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37화 (137/194)

< 진실의 눈 >

카실론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별것 아닌 일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래서 충격이 조금 덜 했다.

“그럼... 모든 신들이 과거엔 인간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래.”

“......당신도?”

“나 역시.”

그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신이라는 존재로 살아와, 이제는 그 옛날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시간이란 게 원래 그래, 많은 것을 망각하게 만들거든.”

“......”

“순환의 고리는, 신들의 종말이 오는 운명의 날이자 새 신들이 만들어지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신들의 종말...!

새 신이 만들어지는 시발점!

태호는 그 말뜻을 곱씹다가, 반문했다.

“그럼... 신들의 종말이 온다면, 당신도. 그리고 볼카노스 님도...?”

카실론이 빙긋 웃었다.

“모두 무(無)로 돌아가게 되겠지.”

“왜... 죽음이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태호의 질문은 합당했다.

지금 태호를 돕기로 한 두 신 역시 신이다. 태호를 돕는다는 것은, 그들 역시 죽음의 길로 향한다는 것이다.

“천계나, 인간계의 삶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카실론은 문득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권력을 쥔 이들의 탐욕은 끝이 없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든 하게 돼 버려.”

“권력...!”

카실론은 팔짱을 낀 채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찻잔 하나가 나타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이 만들어졌다.

“태곳적 시작된 전쟁도, 현재의 상황도. 모두 다 그로부터 시작된 거라고 보면 될 테지.”

동시에 태호의 사방이 빙글빙글 돌며 하나의 화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첫 화면은 태곳적으로 보였다.

거대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황폐한 세계 한복판. 빛의 거인과 판타로스가 맞붙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신들, 그리고 태호도 익히 본 바 있는 드래곤과 무 대륙의 전사들. 거신병들과 뱀파이어 일족, 그 외 무수히 많은 ‘신에 대적할 힘을 가졌던 일족들’이 보였다.

콰콰콰쾅!

콰쾅!

그리고 최선두에 서 있는 하얀 빛무리의 인간들!

태호는 그들이 수호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반대편.

판타로스를 필두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혼돈의 군단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

이미 본 대장군 다섯은 눈에 익지만, 그 외 처음 보는 대장군들도 족히 수십은 넘는 듯하고 장군급은 수백 단위를 진작 넘어섰다.

많은 이들이 죽고, 또 죽어 간다.

선두를 지키던 수호자들 역시 하나둘 쓰러질 즈음,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이잉-!

어느새 시점은 저 멀리. 아주 멀리서 내려다보는 형세가 되었다.

지이이이잉-!

싸우던 모든 이들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일 정도로 먼 시점에서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그 세계가 보였다.

콰아아아아-!

그 세계를 뒤덮는 것은 거대한 결계였다.

전쟁은 혼돈의 권좌의 패배였다.

어느새 사방이 바뀐다.

금빛 광채가 찬란히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그 성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건, 빛의 거인 메타트론이었다.

[메타트론 님!]

그를 부르는 목소리. 태호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어둠의 신 볼카노스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경악 그 자체였다.

[뭔 가, 볼 카 노 스.]

[드래곤을 비롯한 여러 일족의 힘을 빼앗으셨다고요? 대체 왜! 그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빼앗아?

태호는 그제야 흐름을 이해했다.

‘신에게 준했던 일족들은 하나같이 태고 시절 이후 힘을 대부분 소실했다고 했던 게, 빼앗겨서?’

[명 령 대 로 할 뿐 이 다.]

메타트론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들의 힘을 빼앗은 이유가 뭐랍니까? 예? 혹시 그들이 신의 영역에 도전할까, 그게 겁나서입니까? 후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요?]

[건 방 진 말 은 삼 가 라.]

볼카노스는 지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수호 일족도 그래서 척살령을 내린 겁니까? 권좌의 사도들이 수호 일족 사냥에 나섰다는 건 진작에 들었습니다. 진작 몇 명은 궁전으로 잡혀갔다지요? 이유가 뭡니까?]

[......]

[그들이 아니었으면 혼돈의 권좌는 절대 이길 수 없었소! 그들이 차원 결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수세에 몰린 것은 우리였을 거에요! 혼돈의 권좌는 그만큼 강했단 말이요! 대접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대체 왜!]

고오오오오-

일순간.

사방에 금빛 광휘가 일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광채는 태호의 몸을 투과하여 저편으로 향해, 볼카노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볼카노스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볼 카 노 스. 더 이 상 건 방 진 발 언 을 삼 가 라 했 다.]

[......]

볼카노스는 전혀 기죽지 않고, 여전히 독기 서린 두 눈으로 메타트론을 노려보았다.

[한 때는, 당신에게 정의가 있다고 믿었소.]

메타트론은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그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다.

[정 의.]

그는 볼카노스의 몸을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아 직 도 그 런 것 을 믿 나.]

그것이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들은 태호가 대부분 유추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예상대로, 리얼 포스는 태곳적 전쟁이 벌어졌던 한 차원이었다.

그리고, 수호자의 힘으로 그 세계 자체를 거대한 결계로 막아 버렸다. 그 결계는 일단 ‘세계의 맹약’이라는 이름하에 보호되며, 아주 강력하다.

화아아악!

어느새 돌아온 태호는 눈을 깜빡였다.

* * *

“앞으로는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리얼 포스를 둘러싼 세계의 맹약이 깨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뭐 그래도 아직 인간들 기준으론 꽤나 시간이 남았지만.”

세계의 맹약.

태호는 말을 곱씹었다.

“맹약은 비단 리얼 포스 하나만을 두고 만들어진 게 아니죠?”

“아니지.”

카실론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리얼 포스의 맹약은 극히 그 일부일 뿐. 수호자의 힘으로 만들어 낸 이중 가중 맹약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선 신력이고 혼돈력이고 절반으로 줄어들어 버리는 거지.”

태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세계의 맹약이란...”

“바로...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거대한 약속이지. 모든 차원에 적용되는 맹약,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 역풍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단 두 일족뿐이다.”

두 일족!

태호가 숨죽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혼돈의 일족이거나...”

카실론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수호 일족일 경우겠지.”

이로써 대부분의 의문이 풀렸다.

태호는 그 이후로도 여러 부분 궁금했던 점들을 묻고, 그 해답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부분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제단을 이용해 신을 리얼 포스의 대지로 부르는 경우 말입니다.”

“그래.”

“그 시점에서 신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신을 죽인다.

그 과격하지만 화끈한 표현에 볼카노스가 다급히 외쳤다.

[뭐, 뭐라고?]

“화신체는 죽여 봐야 소용없다. 아무 대미지도 받지 않아.”

“이런.”

태호가 꽤 실망한 얼굴을 했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이 세계에서는 혼돈의 힘만 활개를 치고, 천계의 신들은 큰 제약을 받고 있는 듯싶습니다만...”

혼돈의 힘이 활개 치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어 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유저들을 잘 조련해 키운 뒤, 잡아먹는 형세 아닌가?

“초기의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 하지만 상위 신들은 수호 일족을 잡아들여, 그들을 고문하며 세계를 입맛대로 바꾼 것이라 보는 게 이해가 쉽겠군.”

카실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는?”

“순환의 고리를 발견하고 나서, 천계의 힘으로는 절대 다가올 종말을 막을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나서부터겠지.”

순환의 고리.

태호는 시계탑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히 순환의 고리를 두고 일시적 동맹 관계를 맺는 거라 했었지.’

“애초에 리얼 포스의 이중 맹약 결계를 만든 이가 너무도 대단한 수호 일족의 대사제 데칼이었던지라, 그것을 모조리 무효화할 수 없으니 나름대로의 일시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 세계는 반복될수록, 혼돈의 권좌가 조금씩 힘을 더 비축할 수 있게 바뀌었다. 그래서 몇 회차만 더 반복된다면 이중 맹약이 깨질 거야.”

그렇다면.

태호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악신을 리얼 포스로 소환해 죽일 방법은 없다, 이 말씀이시군요.”

“흠... 어쩌면...”

카실론은 태호가 들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태호도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

로만은 혼돈의 결계를 펼쳐 악신 조겐을 지상으로 소환한 이력이 있었다.

태호는 로만을 불렀다.

“야.”

대답이 없다.

그래서 사정없이 구슬을 흔들었다. 마구 흔들고 또 흔든 뒤, 펜삼이에게 장난감으로 던져 주었다.

-......

놈은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빽 소리쳤다.

-꾸에에에에엑! 이런 개 시팔새끼들!

망망! 망!

태호는 펜삼이가 후다닥 달려와 태호에게 구슬을 내미는 것을 받아 들곤 물었다.

“야.”

-......뭐냐.

“혼돈의 힘으로 만든 결계 속에서 소환하면 천계의 신들이 이 땅에 강림하는 거 맞지?”

-......

“응?”

-......

“이 새끼가?”

태호는 다시 펜삼이에게 구슬을 던졌다.

“물어!”

망망! 망!

한참 동안 놀잇감이 되어 고통받던 로만이 다시 태호의 손에 쥐어질 무렵, 놈은 아마 기절한 것 같았다.

‘아티펙트 해제.’

펑!

구슬이 사람이 되었다.

검은 사슬에 삼중으로 칭칭 묶여 있는 형태의 로만이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태호는 볼카노스를 보았다.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아티펙트 속은 좁은 밀실 같은 식이라 보면 된다. 즉, 한번 흔들 때마다 사정없이 세상이 뒤틀리는 기분이지.]

“아하.”

태호는 단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로만을 툭툭 쳐 보다가, 일어날 기미가 없자 입을 열었다.

“어디 그럼 손가락부터 하나 잘라 볼까.”

인벤토리 창에서 날이 잘 선 것 같아 보이는 유니크 단검 하나를 꺼내 들 무렵.

흠칫!

로만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태호는 힐링 포션도 같이 꺼내며 빙긋 웃었다.

“걱정 마라, 잘려도 치료는 해 줄 테니까 죽진 않을 거야. 넌 죽으면 곤란해.”

“미, 미, 미친놈...”

로만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태호의 멱살을 쥐었지만, 힘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의 주박이 무섭구나.’

태호는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저것에 당했다면, 진짜 꼼짝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가 될 거다.

‘신과 싸울 땐 절대로 객기 부리면 안 되겠다.’

재차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본다.

태호는 로만을 번쩍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캐애액!”

그리고 볼카노스를 보았다.

“볼카노스 님. 말 안 듣는 놈에게 쓰기엔 고문법만 한 게 없는데, 그런 거 잘 아는 신 없습니까?”

[있다.]

볼카노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고문은 헬레이저가 아주 잘하지. 아마 정신에 환술을 걸어, 가상의 죽음을 수백 수천 번씩 먹여 줄 거다. 배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

태호는 문득 눈을 깜빡였다.

“환술 말이군요.”

환술이라고 하면, 태호도 환술 하나가 있다. 바로 케노스를 죽이고 얻은 ‘경계의 환술’이었다.

아직 써 본 적이 없지만, 이참에 써 보리라 마음먹은 그 시점이었다.

“마... 말한다... 말할 테니...”

로만이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태호는 막 치켜든 단검을 슬쩍 내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젠장... 이런 미, 미친 새끼들...”

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혼돈의 유산을 이용하는 거다...”

로만의 힘없는 목소리에, 태호는 눈을 깜빡이다 다시 단검을 들었다.

“아니, 말을 좀 끝까지 들어라...”

로만은 태호가 단검을 내리는 것을 곁눈질로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계를 만드는 일은... 별거 아니다. 문제는... 조겐을... 어찌 부르냐다. 그냥 부른다면... 너 같으면 수상쩍은 게 부른다고 나오겠냐? 그것도 화신체가 아니라, 본체 강림인데? 생각을... 좀 해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 읊어 봐.”

태호가 팔짱을 꼈다.

“조겐, 혹은... 몇몇 악신을... 부르는 표식이 있다. 알려 주는 대신, 내 조건 몇 개를...”

펑!

태호는 놈을 다시 구슬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던 태호를 보며, 카실론이 빙긋 웃었다.

“볼카노스 님.”

[......예.]

“아우슈리네가 잘 선택했군요. 저 인간은 아주 훌륭합니다.”

[......그렇습니까.]

태호가 다시 놈을 불러내자, 놈은 다시 초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꾸에에엑!”

헛구역질을 하던 로만의 앞에 쪼그려 앉은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이 새끼야.”

“......”

“협상은 없어.”

“크윽...”

로만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럼 이쪽도 협상은 없다... 혼자 알아서 잘해 봐라.”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것 같다.

펑!

“꾸에에엑!”

펑!

“어어어어억!”

펑!

“꽤애애액!”

잠깐의 소모전이 끝나고, 로만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비, 비, 빌어먹을 악마 같은 놈... 특수한... 표식이 있다. 동맹의... 표식이다.”

로만이 땅에 표식 하나를 그렸다. 기괴한 마법진 같은 표식이었다.

‘이걸 어떻게 믿지?’

말마따나, 절대 나타나지 말라는 표식일 수도 있다. 그럼 계획은 완전히 들통나고, 이후의 많은 가능성이 없어진다.

태호가 새 고민거리를 떠안았을 때.

카실론이 입을 열었다.

“저거 한 바퀴 더 돌려야겠다.”

“예?”

그가 씩 웃었다.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거든.”

흠칫!

로만이 놀라며 그를 보았다.

“서, 서, 설마!”

“설마 뭐? 아,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냐고?”

카실론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물론이지.”

< 진실의 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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