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색유성 >
곰곰이 따져 보면, 그간 많은 전투가 있었다.
태호는 대부분의 전투에 승리했다. 비긴 적은 있으나, 진 적은 없다.
모든 전투에서 레벨이 높았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 것이 분명했다.
‘전직 레벨만 찍으면 되는 건데.’
리얼 포스의 시스템은 10차 전직까지 존재한다. 400레벨에 6차, 500레벨에 7차, 600에 8차, 700에 9차, 800이 10차.
레벨이 오를수록 필요 경험치는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과거에는 십 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기에 많은 유저들이 만렙 달성을 하였으나, 어찌 됐든 그때도 전체 유저수의 5%도 안 되었다.
결국 레벨 업은 근성과 얼마나 대형 길드에 들어가 좋은 사냥터를 독점하냐에 따라 갈렸었다.
태호는 불현듯 떠오른 이 사냥법 덕분에, 매우 고무된 상태였다.
현재의 태호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2개의 유니크급 던전을 학살하는 셈이었다.
거기서 들어오는 경험치가 차곡차곡 쌓이는데, 본체까지 사냥을 나선다면 레벨 업 속도는 족히 3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태호의 본체도 신나게 던전을 썰어 나가면.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 숙련도가...]
스킬 숙련도와 레벨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올라가는 것이다.
본래 50명도 넘게 나서서 공략해야 했던 유니크급 던전을 혼자 독식하니 그 막대한 경험치도 경험친데, 3개의 유니크급 던전을 싹 쓸어 버리니 말 그대로 폭렙업이 시작되었다.
‘잠깐만, 잠깐만.’
태호는 문득 떠올렸다.
‘이런 식이면 분신이 생기는 에픽이나 스킬 몇 개만 더 모으면 대박이잖아?’
일단 사냥 계속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분신이란 개념은 전혀 흔한 컨셉이 아니었다. 그런 식이었으니 과거에도 이런 편법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체크해 두자.’
분신을 늘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적어도 레벨 업에 대한 부담감은 대폭 줄일 수 있으리라. 게다가 스킬 숙련도 작업에도 매우 유용했다.
‘우선.’
400레벨을 빠르게 달성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유니크 던전 3개를 동시에 클리어해 나가는 기적으로, 몇 시간이 채 가기 전에 태호는 40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거...’
그러면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잘 안 오르네.’
어차피 반나절은 꼬박 사냥에 투자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빠르게 끝났다. 분신 없이 혼자 열심히 사냥을 했다면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을 것이란 말이다.
이제 400레벨.
하기사 이제 리얼 포스는 오픈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과거의 기억보다 현재의 유저들 평균 레벨은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태호는 망설임 없이 6차 전직의 서를 사용했다.
[당신의 몸에 깃든 볼카노스의 가호가 더욱 강해집니다.]
[6차 전직에 성공하였습니다.]
[전직 보너스로 지능 스텟이 20 상승했습니다.]
[위업 : 최초의 6차 전직자]
[보상- 전직자의 올 스텟 +15]
역시 6차 전직쯤 되니, 전직 보너스와 위업 보상도 꽤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이제 중요한 건 6차 전직의 스킬이었다.
[흑마도사 궁극기 : 흑색유성(黑色遊星)을 얻었습니다.]
흑색유성이다.
아주 괜찮은 스킬이었고, 궁극기라고 불릴 만한 급의 녀석이었다.
대략 설명은 이렇다.
‘흑마도사의 전장에 흑색 유성을 소환한다. 이 유성은 일정 범위를 비추며 범위 내에 블랙홀을 만들어 유성의 근처로 빨아들인다. 이 유성은 20초간 유지된 후 자동 폭발 (혹은 폭사로 폭발) 하며, 폭발 시 적에게 가해진 모든 상태이상 대미지를 추가로 주며 동시에 모든 상태이상을 건다.‘
대략 범위기+대미지 뻥튀기 기술이었다.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성능인데, 사실 그간 얻은 게 있어 빛바래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절대적인 홀딩 기술을 얻은 셈이니 일단 무조건 좋다.
이제야 샴을 패 죽일 완벽한 준비가 끝났다.
......태호가 카자토스와 로크나이엘과 동행한 채 공중정원으로 돌아올 무렵은 저 너머 지평선에 거대한 섬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저기가 거인의 섬이지?”
“응.”
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섬 사방에는 벌써부터 회색빛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혼돈의 힘이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좋아.’
오히려 그 부분이 태호를 꽤나 만족시켰다. 어찌 됐든, 맞게 왔다는 말이었다.
태호는 ‘어둠의 추적자’를 발동시켰다.
역시나 추적자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호의 예상대로, 놈들은 추적자를 피하고 있었다.
“저곳인가. 과연, 음침한 혼돈의 힘이 가득하군.”
카자토스가 신음을 흘렸다. 지켜보던 로크나이엘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태호를 보았다.
태호는 간단히 브리핑을 시작했다.
“두 분은 제가 지시하는 상대를 일단 공격하시면 됩니다. 적은 혼돈의 주인의 사념체, 그리고 대장군 샴일 확률이 높습니다. 두 명이죠. 어떤 놈도 놓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로만이었다.
놈을 제대로 초죽음 상태로 몬 뒤, 봉인해 버려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도 놈의 귀찮은 계략에 휘말리지 않고, 상황 주도가 가능해진다.
‘이 둘이라면, 샴을 이기진 못 하더라도 적어도 비기긴 할 거야.’
하나는 드래곤이고, 다른 하나는 무 대륙의 패자다. 그 점에서 든든한 두 아군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풀 문의 노스페라투 역시 분명한 강자였지만, 태호는 아직 그를 제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구구구궁-
엘린의 공중정원이 거인의 섬 창공에 도달했다.
저 아래, 텅 빈 섬의 사방에서 혼돈의 아우라가 퍼지고 있었다. 아직 섬은 텅 비어 있어야 했다.
‘태곳적 거인들은 섬에 파묻혀 잠들어 있다는 설정인 듯했으니까.’
또한.
태호는 그 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서 퍼져나오는 혼돈의 힘, 그 근원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저기다.’
이 까마득한 창공에서도 보이는 저 괴물!
홍학 대가리에 두 개의 날개를 고이 접은 채, 봉우리 꼭대기에서 저 아래를 향해 아가리를 쩌억 벌린 놈이었다.
‘샴!’
드디어 만났다.
두근 두근 두근
아이러니하게도 태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여러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에서 오는 희열, 그리고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마친 뒤 놈을 맞는 것에 대한 만족감.
마지막으론 호승심이었다.
‘내가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알고 싶다.’
조겐을 상대할 때, 태호는 신력이라는 격 높은 힘 때문에 고전해야 했다.
하지만, 샴이라면.
지금 얻은 힘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을 거다.
태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색이 돼 질려버린 엘린의 얼굴이 보였고, 그 좌우로 용맹무쌍해 보이는 카자토스와 냉정함을 유지하는 로크나이엘이 보였다.
‘샴 공략의 핵심은 소수정예.’
지금 카자토스와 로크나이엘은 태호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소수정예 인원이었다.
‘중요한 건 로만.’
만약 로만이 샴과 함께 있다면, 태호는 무조건 놈을 짓이겨 버릴 생각이었다.
“가죠.”
태호는 망설이지 않고 공중정원에서 뛰어내렸다.
쐐애애애액-!
바람이 무시무시하게 태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온몸이 짜릿해지는 감각, 그대로 태호는 감각 세계로 접어들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온몸에 전해지는 스릴이 완벽히 현실과 같아졌다. 지금의 태호는 ‘63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닐까?’란 생각을 할 지경이었다.
으드드드-
허나 씨익 웃었다. 이 스릴에 중독돼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허공을 향해 마력을 이용한 스킬 열 번을 갈겼다.
[10스택 달성]
고오오-
그대로 10스택 이후 5연사를 이용할 것이다.
태호는 표독스러운 두 눈으로 저 아래,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혼돈의 힘을 퍼트리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선빵필승이다.’
쏴아악!
태호의 지팡이에서 그야말로 섬뜩한 신비력이 쏟아져 나왔다.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는 그 힘이 만들어 낼 것은, 볼카노스의 상위 힘!
‘나락의 절대 구역.’
무려 나락의 절대 구역 5연발이다.
쿠구궁!
저 아래.
샴이 서 있는 사방에 다섯 겹의 나락의 절대구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비력은 바로 올인이다. 곧바로 마력 전량을 소모해 치환했다.
[현재 소유한 신비력은 한계치의 50%입니다.]
‘체마교환’
다시 50%를 모은다.
꽉 찬 신비력이 곧바로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 놓은 것처럼 질질 새어 나갔다.
그렇게 완전 충전을 두 번이나 한 뒤에야 온전히 5연발이 완성되었다.
쿠구구구궁-!
어느새 저 아래에 시커먼 어둠의 기둥이 세워졌다. 놈이 흠칫 놀라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인다.
태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놈에게 총 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쿠구구구궁-!
이윽고. 놈의 사방이 완벽히 어둠으로 뒤덮였다.
[키르르르르르륵!]
포효성이 들려왔다. 태호는 추락하는 그대로 어둠의 기둥 벽을 뚫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스킬을 투과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닥에 내리꽂히기 직전, 태호는 어둠의 발걸음으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착!
그리고 저편의 샴을 보았다.
[네놈... 네놈이 온갖 훼방을 놓던 그 버러지였구나... 크르르르르릉!]
샴이 분통 터진다는 듯 태호를 노려보았다.
[내, 이 빌어먹을 볼카노스의 종자들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살 수가 없다!]
드디어 고대하던 저 빌어먹을 짐승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너, 머리가 많이 없구나?”
태호의 말에 샴이 카르릉! 하고 긴 포효성을 내질렀다. 과연, 놈의 대가리는 다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본래 열 개의 대가리였어야 할진대, 절반 정도의 힘을 회복했다는 말.
콰직!
이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다섯 겹의 어둠의 기둥. 그것이 슬슬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사방에서 뻗어져 나온 섬뜩한 어둠의 창이 샴을 향했다. 샴은 카르릉거리며 혼돈의 힘을 뿜어냈다. 태호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놈의 전신에 어마어마한 바람이 깃들었다.
콰아아아아!
어둠과 바람의 대결!
허나, 샴의 다섯 개 홍학 대가리에 경악의 표정이 들어찼다.
[어찌하여... 신력이... 인간에게 신력에 준하는 힘이...?]
태호는 대답하는 대신 펜삼이를 소환해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새끼 자근자근 물어뜯어. 알았지? 아주 죽여 버려.”
망!
펜삼이가 알았다는 듯 망망거리며 기쁘게 짖었다.
파파파파파팍!
어마어마한 어둠의 창이 샴에게 날아든다. 샴은 피하고 막고에만 정신을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불어라!]
샴의 온몸에서 강대한 바람이 일었다. 마치 토네이도처럼 일어난 먼지바람이 놈의 날갯짓을 받아 더욱 가중되었다.
놈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쏜살같이 움직이며 창을 피해 내는 것은 차라리 곡예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태호에게 날아든 것은,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든 수천 개의 칼바람이었다.
카카카카캉!
그리고.
그것은 어느샌가 태호의 앞에 나타난 카자토스의 두 개 양손검에 틀어막혔다.
카자토스는 신들린 듯 양손검을 휘두르고, 뒤이어 나타난 로크나이엘이 역풍을 만들어 냈다.
파파파팟! 파팟! 파파팟!
허공에 바람과 바람의 공격이 상쇄되고, 카자토스의 검 끝에서 사라져 갔다.
샴이 다섯 개 홍학 대가리의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포효했다.
캬르르르릉-!
온몸이 쩌릿쩌릿할 정도로 기분 나쁜 포효. 카자토스가 지지 않고 거세게 울었다.
크허허헝!
워크라이가 발동됐다.
태호는 그 사이, 막시무스와 아르카네 그리고 유령 표범까지 꺼냈다.
“너희, 이 섬에서 로만 찾아.”
그 녀석들이 발 빠르게 흩어졌다.
[드래곤에... 무 대륙의... 찌꺼기... 카르릉...]
샴이 불쾌하다는 듯 홍학 대가리들을 바르르 떨었다.
[온갖 떨거지들이... 다 모였구나...!]
태호는 씨익 웃었다.
샴 사냥이 시작되었다.
< 흑색유성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