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되네? >
“거인의 섬 알지?”
태호의 물음에 엘린이 다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은 별로 무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거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나오지?”
“알면서 왜 물어?”
‘역시.’
짜릿하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일단 샴과 로만을 잡는다.’
샴은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로만은?
로만 역시 수호자의 힘에 의해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인가? 아니면, ‘유저의 죽음’을 맞게 될 것인가.
태호는 그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볼카노스를 불러 보기로 했다.
‘볼카노스.’
미동도 없다.
‘볼카노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확실했다.
태호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속으로 되뇌었다.
‘볼카노스, 당장 나오지 않으면 당신 똥싸개라고 소문 퍼트릴 거야.’
그때.
샤아아아-
사방에 어둠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불러도 미동조차 없던 그가 드디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어둠 속.
태호는 눈앞에 나타난 볼카노스를 보았다. 그는 평온하면서도, 뭔가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어, 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볼카노스가 대답했다.
[그렇군.]
“최근에는 바쁜 일이 있으셨나 봐요? 걱정했습니다. 저는 풀 문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풀 문!]
볼카노스는 빙긋 웃었다.
[그곳의 뱀파이어들은 그리 나쁘진 않으나, 신뢰할 만한 종족들은 아니니 가려 사귀어라. 실은...]
실은?
볼카노스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 전 천계에 큰 균열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 점에 대해 조사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큰 균열.
태호는 대번에 눈치챘다.
“아마도 그 균열을 통해 악신 조겐이 지상에 나타난 듯합니다.”
[음... 역시 그랬군.]
볼카노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호에게 물었다.
[조겐이 꽤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긴 들었다. 너는... 신력을 깨우친 것이냐?]
태호는 대답하는 대신, 신비력을 끌어 올렸다.
고오오-
그것을 본 볼카노스가 신음을 흘렸다.
[허어... 대체 그것은... 비전력? 아니, 그보다 더 정순하고 고강한 느낌이로군.]
“음... 신비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신비력이라?]
볼카노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도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다.
[흐음... 묘하도다. 나는 그런 힘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허나... 분명히 실존하기에 네게 주어진 것일 터.]
“이것은 신력에 준하는 힘입니까?”
[나의 생각에는 그렇다. 허나, 이상하게도 신력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비전력과 매우 흡사하면서 더더욱 정순할 뿐이구나.]
태호의 생각대로였다.
볼카노스는 마치 외계생물을 보듯 태호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너는... 이제 신력에 준하는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네 힘은 신에게도 통한다.]
두근!
신에게도 통한다.
그 말을 볼카노스에게 직접 들으니, 어쩐지 심장이 뛰었다.
“아, 악신 조겐이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 혹시 혼돈의 힘이 만들어 낸 결계 때문인 겁니까? 세계의 맹약 때문에 지상에 온전히 내려오지는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 결계가 일시적으로 역풍을 막아 주기 때문이겠지. 그렇단 말은...]
태호와 볼카노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호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세계의 맹약이 점점 더 깨어져 가고 있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때론 네가 두렵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론이다.
“지금부터 혼돈의 힘의 사념체를 잡으러 갈 겁니다. 놈은 현재 모험가의 몸을 빌리고 있으며...”
태호가 볼카노스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모험가’이기에 죽음이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공유해 주십시오.”
[봉인해야 한다.]
볼카노스가 단호히 대답했다.
[이제 너는 신력에 준하는 힘을 쓸 수 있다. 그 힘으로 만들어 낸 결계로 봉인해 두어야 한다.]
봉인!
단어는 참 쉬우나, 해결책으로 그보다 더 매력적인 단어는 없을 듯싶었다.
“봉인이라...”
태호가 반문했다.
“봉인술이란 스킬이 따로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신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봉인술 역시 사용할 수 있다.]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불덩이 작렬’을 꺼냈다.
이는 케노스를 잡고 얻은 에픽 스킬북으로서, 언젠가 있을 교환을 위해 모아 둔 아이템이었다.
“하나면 될까요.”
[흐음... 그래. 그 정도면 된다. 이건 상대의 힘이 너보다 낮을 때에야 사용할 수 있는 금제술. 그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 유의하여야 할 점은...]
“다른 신들에게도 이런 봉인술이 하나씩 있는 거군요.”
[바로 그렇다.]
볼카노스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간의 적들은 혼돈의 존재들뿐이었다. 허나, 앞으로는 신들과 조우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런 봉인술에 대비한 방어술이 있어야 했다.
[봉인술은 웬만한 격차가 아니라면 쉽게 걸리지 않는다. 빈사 상태에 이르는 타격을 받아, 반격 불능의 상태가 되어야 걸릴 것이다. 그러니...]
볼카노스가 덧붙였다.
[객기를 부리는 것은 절대 좋지 않다. 호승심과 객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불리하면... 냉큼 도망치거라.]
“새겨듣겠습니다.”
태호는 ‘불덩이 작렬’을 내밀었다.
곧, 볼카노스에 의해 새로운 스킬을 부여받았다.
[스킬 : ‘신의 주박술’을 획득했습니다.]
문득.
태호는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세계의 맹약이 점점 더 약해지고, 차원 간의 균열이 빈번하게 나타난다면... 언젠가 당신께서도 지상에 내려오실 수 있다는 말씀이겠죠.”
볼카노스는 지그시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볼카노스가 지상에 내려온다!
그렇다면 전에 없이 완벽한 아군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쯤이 된다면 다른 신들 역시 지상에 내려올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최악.’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태호는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제가, 힘을 꽤나 많이 회복한 샴과 대적할 수 있을까요?”
놈은 5번째 확장팩의 주인이었고, 당대 최고의 유저들이 최소인원으로 100개의 파티를 나누어 교대로 상대를 해 일주일을 꼬박 걸려 사냥했던 녀석이었다.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 뒤쯤.
유저들의 평균 레벨과, 장비 파밍 수준은 지금과는 압도적인 차이가 날 정도로 크게 났을 때다.
허나.
태호의 현 장비와 가진 무력의 수준은 이미 과거 리얼 포스의 정점이던 시기를 뛰어넘는다.
볼카노스는 태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조겐을 상대했다면, 샴 역시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오히려 조겐 보다 수월할 거다. 혼돈의 존재들은 이 세계 안에서는 고유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없으니까.]
이번 생.
케노스와 신노스를 잡기 위해 수백만의 군대가 동원되었다.
허나, 그때의 태호와 지금의 태호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태호는 흑마법사의 전용 에픽 세트를 갖추었고, 신력급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력으로 때려 박던 그 시절에 고전했던 것과는 다르다.
게다가.
[패시브 : 균형의 수호자Ⅱ]
[설명 : 최초로 균형을 파괴하는 혼돈의 존재를 사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스킬. 일정 범위 안의 균형을 탐지합니다.]
[균형의 수호자에게 사냥당한 ‘균형 파괴자’들은, 혼돈의 권좌로 돌아가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대장군(2/5)]
[장군(7/25)]
[1차 업그레이드]
[‘사냥한 균형 파괴자들의 능력 일부를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균형의 수호자는 앞으로 균형 파괴자를 상대할 때 20% 더욱 강력해집니다.’]
[앞으로 ‘1’인의 균형 파괴자를 사냥하면 2단계로 업그레이드됩니다.]
균형의 수호자로 인해, 놈들 한정 20% 더 강하다.
이제 태호는 전신을 에픽으로 둘둘 말고, 에픽 콜렉트의 추가 대미지도 잔뜩 얻었다.
천계의 신수 펜삼이도 가세할 거고, 카자토스와 드래고니악의 지원도 유효하다.
‘게다가 샴을 잡으면 2단계 업그레이드가 시작되지.’
승산?
승산은 이제 충분했다.
[어서 가서 그 짐승의 두 날개를 쥐뜯어 버려라.]
* * *
쿠우우우웅-
공중정원이 빠르게 움직였다. 서쪽으로 향하던 공중정원 너머, 지평선이 보였다.
태호는 그곳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노스페라투에게서 뜯어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스킬북 두 개가 눈에 띈다.
[등급 : 에픽]
[종류 : 스킬북]
[이름 : 섀도우 체이서]
[옵션 : 상대방의 그림자를 가격하면, 본체에 동일한 대미지를 가합니다. 모든 상태이상 기술과 힐링, 버프 등도 동일합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세상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했던 스킬이었다.
그다음은?
[등급 : 에픽]
[종류 : 스킬북]
[이름 : 블러드 드레인]
[옵션 : 일정 범위 안의 생명력을 흡수합니다. 흡수한 만큼 자신의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것도 성능이 아주 좋아.’
더 볼 것도 없다. 태호는 두 개 스킬북을 망설이지 않고 배워 버렸다.
[에픽 콜렉트]
[현재 보유한 에픽 아이템은 총 20종입니다.]
[6단계 추가 대미지가 개방되었습니다.]
[20개- 추가 대미지 300%]
[칭호 ‘에픽 가이’ 의 대미지 상승이 20%로 적용됩니다.]
기존의 5단계 200% 추가 대미지에서 단숨에 300% 추가 대미지가 됐다.
‘좋아.’
이번에는 다음 에픽.
노스페라투가 끝까지 내어 주길 꺼려 했던 심장이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착(캐릭터에 장착 귀속됨)]
[이름 : 더 섀도우의 심장]
[더 섀도우. 혹자는 그를 뱀파이어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추락한 신이라고도 말하죠. -초보 학자, 카실론]
[옵션 : 본신의 65%의 성능을 발휘하는 그림자 분신을 2체 만들어 냅니다. 분신은 본체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모든 착용 아이템과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좋은데?’
다른 유저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태호의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옵션이었다.
신비력을 사용할 수 있는 데다 착용 에픽들의 옵션만 하나씩 사용해도 다들 터져 나갈 거다.
[에픽 등급 아이템, ‘더 섀도우의 심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본 아이템은 사용 시 캐릭터에 착용 귀속되며,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망설임 없이 착용했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남는다. 태호는 엘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채근했다.
“야. 얼마나 걸려.”
“한... 반나절쯤? 어쩌면 그 이상?”
엘린은 기껏 받은 마력의 결정체들이 공중정원의 속도를 올리는 것 따위에 쓰이는 게 불만인지, 양 뺨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럼 나 어디 좀 다녀온다.”
태호는 그 말을 마치고 스크롤을 찢었다.
잠시 후.
태호는 본대륙 북부의 유니크급 던전 앞에 서 있었다.
이 던전의 이름은 ‘겨울 여왕의 얼음 왕국’ 이다. 리얼 포스의 역사대로라면, 올겨울쯤 발견될 운명이었다만 시간이 난 김에 여러 가지 실험용 던전으로 쓸 생각이었다.
이곳은 때마다 리스폰이 되며, 리스폰 될 때마다 보스가 바뀐다.
그리고 네 번의 리스폰이 끝나면 더 이상 리스폰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 던전의 입구에 들어선 태호는 ‘더 섀도우의 심장’을 발동했다.
[분신체를 1 or 2체 소환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선, 1체.’
쑤욱-!
태호의 몸에서 까만 기운이 새어 나오더니, 눈앞에 정확히 태호와 똑같이 생긴 아바타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태호의 게임 화면에도 마치 ‘듀얼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처럼 작은 창 하나가 만들어졌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그 화면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그러자, 생각대로 아바타가 움직였다. 거 참 신기한 구동 방식이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태호는 그 아바타의 화면을 주시하며 닥사(닥치고 사냥) 명령을 내렸다. 보이는 족족 다 때려 부수기 시작한 분신체를 놔두고 다시 스크롤을 찢었다.
다시 나타난 곳은 대륙 동부의 초보자 마을.
태호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분신체1의 화면을 주시했다. 몬스터들을 잡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태호의 움직임과 굉장히 유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
경험치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 점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되고 있었다.
‘이게 되네.’
과거, 태호는 비슷한 실험을 막시무스와 아르카네로 해 본 바 있었다. 그때는 펫인지라, 멀리 떨어져 있으면 경험치가 오르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분신은 다르다 이거지?’
태호는 그대로 동남부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이 인근 어디였는데...’
그리고 숲을 잠깐 헤집으며 다니다, 아주 교묘하게 가려진 토굴 하나를 발견했다.
‘아, 여기 있군.’
이곳 역시 유니크급 던전, ‘진흙 골렘의 아수라장’ 이었다. 마법 방어력이 매우 높은 진흙 골렘들이 주된 적들로, 리스폰이 계속해서 되는 던전이었다.
‘여기도 하나.’
[분신체 1체를 소환합니다.]
이제 2체의 분신체가 모두 소환되었다. 덩달아 태호의 게임 화면에 또 다른 작은 화면이 만들어졌다.
‘마치 오토 돌리는 것 같네.’
옛날 PC 온라인 RPG 게임에서 자동사냥을 돌리는 것처럼 두 분신체가 사냥을 시작했다.
이제 태호의 본체도 움직일 시간이다.
태호는 또 다른 유니크급 던전을 찾아 스크롤을 찢었다.
‘아주 유용해.’
지루한 닥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앞으로의 레벨 업 구간이 꽤나 수월해질 듯싶었다.
‘어라?’
문득.
태호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스킬 : 고통의 연쇄 숙련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 강화된 어둠의 폭탄의 숙련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스킬 숙련도까지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시, 시부럴... 이게 돼? 원래 되는 거야?”
< 이게 되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