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일 아니다 >
“저거 봐, 엘린이다.”
“진짜 엘린이네?”
사람들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태호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하늘성.
하늘성은 하나의 거대한 도심이었다.
그곳에 들어선 엘린은 어쩐지 의기소침해진 얼굴이었다. 태호와 엘린이 걸어갈 때마다 사방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다시 등장했구만.”
“어쩌겠어? 떠돌이 신세가 됐으니...”
조소와 멸시를 담은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에, 엘린이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어깨는 축 처졌고 괜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퍽 안쓰러웠다.
허나, 곧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눈에 독기를 품었다.
“흥, 멍청이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태호가 물었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저래?”
“뭐, 뭐가.”
엘린이 도끼눈을 했다.
“시끄러, 물어보지 마. 닥쳐!”
“알았다.”
태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엘린의 가문이 하늘성에서 파문당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
‘하늘성의 균형을 깨고 지배하기 위해 움직였다... 였나?’
결국 그 의도는 깨어지고, 대부분의 가문 인원이 참형을 당한 뒤 축출당했다는 게 태호가 아는 정보였다.
하늘성의 풍경은 유저들의 대도시와 비슷했다.
다만, 그들의 복장이 신선했다. 다 같이 형이상학적 도형이 그려진 로브 같은 옷을 입고, 머리는 길게 길렀다.
내부 경제는 제법 활성화돼 있는 것 같았는데, 여러 신기한 물건들이 오고 가는 것이 보였다.
‘부유석, 저장석, 변환구슬... 그대로군.’
하늘성 고유의 아이템들이 유통되는 것을 구경하던 태호를 이끌고 엘린이 걸어간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슬쩍, 곁눈질을 하며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그 시선에 적대감이 공존했다.
‘역적의 가문이다 이거냐.’
태호는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선.
하늘성에 도달하는 것은 쉬웠다. 무혈입성을 했으니, 내부에서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
한참을 걷던 그녀가 멈춰 선 곳은 거대한 저택 앞이었다. 입구에는 사람 형체보다 조금 더 큰 로봇 같은 것들이 경계 태세에 있었다.
‘아머 슈트.’
이것이 하늘성 고유의 장비, 아머 슈트다.
이는 엘린의 공중정원에서 등장하던 몬스터들의 성질과 아주 비슷했는데, 간단히 말해 장착형 강화 옷이라고 보면 편하다.
저 아머 안에 사람이 탑승해 있으며, 저마다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엘린이 저택의 입구에 서자, 경비병 중 선두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이곳은 로데오 가문의 영역입니다.]
엘린이 그를 빤히 보다가, 품속에서 인장 하나를 꺼냈다.
“엘린 레이스. 레이스 가문의 가주로서 이곳을 방문했노라.”
그녀의 인장을 확인한 경비병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뻗어 인장을 스캔했다.
[흠... 무슨 용건으로?]
말투가 바뀌었다.
“로데오 가문의 가주, 타시니 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긴히 드릴 말씀이라... 이쪽에서 하고 가시지요.]
태호가 팔짱을 끼고 보다, 엘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조져?’
입 모양을 본 엘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태호의 가슴을 팍! 쳤다.
“레이스 가문의 공중정원에 대해 논할 것이다. 하찮은 네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니 속히 전달하라!”
‘제법 위엄이 있군.’
[......]
경비병이 잠시 서 있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전달하겠습니다.]
잠시 후, 들어갔던 그가 돌아와 태호와 엘린을 보며 말했다.
[입장을 허가합니다. 무장 해제를 요청합니다.]
그럴 거라는 말을 진작 전해들은 태호는 이미 아이템을 죄다 빼 둔 상태였다. 태호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지이잉-
그가 태호를 스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하십시오.]
* * *
로데오 가문.
이곳에 ‘마법의 깃털, 운다스타의 신발’이 있다.
과거 이 아이템들을 얻을 방법은 오직 ‘하늘성 경매’ 뿐이었다.
스토리를 풀자면 복잡한데, 결국 이 로데오 가문의 후계자 분쟁으로 인해 가보들이 유출되고 경매장까지 오게 되었다 뭐 이런 이야기다. 물론,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저택 내부는 그야말로 호화 찬란 그 자체였다.
하늘성은 일종의 고도화된 마도 문명의 산물이었는데 여기저기 첨단 마도 기술이 들어가 있었다. 거대한 수정구에서는 TV처럼 영상이 흘러나오고, 빗자루가 홀로 움직이며 청소를 한다.
화려한 복도를 걸어 가주실에 도착한 엘린이 문을 열었다.
그 안에 고풍스러운 옷을 갖추어 입은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역시나 고급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엘린을 바라보는 그의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하늘성, 로데오 가문의 가주]
[타시니 로데오]
“이거이거, 엘린이구나.”
엘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엘린이 탁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려 하자, 타시니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신상이라 곤란하고, 저쪽에 앉아 주겠니?”
“......”
엘린이 입술을 꾹 깨문 채 걸어가 다른 의자에 앉았다. 타시니가 입을 열었다.
“그래, 레이스 가문이 이 하늘성에 다시 돌아오다니... 어쩐 일인 게냐? 과거, 너희를 축출했던 것은...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거늘. 이토록 눈치가 없는 줄은 또 몰랐지 뭐냐.”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할 말?”
엘린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하늘성은 네 개 가문이 비슷한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곳이랬지.’
유저들이 알아내지 못한 하늘성의 비밀은 그 외에도 많다. 태호가 떠올린 에픽 외에도, 다른 에픽들이 제법 많이 숨어 있을 것이다.
엘린은 슬쩍 태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타시니에게 말했다.
“우리 가문의 파문은 부당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엘린의 목소리에 태호는 생각을 멈추고, 엘린을 보았다.
“파문은 네 개 가문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 너희는 멸문을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타시니는 미끈하게 기른 콧수염을 매만지며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들의 계략에 빠졌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요?”
“망상도 그쯤 하면 병이란다.”
엘린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하늘성의 백성들에게 여러 기술과 자본을 베풀던 레이스 가문을 견제하신 게 아니고요? 우리 가문에서 만든 아머 슈트 기술을 탐내 파문하고... 아버님을 사형대에 올린 거 아니고요?”
“끔찍한 악담을 하는구나. 네 아버지는 하늘성을 일통하기 위한 반역자에 불과하다. 아직 어린 너까지 죽일 수는 없어, 파문에 그친 것을 그리 곡해하고 있었느냐? 고작 그런 소릴 하러 온 거라면 그만 꺼지거라.”
‘오호. 아머 슈트가?’
태호는 어쩐지 흥미가 생겨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저희 가문이 파문당한 이후 하늘성에 급속도로 퍼진 아머 슈트 보급은 뭐죠?”
“좋은 기술임을 부정하진 않으마.”
타시니는 느긋했으며, 능글맞았다. 엘린은 화가 나는지, 숨을 씩씩 쉬며 이를 갈았다. 엘린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태호를 돌아보았다.
태호는 고개를 까닥였다.
‘역시나 여기도 뭔가가 있군.’
엘린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맹세해 보세요.”
“뭐?”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보시라고요. 아머 슈트 기술이 탐났고, 대중에게 인기 많던 레이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역적으로 몰아넣은 게 아니라고!”
엘린의 말에, 태호는 이번엔 타시니를 보았다.
그는 미끈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다 대답했다.
“꺼지라고 했다. 귀찮은 계집 같으니. 너 따위가 두려워 살려 둔 줄 아느냐? 민심을 돌리기 위해 너 하나쯤 살려 둔 것뿐이다.”
“......”
엘린은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흥... 좋다. 로데오 가문의 가주의 이름을 걸고, 그런 게 아니다. 레이스 가문은 더러운 반역자일 뿐이었지.”
-거짓.
‘오호, 그런 거야?’
다른 이들은 몰라도, 태호는 한눈에 보았다.
엘린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한눈에 봐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인간 세계에서도 흔히 보이는 정치질에 당한 것이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구경하다, 천천히 걸어가 엘린의 어깨를 짚었다.
“그쪽은 뭐냐? 네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게냐? 하긴... 어릴 적부터 외모 하나는 빼어났지. 큭큭...”
타시니가 노골적으로 엘린을 능욕했다.
“아니에요! 얘는...”
“비슷한 거라고 치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태호가 말을 끊었다.
“진짜 아니에요? 정치질해서 얘네 가문 조진 게 아니다, 이거죠?”
“천박하기는. 역적 가문의 질문에 응해 주는 것도 최대한의 도리를 다한 셈이다. 이제 꺼져라!”
-거짓.
태호가 다시 물었다.
“아머 슈트 기술이 탐나서가 아니라 이거에요?”
“그런 기술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독점 자산일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거짓.
참으로 편리한 아이템이었다.
태호는 이 ‘진실의 눈’이 신에게도 통함을 안다.
“역적으로 몰아 죽였나요?”
허나 여러 번 진실 확인을 해야 하기에, 비슷한 질문이 계속 오고 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태호의 두 눈에, 타시니의 목에 걸려 있는 오색찬란한 목걸이가 보였다.
이미 진작에 저것이 ‘변신’을 위한 목걸이임은 알고 있다. 엘린도 저런 것을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아니라고 했다!”
-거짓.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위협적이었죠?”
“저, 저런 천박한...! 사실이 아니다! 여봐라!”
-거짓.
‘그렇구만.’
태호는 슬쩍 엘린을 돌아보았다. 엘린이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지만, 표독스러운 눈매는 여전했다.
어쩐지 몹쓸 짓을 시킨 것 같다.
태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덜컥!
가주실의 문이 열리고 아머 슈트를 입은 경비병 둘이 들어왔다.
“당장 저 천박한 것들을 붙잡아 꽁꽁 묶어 두거라! 내 당장 저것들을...”
콰지직!
헌데.
그 두 경비병이 시커먼 뭔가를 얻어맞고, 고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쿵!
가주실의 문은 다시 닫혔다.
“어...?”
태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타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전신에 아이템들이 착용돼 있었다.
“자, 그럼 다음 질문.”
“......?”
그 순간.
타시니의 전신에 섬뜩한 격통이 가해졌다.
“어, 어어어억!”
강화된 중독이 신비력으로 가해졌으니 그 대미지는 말할 것도 없을 거다.
타시니가 몸을 뒤로 빼내며 막 목걸이를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태호의 ‘강화된 어둠의 명령 5연발’이 틀어박히며, 목걸이가 아작 났다.
빠지지직!
“억!”
타시니가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천천히 걸어온 태호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네 가문이 가진 가보는 몇 개지?”
“뭐, 뭐?”
태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였다.
“3초 주마. 몇 개야?”
“하, 하, 한 개!”
-거짓.
그가 소리쳤다.
‘폭사.’
콰콰쾅!
“크아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태호는 그런 그의 목덜미를 쥐고, 가볍게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다시 3초 준다. 몇 개?”
“두, 두, 두 개!”
-거짓.
‘두 개도 아니었어?’
태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악마나 다름없는 미소였다.
이번엔 태호가 일어서 엘린을 보았다. 엘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 낸 뒤, 전의 그 표독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태호는 씩 웃었다.
시선을 돌린 태호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얼이 빠진 타시니에게 다시 물었다.
“세 개?”
“세 개는 없다!”
-거짓.
“이 새끼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네 개?”
“아니다!”
-거짓.
“다섯 개... 아니지.”
태호는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타시니에게 재차 물었다.
“가보가 네 개지?”
“아니라고!”
놈이 경악하듯 소리쳤다.
-거짓.
네 개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과거에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픽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저들이 알아낼 수 없었던 것뿐이다.
‘노다지다.’
의외의 노다지였다.
“네 갠 거 다 알아. 그럼 지금부터 위치를 불어야지?”
“이, 이, 이런 미친놈이!”
“요즘 그런 소릴 자주 듣네.”
태호는 진짜 미친놈이 뭔지 보여 줄 생각으로, 지팡이 끝에 신비력을 잔뜩 모았다.
유저들에게는 죽음이 더럽게 재수 없는 일 정도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NPC들에게는 실제 죽음과 다를 게 없다.
촤라라라락-
[신의 주박술이 시전됩니다.]
“어, 어어어? 어어? 어어!”
놈이 경악했다.
촤라라락-!
신의 주박술이 타시니의 전신을 장악해 갔다. 신들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주박이 걸렸다.
“이, 이, 이런 미친...”
‘속임수.’
태호는 그런 타시니에게 로키의 가호 중 하나, ‘속임수’를 사용했다.
삽시간에 타시니는 구슬로 변하고, 태호는 타시니가 되었다.
벌컥!
가주실의 문이 열리고 무수한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힉!]
경비병들이 쓰러진 두 경비병을 보더니 경악하며 달려오려던 찰나.
태호가 소리쳤다.
“별일 아니다!”
< 별일 아니다 > 끝