포스의 세계로 돌아온 태호는 우선 발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먼저, ‘듄의 두 번째 목숨’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시계탑에서 본 ‘또 다른 차원의 리얼 포스’에서 등장했던 적의 목록들.
‘하늘성.’
우선은 하늘성.
‘뱀파이어의 섬.’
태호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것 같았던 섬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거인의 땅.’
그리고 스쳐 지나갔던, 거인들의 땅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적들은 세 종류다.
로만이 혼돈의 좌 움직이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면, 분명 저들 중 하나를 움직이려 할 것이다.
대도시 라이언을 통해 서쪽 항구에서 항해를 시작한 태호는 혹시나 싶어, 배에 신비력을 불어 넣어 보았다.
콰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유령선은 마력을 불어 넣을 때 보다 족히 서너 배 이상의 어마어마한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속도가 굉장한지 사방의 풍경이 길게 늘어지게 보일 지경이었다.
‘빠르다.’
체감상, 마력을 사용할 때 보다 효율이 네 배는 좋아진 것 같았다.
배수!
몇 배수라는 단어를 이리도 쉽게 사용할 날이 오다니, 사실 그것조차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서 한편으론 더 어이가 없다.
‘신, 그리고 혼돈의 존재들.’
놈들에게 있어 인간들의 수준은 한없이 하잘것없다. 거의 벌레나 다름없는 수준의 힘이었다.
과거, 태호는 리얼 포스의 일인자였다. 그 당시의 태호는 아마 악신 조겐과 일 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세계의 맹약.’
이번에 시계탑의 기억을 보며, 태호는 세계의 맹약이라는 것에 대한 복합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선.
그 맹약이란 것은 어쩌면, 단계가 나누어져 있을지 모른다.
‘리얼 포스를 만든 것은 세계의 맹약이 확실한데.’
그건 국소적인 일일뿐.
어쩌면 세계의 맹약이란 더욱더 거대한 하나의 약속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콰아아아아-!
고민하는 그 와중에도 유령선은 쾌속 전진이다.
그렇게 쭈욱 나아가던 태호는 속도를 대폭 줄인 뒤, 바다 안쪽을 살펴보았다.
바닷속에 어른어른 해파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저 먼바다부터 꿈틀거리는 것은 해파리 군집들이었다.
[Lv. 21]
[영롱 해파리]
해파리들이 한가롭게 부유하는 모습을 보던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늦봄쯤 되니 해파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영롱 해파리들은 여름쯤 돼야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다.
태호가 구하려는 듄의 두 번째 목숨은, 이 해파리들의 우두머리에게서 얻어야 했다.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진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상점에서 구매해 두었던 낚싯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다음, 가진 소환수들을 모조리 다 소환했다.
[나의 주군 카이저! 대체 저번의 그놈은 무엇이란 말인가?]
막시무스가 등장하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태호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
[신발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 신. 저 위에 하늘에서 오는 애들.”
[......]
막시무스는 경악한 듯했다. 그는 태호를 보다, 바다를 보다, 하늘을 본 뒤 다시 태호를 보았다.
[그, 그럼... 이 막시무스는... 신들과... 대적했단 말인가?]
정확히는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굉장한걸... 나는... 강한가...]
녀석이 바보 같은 얼굴로 헤헤, 웃었다. 태호가 막시무스를 본 뒤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경외감.
신이란 것은 으레 그런 존재인 것이다.
[주군! 너, 너는 승리했는가?]
뒤늦게 궁금하다는 듯 녀석이 물어왔다. 태호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간신히 버텼다.”
[......그런가. 하긴. 주군은 내가 아는 인간 중, 이제는 과거의 주군보다 강해졌을 터. 버텼다는 말인가. 흐음... 역시 주군 또한 대단하군.]
“앞으로는.”
태호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런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 막시.”
[......]
막시무스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비장한 얼굴이 마음에 들어, 태호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낚싯대를 안겨 주었다.
[이것은...?]
“그 수련의 과정이지.”
[수련...!]
“해파리 낚시다.”
태호가 아르카네도 소환했다.
지잉-!
정령계로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아르카네를 품에 안은 아카드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자네로군. 이번에도 내 딸이 조져졌어.]
다시 봐도 딸이 조져졌는데 뿌듯해하는 얼굴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악신 조겐이었습니다. 천계에 있어야 할 신들이, 맹약을 깨고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신 적 있습니까?”
[뭐라?]
아카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턱을 괸 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계의 맹약으로, 신들은 지상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오직 대가를 충족할 경우 화신제로 일시적 강림하는 것 만이 가능하지. 헌데, 실체가 지상에 내려왔다는 뜻인가?]
“예. 아무래도 혼돈의 힘과 결탁한 듯싶던데... 아시는 게 있습니까?”
[천계의 신이... 혼돈의 힘과? 흐음...]
그는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왜 그들이?]
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정령계는 천계와 비슷한 위치입니까?”
[과거에는 그랬지. 허나 지금은, 격이 두 급은 낮다고 판단된다만... 흠. 뭐, 그런 거지.]
“아 참, 그리고 아르카네 말입니다. 성장시키기 위해선 어떤 것들이 필요한 겁니까?”
아카드는 빙긋 웃었다.
[우리 정령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경험과 깨달음이다. 그것의 크기는 역시... 고통과 비례한다고 해야 할까.]
즉. 많이 조져져라 이거다.
“휴우... 알겠습니다. 혹시나 신의 부분에 대해 아시는 게 떠오르시면 반드시 알려 주십시오.”
[알겠다.]
태호가 아르카네를 받았다. 아르카네는 태호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태호는 어쩐지 미안해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낚시.”
태호는 그런 소녀에게도 낚싯대를 안겨 주었다. 막시무스는 자신이 착용한 ‘어둠 기사단 세트’를 이용해 네 명의 기사를 불러냈다.
카르릉!
크릉!
펜삼이와 유령 표범까지 입에 낚싯대를 문 뒤에야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해의 해파리 왕을 불러내려면, 해파리를 어마어마하게 낚아 분노 게이지를 쌓아야 했다.
바다의 히든 피스 중 하나, 해파리 왕 듄을 불러내기 위한 조건은 ‘낚시’로 해파리 1,000마리 낚기였다.
그간은 굳이 그 수고할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소환수들도 제법 많고 얻어야 할 아이템의 가치가 커졌다.
“자, 낚시 시작.”
이 인근은...
사방을 둘러보니, 대충 감이 왔다. 서남쪽 바다 한복판이니, 근처의 가장 가까운 초보자 마을에서 크게 오래 걸리지 않을 위치였다.
태호는 스크롤을 찢었다.
화악!
다시 나타난 곳은 거대한 하늘정원 위였다.
“와악! 씨발 깜짝이야!”
엘린이 찻잔을 기울이다 깜짝 놀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를 그대로 뒤집어쓰자, 다시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개 시팔 뜨거워!”
“......”
그녀의 거친 입이 썩 싫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태호였다. 엘린은 커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태호를 보며 씩씩거리다 소리쳤다.
“너 또 왜!”
“......흠. 다름 아니라, 요즘 하늘성 어때?”
“뭐어!”
엘린은 일단 화를 내 보려고 했으나, 딱히 그럴 게 아닌 것 같아 곰곰이 앉아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늘 그렇듯 별일 없겠지, 거기는. 근데 왜?”
“하늘성으로 가는 방법이 지금 몇 가지나 있지?”
과거, 하늘성이 개방되었을 무렵은 그곳이 ‘새로운 지역’으로 취급되었다.
즉, 그곳은 유저들을 적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늘성으로 가는 방법은, 그곳에서 만들어 지상으로 내린 공중계단으로 가능했다. 꽤나 짜릿한 경험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그 외에는 솔직히 태호도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엘린은 어쩐지 의기양양해졌다.
“흥! 우리 일족의 멋진 이 공중정원으로 가능하지!”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 흠... 뭐, 엄청 큰 탈것 같은 게 아니면 힘들지? 근데 그럴 정도로 크더라도 하늘성 근처에 가면 박살 나 버릴걸? 거기 완전히 요새니까.”
그렇다면 까다롭다는 말.
“한번 보여 줄까?”
문득 엘린의 말에 태호가 눈을 반짝였다.
“볼 수 있어?”
“응.”
그녀는 태호가 정보에 궁해 하는 것이 기분 좋은지 경멸의 눈을 한 채 말했다.
“어디, 한번 부탁해 봐. 바닥을 기어 봐! 무릎 꿇고 빌어봐!”
“......”
태호는 대답하는 대신 지팡이를 꺼냈다. 엘린의 얼굴이 썩은 사과처럼 변했다.
“이, 이이... 치사하게...”
이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종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안쪽 방으로 들어서자, 수정구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는 활발히 움직이는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마치 CCTV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성을 대충 감시할 수 있다 이건가.’
엘린이 수정구를 조작하자, 다각도로 여러 곳을 볼 수 있었다. 태호도 익히 아는 지형지물, 그리고 하늘성 특유의 생김새를 지닌 종족이 활보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여긴 아무 문제 없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뱀파이어의 섬 같은 거 알아?”
엘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뭐?”
“그 왜, 밤 되고 보름달 같은 거 뜨면 박쥐 엄청 날아다니고, 검은색 섬 같은 건데. 알아?”
“......?”
엘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흠칫- 하고 놀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는 왜...?”
“아는구나?”
엘린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데?”
“......풀 문.”
풀 문?
태호는 들어 본 바 없었다. 엘린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 당차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여자가 겁내 하는 건,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시계탑의 기억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어.’
태호가 천천히 물었다.
“읊어 봐.”
< 순환의 고리 > 끝
< 내가 졌소! >
“그게...”
엘린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풀 문은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열리는 섬이야. 그 근방을 다크랜드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왕이 거기 보스고.”
뱀파이어... 어둠...
응?
어둠?
태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다.
“어둠이라고?”
“그래! 멍청아!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만월이 뜰 때만 나와서 섬 이름도 풀 문이야.”
“......”
태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볼카노스를 불렀다.
허나, 볼카노스는 여전히 묵묵부답.
‘뭔 일이 생긴 건가.’
이내 태호가 입을 열었다.
“거기 어딘지 알지?”
엘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미쳤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서 그래? 그럼 혼자서 가, 개새끼야!”
개새끼란 욕은 간만에 들어보았다. 그 신랄하고 원색적인 욕에 태호는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그거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아?”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걸로 해결되는 거지.”
엘린이 급하게 태세전환을 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풀 문... 거기 걔들 진짜로 무서워서 싫은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저 미친놈이 제일 무서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무서울 게 없는 놈이라잖아.’
아무래도 저놈은 분명히 미쳤다. 드래고니악에 거침없이 들어가서 멀쩡히 살아 돌아오는가 하면, 신들의 가호도 아주 둘둘 다 말고 있다.
게다가.
‘대체 무슨 힘을 얻은 거지? 아무리 봐도 보통 마력이 아닌데...’
저 미친놈이 이상한 힘을 얻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런 놈과 엮인 건지에 대해 한탄하는 엘린이었다.
구구구궁-
공중정원이 방향을 틀었다.
* * *
[우오오오오!]
막시무스는 심해 저 바닥에서부터 두둥실 떠오르는 거대한 해파리 괴물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우오오오오! 덤벼라, 이 마물! 신과도 대적했던 용맹하고도 위대한 기사, 막시무스가 상대해 주마!]
막시무스는 용맹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Lv. 450]
[정예]
[영롱한 대왕 해파리]
그 특유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있는 놈이었다. 덩치는 그야말로 유령선의 수십 배는 돼 보였고, 수천수만 개의 가느다란 촉수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오오오!]
[잘한다 막시! 조져버려!]
아르카네가 목청껏 소리치며 신난다는 듯 폴짝폴짝 뛰었다.
막 그가 움직이려던 그때.
콰지지지지직!
놈의 대가리를 향해 정확히 ‘강화된 어둠의 명령 5연발’이 작렬했다.
거대한 촉수가 사방으로 쭈욱 흩어지며 놈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할 무렵.
아르카네가 소리쳤다.
[멍멍아 물어! 물어뜯어!]
카르르릉!
펜삼이가 유령선 위에서 냅다 점프하며, 거대화한 채 해파리를 와락! 물어뜯었다.
우드드득-
그대로 나름대로 해파리 군단의 대왕이었던 녀석이 절명해 버렸다.
휘이잉!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태호가 어둠의 발걸음으로 순간이동 해, 해수면에 착지했다.
곧 해파리가 떨군 에픽을 냉큼 낚아채 유령선으로 돌아왔다.
‘예정대로 구했군.’
태호가 아이템을 확인했다.
‘듄의 두 번째 목숨.’
옵션은, 죽으면 원상태로 1회 부활하며 쿨타임이 24시간. 상의라는 부위에 장착하기엔 너무 그 외의 옵션이 없어 아예 쓸모를 찾기 힘든 녀석이었다.
‘우선 킵.’
“고생했다, 얘들아.”
태호가 녀석들을 보며 씩 웃었다. 유령선 위에 해파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풀 문.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 아니었다. 어차피 위치만 알면 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엘린의 공중정원을 이곳에 정차시켜 두고, 태호는 다른 데서 볼일을 보다 보름달이 떠오를 무렵에 스크롤로 공중정원에 돌아오면 된다.
태호는 투덜투덜 아주 욕을 입에 달고 태호 눈치를 살피는 엘린을 보며, 웃어 버렸다.
“개 시부럴 새끼. 차라리 자살이나 하지 그래? 짜증나. 죽어 버려. 죽어!”
그러다가도 슬쩍 쳐다봐 주면, 움찔! 놀라는 것이 제법 귀여워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쿠구구구궁-
그렇게 공중정원이 날고 또 날아,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멈추어 섰다.
“여기라 이거지?”
“그래!”
엘린은 고운 얼굴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태호는 인벤토리창에서 마력의 결정체를 듬뿍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엇?”
그녀의 눈이 변했다. 표정은 다시 고운 그대로 돌아왔고, 눈에는 호감도가 넘쳤다.
“정말 넌 컨셉이 다양한 애구나. 어차피 그냥 부려먹을 생각은 없다고 했잖아. 수고비니까 받아.”
“......고, 고맙다?”
그녀가 마력의 결정체들을 받았다.
잠시 후.
뉘엿뉘엿 지던 해가 꼴까닥 저 너머로 사라지고, 하늘에는 달이 떠오른다. 반쯤 차오른 달이었다.
그제야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
그저 그림자.
보름달이 아닌 시기에는 바다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일 뿐.
허나, 태호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이거 어쩌면.’
어둠, 그림자. 어째 키워드도 딱 맞다.
훌쩍!
태호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다와 가까워질 때, 그림자를 향해 ‘칠흑의 어둠 밟기’를 시전했다.
‘발동!’
그림자 속으로 숨는 그 옵션이 발동되며, 태호의 몸이 쭈욱 빨려 들어갔다.
‘어?’
헌데.
그것의 느낌이 아주 기묘하다. 본래 그림자 속에 숨는 것은, 약간 일종의 밀실 속에 은신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림자 속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지금 태호는 그림자 속의 ‘풀 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땅을 딛고 서 있었으며, 온 세상은 어두컴컴하고 어두운 채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검푸른 바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펼쳐져 있는 검은 섬! 그 안은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안에 빛은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인적 자체가 아예 느껴지지 않는 그림 속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침입자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왔잖아...
-어떻게?
-여긴 우리의 절대 영역인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호가 그쪽을 쳐다보자, 박쥐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만의 언어일진대, 태호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왕께 보고하자...
-죽일까?
-먹을까?
하나하나를 본다.
[Lv.500]
[풀 문의 뱀파이어]
‘잡몹이 500이라. 오호.’
태호는 그들의 수준이 가히 무 대륙 급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면, 이곳의 지배자인 뱀파이어 왕 역시 무 대륙의 ‘카자토스’급은 될 것이다.
-내가 먹는다.
문득.
그중 한 뱀파이어가 박쥐의 모습으로 태호에게 날아왔다.
‘어디.’
태호는 일부러 피하지 않고 한 대 맞아 주었다.
푹!
[1%의 방어막이 소모되었습니다.]
‘음?’
1%?
고작?
[대미지를 반사합니다.]
콰지직!
뱀파이어에게 반사된 대미지는 꽤나 얼얼했는지, 녀석이 당황해 소리쳤다.
-가, 강한 놈이다.
-그런데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먹자!
‘왜?’
태호의 머릿속에 왜? 라는 의문이 계속 떠돌았다. 문득, 태호는 깨달았다.
‘아!’
이 녀석들. 역시 예상대로 ‘어둠 속성’ 이었다.
[이 세트를 장착하고 있는 유저는 어둠 속성에 대한 내성이 매우 높아져, 어둠 계열 공격을 받았을 때 50%의 대미지 감소 효과를 받습니다.]
태호는 현재 ‘칠흑의 어둠 세트’로 인해 이런 효과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곧.
파닥파닥파닥파닥!
사방에 새카만 박쥐 떼가 날아올랐다.
‘어디.’
태호는 씩 웃었다. 안 그래도 레벨 업 하기 귀찮았는데, 이렇게 대용량으로 모여 준다면 이쪽이 고마울 따름이다.
고오오오-
태호는 신비력을 끌어 올렸다. 신비력은 스킬이 1단계라지만, 생각하는 즉시 마력을 신비력으로 변환할 수 있었다.
변환비는 대략 1:0.5로, 마력 전량을 소모하여 신비력을 절반쯤 채울 수 있었다.
[신비력을 저장합니다.]
[현재 소유한 신비력은 한계치의 50%입니다.]
허나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이상하다. 어둠의 힘이 느껴진다.
-괜찮아, 우리가 훨씬 많지.
-먹어 치우자!
태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박쥐 떼를 바라보았다.
-캬아아앗!
박쥐들이 허공에서 인간으로 변했다. 창백한 얼굴, 뾰족한 어금니가 돋보이는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들이 사방으로 시커멓고 불그스름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 기운들은 태호를 겨냥해 쏜살같이 날아들어 왔다.
‘뱀파이어라.’
과거 리얼 포스에선 등장한 바 없던 녀석들. 아무래도 까다로운 등장요건 때문인 듯했다.
두근두근
‘이쪽 보스는 어느 정도지?’
기대가 된다.
악신 조겐은 4/10 신노스에 버금갔다. 태호는 비전력과 신력을 운용하며 간신히 그를 천계로 돌려보냈다.
무 대륙의 카자토스와 나파는 2/10 신노스와 버금간다. 그렇다면, 이곳 ‘풀 문’ 역시 그 정도 급일 가능성이 높다.
즉, 신비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보이기 위해선 그 정도 급은 크게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태호가, 자신의 사방에 신비력을 소모한 광역기를 쏟아 냈다.
콰아아아아-!
동시에, 온 사방으로 그야말로 순도 높은 어둠의 마력이 뿜어져 나갔다.
마치 빛 한 올 허용하지 않는 순수하고도 철저한 어둠의 힘! 그것이 만들어내는 광격기에, 뱀파이어들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둠의 폭탄 비, 대규모 범위 중독, 어둠의 비.’
콰아아아-!
-뭐, 뭐지 이거.
-괴물...
-괴물이다!
뱀파이어들은 그야말로 닿는 족족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확실히... 하지만 이런 잡몹으론 실험이 안 되는데.’
태호는 흘끗 저편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어둠으로 뒤덮인 도시! 저 너머에서부터 까만 안개가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
‘오는구나.’
일단 잡몹 처리부터.
‘대규모 범위 폭사.’
콰콰콰콰콰콰쾅!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뱀파이어들은 태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달려드는 족족 터져나갔다.
-억! 어어억!
-이건 미친 괴물이다! 왕께서 오셔야 한다!
-모두 피해!
뒤늦게 몸을 빼려 해 보았으나, 헛수고다. 정령계에서 쏙 튀어나온 아르카네가 어둠의 종소리를 퍼트리고 있었으니까.
데-엥!
놈들이 모조리 다 석화 상태이상에 걸렸다. 그런 녀석들은 어둠의 망토로 한곳으로 모이고, 터져 나갔다.
콰지지직! 콰직!
[대, 대체 이게 무슨 일...]
사방이 웅웅 울리며, 이 섬의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창백한 피부의 남자였다. 본신은 검은 안개 같았지만, 일단 인간형으로 바뀐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 섀도우 월드의 풀문은 그림자의 절대 영역! 대체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오?]
놈이 태호에게 물었다.
[풀 문의 지배자]
[노스페라투 섀도우]
놈의 머리 위에 선명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의 보스가 확실했다.
‘싸워 볼까.’
태호는 말없이 놈을 보며 신비력을 끌어 올렸다. 지고하고 정순한 어둠의 힘이 용솟음치며 태호의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
노스페라투는 태호가 뿜는 어둠의 힘을 느꼈는지 움찔거리다, 자신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싸아아-!
그 힘에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태호는 자신의 신비력과는 다른 노스페라투의 어둠을 느꼈다.
콰아아아!
두 어둠의 힘이 용솟음치며 막 맞붙을 준비를 마칠 즈음.
노스페라투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소리쳤다.
[으... 안 되겠군. 내가 졌소!]
“......?”
< 내가 졌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