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통한 거냐 >
노스페라투는 태호를 보며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가 졌다고 했소. 당신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요.]
“......”
태호는 이 뜬금없는 이야기에 살짝 당황했다.
[모두 물럿거라.]
그의 말에 사방의 박쥐들이 우수수 뒤로 물러나 잠잠해졌다. 태호는 끌어올린 신비력을 유지한 채, 그에게 물었다.
“무슨 꿍꿍이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꿍꿍이란 게 어디 있겠소? 당신이 보유한 어둠의 힘은 명백히 나의 힘보다 상위에 있소. 이 싸움은 해 보나 마나요. 괜한 희생을 늘릴 필요가 없소. ]
상위에 있는 힘.
태호는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당신은 아마도... 드래곤? 아니면? 설마 신의 대리자 같은 것이오? 그 무엇이 됐든, 이곳에 온 이유나 말하시오. 내 목숨을 가지러 오셨소?]
노스페라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는다고 숨었건만, 결국 그림자의 절대 영역까지 침범당하다니... 좋소. 목숨을 원한다면 가져가시오. 다만, 내 부하들은 살려 주시오.]
“......”
제법 심각한 얼굴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녀석이었다.
태호는 어쩐지 맥이 탁 풀려, 신비력을 거두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업 메시지가 울리는 것을 보니 약간 더 아쉽다. 이제 태호의 레벨은 388.
경험치가 먹음직스러웠는데 조금 더 싸워 볼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다 사라졌다.
[......왜 그렇게 맛 좋은 음식을 보듯 보는 거요?]
“크흠.”
태호는 헛기침을 했다.
노스페라투는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고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오셨소? 저 하늘 위요? 아니면, 추측대로 드래곤이시오? 어차피 최근 이 부근에 혼돈의 힘이 감지되었으니, 타락할 바에야 그대에게 죽는 게 나을지 모르겠소.]
혼돈의 힘이 감지되었다.
태호가 눈을 반짝였다.
“혼돈의 힘?”
노스페라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태호는 한발 물러섰다.
그에게서는 뱀파이어 특유의 힘이라 느껴지는 기운이 넘실거릴 뿐, 혼돈의 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태호가 이번에도 놈들보다 한발 빨랐다.
“나는 풀 문이 혼돈의 힘에 잠식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을 뿐이다. 그대들이 혼돈의 힘에 잠식되었다면, 친히 말살하러 왔다.”
슬쩍 떠본다.
말투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볼카노스의 말투를 따라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쪽이 유리한 대화를 하기에 좋을 듯하다.
[뭐, 뭐요?]
노스페라투가 펄쩍 뛰었다.
[무슨 흉악한 말씀을! 우리는 혼돈의 힘이 얼마나 패악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때문에 그림자 세계에 숨어 놈들의 이목을 피하려 했을 뿐!]
‘그렇단 말이지.’
[게다가 우리가 보름달이 뜰 때 사방으로 흩어져 양식을 구해 오는 것은 맞소만, 애초에 태고 시절 이후 대륙 쪽으론 한 번도 가지 않았소. 요즘은 먹어 보아야 짐승 피요. 애들 피골이 상접한 것 안 보이시오?]
태호는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로만은 태호가 자신을 추적하지 못함을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여러 계획을 세웠다만, 모조리 태호에게 박살 났다. 태호는 로만을 추적할 수는 없었으나, 과거의 지식을 토대로 놈의 진행을 꿰뚫고 있었다.
결국, 놈은 ‘블러드 아일랜드’에서 샴의 힘을 모조리 회복하려 했지만 그 계획 역시 파토가 났다.
놈의 계획들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나같이 일리는 있었지만, 두 가지를 고려하지 못했다.
‘내가 회귀했다는 것과, 신력을 손에 넣었다는 것!’
악신 조겐을 이용해 태호를 막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태호는 조겐과 사투를 벌여 귀환시켜 버렸다.
그리고 태호의 기억 속에는 없던 ‘풀 문’, ‘하늘성 확장팩’, ‘거인의 섬’ 등은 시계탑의 기억을 통해 습득했다.
무엇보다.
‘내가 놈의 힘을 추적하지 못하듯, 놈 역시 내가 가진 정확한 힘을 몰라.’
일부러 조겐을 상대할 때도 볼카노스의 권능 같은 신의 힘은 전혀 사용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신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도 모를 테고, 그저 비전력 정도를 사용한다- 정도의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쓰지 않기를 잘했어.’
게다가 수호자의 힘은 아마도 태호가 가진 신력 등을 철저히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런데.
놈은 하늘성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자 세계인 풀 문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갈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거인의 섬!’
놈의 행로가 완전히 좁혀졌다.
그런 태호를 바라보던 노스페라투가 천천히 물어왔다.
[오해가 풀리셨소?]
그런 셈이다.
“저기 창공 일족 애들은 너희 무서워서 여기 얼씬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따지려면 걔들에게 따지도록 하라.”
노스페라투가 그나마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럼 이제 당신도 솔직히 말씀해 주시오. 어디서 오신 것이오?]
“나는 어둠의 신 볼카노스 님의 제사장이다. 신명(神命)으로 혼돈의 힘을 격퇴하고 있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볼카노스...! 어쩐지. 어둠의 신이라면 그림자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그의 힘은 모든 어둠을 관장하기 때문이지... 이제야 이쪽도 오해가 풀렸군.]
그렇다.
볼카노스의 전용 에픽. 그것은 ‘볼카노스의 권능’을 아이템으로 남겨 둔 것. 에픽이지만 다른 에픽과는 다른 아이템들이다.
태호는 새삼 볼카노스의 대단함을 느꼈다.
[헌데 당신은 독특하오. 보통 신의 제사장들은 그 신 고유의 힘이 느껴져야 하오. 가호 같은 것 말이오.]
노스페라투가 기묘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선... 그저 비전력과 비슷하지만 지극히 정순하고도 청량한 기운만이 느껴질 뿐. 그래서 애초에 볼카노스 신의 제사장이란 생각을 못 했소.]
그건 수호자의 힘 덕분일 거다.
‘볼카노스.’
태호는 그를 불러 보았으나, 여전히 묵묵부답.
별수 없이 미리 선수를 쳤다.
“볼카노스께서는 현재 용무가 바쁘셔서 소환에 응하실 수 없음이다.”
[...그렇소?]
태호가 그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충 이쯤 되면 얘기가 빠르겠군. 너희의 보물을 내놓아라. 나는 혼돈의 힘을 처치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너희의 보물이 필요하다.”
물론 거짓말이었고, 그냥 던져 본 미끼였다.
태호의 전생에 풀 문이라는 것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게임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 신과 싸우거나 집단 이상 증세가 생기는 등등의 일도 없었다. 그저 과거에는 평범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허나 이번 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리얼 포스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방향은 이제 완전히 꼬였다.
그리고.
‘태곳적의 일족이라면, 분명히 유용한 것들을 가지고 있을 거야.’
[......!]
노스페라투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턱을 괸 채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설마 통한 거냐.’
궁금증이 일긴 했다. 이 일족은 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얼마나... 필요한 것이오?]
태호는 두 눈을 꿈뻑였다.
그러다가 결심했다는 듯 대답했다.
“전부다! 나는 지금부터 샴을 처리하러 가야 한다. 너희의 힘으로는 지금의 샴을 처리할 수 없을 터. 내게 맡겨라.”
[끄응...]
노스페라투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 반문했다.
[당신의 말이 맞소. 대장군 샴이라면, 우리는 대응할 새도 없이 잡아먹힐 거요. 허나... 전부 다 달라니...]
“내놓지 않겠다면, 언젠가는 분명 혼돈의 힘의 손에 들어갈 것... 차라리 너희 모두를 이 자리에서 없애는 것이 후한을...”
[그만! 그만!]
노스페라투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당신 힘은 이제 알았소! 그러니 흉측한 소리는 제발 꺼내지도 마시오!]
‘되네?’
태호는 슥, 그들을 보았다. 박쥐 하나하나, 태호의 시선이 닿자마자 움찔! 놀라며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이게 상위 힘의 수준.’
격이 한두 단계 높은 힘은 그만큼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불과 얼마 전.
무 대륙에서 카자토스와 나파와의 싸움에서만 해도, 이런 상황이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허나 이제 태호는 비전력에서 신비력에 이르기까지 빠른 성취를 보였다. 그렇게 얻은 상위 힘!
그것이 상황을 이렇게 바꾸었다.
[후우...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오.]
샤샤샥!
노스페라투는 검은색 안개로 변해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태호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품에 들려 있는 것은 스킬북 두 개.
어쩐지 태연한 얼굴을 한 채 잠깐 생각했다.
‘당연히 다 가져온 게 아니겠지.’
자신이 저 상황이라고 해도 단번에 밑천까지 다 털지는 않을 거다.
태호는 슬쩍 노스페라투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태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 번 더 질러 본다.’
고오오-
태호는 신비력을 끌어 올렸다.
전신에 다시 순도 높은 어둠의 힘이 일렁이며,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태호는 그대로 을씨년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간도 크구나, 감히 신의 제사장인 나를 시험하려고 해?”
[......!]
노스페라투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휴우... 결국 그것까지 원하시는 거요?]
“그렇다. 볼카노스 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이는 큰 대의를 위한 것이며, 불응할 시 안타깝지만 너희 모두를 사살하고 가져갈 수밖에 없다. 혼돈의 힘의 타락은 이미 드래고니악, 무 대륙을 거쳐 갈 뻔했다.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고, 솔직히 이제는 지쳤다. 너희를 다 죽이는 게...”
[......아 거 참, 알았소. 주면 되잖소? 왜 자꾸 흉악한 소리를 해 대는 거요?]
노스페라투가 시무룩해져,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 다시 나타난 그는 태호에게 기분 나쁘게 생긴 심장 하나를 내밀었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제법 그로테스크했으나, 태호는 당연하다는 듯 그것까지 받았다.
제법 화가 풀린 듯 표정을 바꾸며, 태호가 물었다.
“그런데 물어볼 게 하나 있다. 너희의 힘은, 드래곤의 비전력과 비등한가?”
[그보다 한 급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거요. 한때는 우리도 신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곤 하나... 그것 옛일일 뿐.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약간만 남아 있소. 그것으로는 비전력을 이길 수가 없지. 물론 보통 마력보다는 높소만...]
역시 그랬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고대 일족들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별로 특별할 것도 아니긴 했다.
‘이러니 금세 꼬리를 내렸지.’
비전력보다 한 급 아래라면, 그보다 위에 있는 신력에 준하는 신비력은 두 급 이상 높다.
태호는 이곳에서 급이 높은 힘이 가진 위력을 톡톡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단 너희는 이제 죽은 듯 이곳에 숨어 있도록 하라. 사건이 간략적으로 해결된다면 내 다시 이곳을 찾겠다.”
험험 목을 가다듬은 뒤 볼카노스의 말투를 흉내냈다.
[음... 알겠소.]
“너희가 마지막으로 혼돈의 힘을 느낀 게 언제지?”
노스페라투가 재깍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았소. 대략... 사흘가량 전이오. 이 근방에서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다 저편 서쪽으로 사라졌으니 대해를 건너간 요량인 듯한데...]
태호가 넌지시 물었다.
“그곳에 거인의 섬이 있겠군?”
노스페라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태곳적 거신병들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오.]
< 설마 통한 거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